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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9 물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한강론(중앙신인문학상080918)
  2. 2008/11/09 진열장의 내력(중앙신인문학상080918)
  3. 2008/11/09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중앙 신인문학상080918)
  4. 2008/11/09 세계문학상 2005년 당선작 ‘미실’
  5. 2008/11/09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세계08)
  6. 2008/11/09 너와집(세계08)
  7. 2008/11/09 우유(세계08)
  8. 2008/11/09 혀(세계07)
  9. 2008/11/09 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세계06)
  10. 2008/11/09 불가리아의 여인(세계06)
  11. 2008/11/09 여자의 계단(세계06) (4)
  12. 2008/11/09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의 경향-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세계04)
  13. 2008/11/09 정원에 길을 묻다(세계04)
  14. 2008/11/09 작은 손(세계04)
  15. 2008/11/09 숨은 띠(세계03)
  16. 2008/11/09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세계02)
  17. 2008/11/09 공어와 빙어(세계02)
  18. 2008/11/09 水踰里에서(세계01)
  19. 2008/11/08 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세계01)
  20. 2008/11/08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세계00)
  21. 2008/11/08 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세계00)
  22. 2008/11/08 폭염(暴炎)(세계00)
  23. 2008/11/08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동아08)
  24. 2008/11/08 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동아08)
  25. 2008/11/08 나도 알을 품었어(동아08)
  26. 2008/11/08 시나리오-당선작이 나오지 않아서 심사평만 싣습니다(동아08)
  27. 2008/11/08 리모콘(동아08)
  28. 2008/11/08 시조-타사 중복투고로 당선 취소함(동아08)
  29. 2008/11/08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동아08)
  30. 2008/11/08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동아08)

물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한강론(중앙신인문학상080918)

대한민국 신춘문예/문학평론 2008/11/09 01:01
물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 -한강론 이학영

1. 심연에 드러난 이방인의 초상

초상화나 자화상 가운데에는 외관의 충실한 모사(模寫)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마치 녹아내리는 고무 가면처럼 보이는 달리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손가락이 일곱 개이거나 팔이 두 쌍인 인물이 등장하는 샤갈과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인 초상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소여를 그로테스크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괴기하게 함몰되고 뒤틀린 베이컨의 얼굴이나 나목(裸木)처럼 깡마르고 앙상한 실레의 체구와 손가락들, 그리고 흰자위마저 검게 채색된 모딜리아니의 두 눈도 인체의 비례와 균형, 색채 등의 해부학적인 조건들을 훌쩍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이상화된 형태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그러진’ 초상들을 보고 있자면 화가가 애초에 포착하려 의도한 것, 그리고 그 그림에서 우리의 주목을 잡아끈 것은 육체적인 외관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것을 교란하고 균열시키면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내면의 얼굴’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마치 거울처럼 외양만을 충실하게 옮겨내려는 초상화가들의 화폭(畵幅)을 수면(水面)에 비유할 수 있다면 외관으로 환원되지 않는 낯선 ‘나’가 음음하게 얼굴을 내미는 것은 심연의 화폭을 통해서이다. 어두운 밀실에 베일로 가려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이러한 은밀한 화폭의 대표적인 예이다. 도리언이 잔인하고 악덕한 행위들을 일삼을수록 차츰 추악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그의 초상화는 젊고 아름다운 외양 아래에서 꿈틀대는 악마적인 충동과 죄의식, 공포로 얼룩진 내면을 비추는 심연 그 자체이다. 그런데 심연의 화폭에 비밀스럽게 노출되는 이러한 정체성은 어떤 의미에서 화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때론 그것을 감추려는 의지를 배반하면서 그림 속으로 냄새처럼 배어든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품의 모든 차원에 드리워진 작가적인 주관성의 그림자로서, 화가가 자신의 그림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의’ 앎, ‘자신의’ 의지, ‘자신의’ 기도”, 즉 “자기 자신”(J.P. Sartre, 정명환 역,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p. 62)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델의 외관과 닮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심연의 화폭에 떠오른 형상들은 어느 정도 자화상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강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술가들의 삶과 그 작품의 창작과정이 서사의 주된 줄기를 이루는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초기작인 「저녁 빛」과 『검은 사슴』에서부터 「아기 부처」, 『그대의 차가운 손』, 「노랑무늬영원」, 『채식주의자』연작, 그리고 최근작인 「파란 돌」과 『바람이 분다, 가라』(연재 중)에 이르기까지 화가, 사진작가, 조각가, 일러스트레이터, 비디오아티스트 등의 예술가-인물들은 그들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들로부터 예술적인 영감을 얻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 예술가-인물들뿐만 아니라 한강의 다른 인물들도 꿈과 몽상, 관조와 명상의 형식으로 펼치는 환상의 화폭 속에서 ‘내면의 얼굴’과 직면한다. 요컨대 이미지를 포착하는 한강의 몽상적인 자아는 물가에서 특히 ‘나’의 낯선 얼굴이 일렁이는 심연에서 그 상상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실제로 『그대의 차가운 손』에 등장하는 조각가 장운형은 자신이 만든 손 조형물에 배어있는 ‘나’, 즉 애써 숨겼음에도 드러나는 자신의 “감정, 노력”, “개인사”를 발견하고 “그것은 마치 내 발치에 누운 내 시체를 똑똑히 내려다보는 악몽과도 같았다”(『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89)고 술회한다. 「파란 돌」에서 미술가인 ‘당신’은 화자인 ‘나’의 나무 그림이 ‘나’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파란 돌」, 《현대문학》, 2006.7, p. 79)라는 그의 말은 한강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예술 작품과 이미지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관점을 요약하여 대변해준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나’의 나무 그림이나 ‘당신’이 물과 먹을 이용해 한지 위에 만든, 폭발하는 별과 같은 형상들이 모두 일종의 ‘얼굴 없는 자화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냇물과 강, 바다, 혹은 동굴의 약수와 피 웅덩이에서 눈뜨는 한강의 인물들이 발견하는 자신의 물그림자는 나르시스의 그것처럼 매혹적인 수면의 이미지가 아니라 괴기스럽고 낯설어서 일상의 ‘나’와 쉽게 통합할 수 없는 심연의 이미지이다. 「아기 부처」의 선희는 꿈속의 약수 뜨는 동굴 안에서 자신의 기묘한 분신과 조우한다. 그것은 진흙바닥에 드러난 얼굴 형상으로서, ‘아기 부처’라고 불리지만 “눈꼬리가 위로 찢어진데다 음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그 얼굴”(「아기 부처」,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67)은 평온한 부처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반복되는 이 꿈에서 그녀는 진흙 얼굴을 주물러 다시 빚거나 그 위에 흙을 덮고 신발로 짓이기지만 그럴수록 “일그러진 이마”와 “치켜올라간 눈, 빈정대는 입매”, “탐욕과 증오에 찬 표정”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질 뿐이다. 그녀의 일부인 듯 차지게 달라붙는 이 흉한 진흙 얼굴, 스스로 지우고 부정하려 하지만 생시에도 일상의 한 귀퉁이를 찢고 출몰하는 이 혐오스러운 얼굴은 무의미하고 오랜 인내의 이면에 쌓아온 남편에 대한 경멸과 원망,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자책이 만들어낸 분신이다.

이러한 섬뜩한 느낌을 주는 ‘나’와의 대면은 자아정체성의 일관된 서사를 교란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합된 자아를 위협하는 실존적인 문제들을 적절하게 차단하거나 회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강의 인물들은 심연에서 자신의 끔찍한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연작에서는 이 분신의 파괴적인 위력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꿈에서 영혜는 어둡고 추운 숲속의 낡은 헛간,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그곳의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서 끔찍한 얼굴, 맹수처럼 번쩍이는 눈과 마주친다.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이탤릭체는 작품의 표기를 따름](『채식주의자』, 창비, 2007, p. 19)

이 잔혹한 꿈이 영혜를 덮친 순간은, “식탁”, “남편”, “부엌의 가구들”로 촘촘하게 짜여진 일상의 피륙이 더 이상 피 묻은 날고기를 씹어 먹는 맹수의 얼굴이 넘실대는 피 웅덩이, 즉 심연을 효과적으로 가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실존적인 의문들을 차단해주던 일상적인 관행이 힘을 잃었으므로 그녀는 낯선 땅에 들어선 이방인이 된다. 무자비한 살해와 살육이 끊임없이 자행되는 현장인 그곳에서 그녀는 살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살자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그녀를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흰둥이의 ‘핏물 고인 눈’을 비롯한 폭력과 죽음의 영상들은 그녀 앞에 핏물의 유유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영혜가 살해의 악몽과 함께 살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보여주는 불면과 채식주의, 노출과 향일성(向日性), 생물학적인 죽음도 불사하는 ‘나무되기’의 시도는 이 맹수의 얼굴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느 순간 한강의 인물들을 압도적으로 덮치는 끔찍한 자화상은 ‘약수’와 ‘피 웅덩이’ 같은 심연의 지류에서 만나게 되는 도리언 그레이적인 초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미정형의 유동체에 서식하는 분신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생시에도 출몰하는 그 분신의 변형된 이미지들은 심연이 ‘나’에게 보내오는 일종의 존재론적인 화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강 작품의 주요한 이미지들에는 모두 이 심연의 흔적, 즉 마르지 않은 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와 텍스트를 가로질러 다시 태어나는 그녀의 이미지들은 밑그림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수채화요, 물가에서 끊임없이 번식하는 수초(水草)들이다. 그동안 한강 소설의 중심 이미지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던 나무와 그 새로 돋은 연두색 잎사귀들이야말로 수액으로 그려낸 자연의 수채화가 아니던가.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한 것은 강물의 신인 그녀의 아버지 페네이오스 덕분이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한강은 작가의 몽상적 자아가 심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의 후기에 간접적으로 고백해놓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위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게 갚기 힘든 빚이 있다. (「작가의 말」,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322)

여기에서 일상적인 자아가 죽고 몽상적인 자아가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 바로 물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몽상적 자아와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일렁이는 풍경, 즉 하늘과 새, 기차 바퀴 소리와 수초들이 문학적 수채화의 대상으로서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심연은 ‘나’의 파괴가 일어나는 무덤인 동시에 새로운 자아와 문학적 이미지가 태어나는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강의 문학 텍스트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과 그 길을 따라 거듭되는 죽음과 생, 이방인의 얼굴을 비롯한 이미지들의 식물적인 생장을 주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자아의 보호고치로 삼투하는 어둠강 혹은 액화된 몸

심연에서 깨어난 한강의 몽상적인 자아는 이방인의 초상에 문학적인 육체를 부여함으로써 그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즉 어두운 물그림자들에 살과 피를,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운명을 불어넣어 그들을 심연의 거주자로서 실체화한다.

한강의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에 실린 작품들과 장편소설 『검은 사슴』에는 음산하고 무거운 검은 물이 주조음처럼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 심연의 거주자들이 초기작들의 중심인물 중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극단적인 고통과 불행의 와중에 절망하고 삶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며 타인과의 진지한 교류를 차단한 채 이방인의 운명을 살아간다. 어둠의 유동적인 덩어리들은 마치 집처럼, 혹은 옷처럼 그들을 휘감았다가 마침내 그들의 몸속으로 침투하여 그 입자들로 내장과 혈관을 가득 채우게 된다. 결국 검은 액체는 이 인물들의 살과 피와 뼈의 실체를 이루는 양수이다. 초기작의 어느 작품에서나 그들이 먹처럼 농밀하게 액화된 어둠에 침윤되는 과정이나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음습한 밤안개처럼” 암흑의 거리를 배회하거나(「붉은 닻」의 동영), 정원수들을 뿌리째 뽑아 태워서 어둠이 고이는 검은 구덩이를 만들거나(「진달래 능선」의 황씨), 남해의 갯바닥을 뒹굴어 상처와 혈관 속으로 검은 개펄이 스며들기를 바라거나(「여수의 사랑」의 자흔), 현실의 모든 관계를 파기하고 동해로 흐르는 ‘강’인 야간열차에 오르는 꿈을 꾸다가(「야간 열차」의 동걸), 급기야 배를 타고 해 지는 서해로 나가서 익사하거나(「저녁 빛」의 재헌), 고층 아파트에서 망망대해 같은 밤하늘로 투신한다(「어둠의 사육제」의 명환).

이들을 두텁고 견고하게 포박하고 있는 어둠이 침윤되는 과정은 불가항력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부조된다. 왜냐하면 밤마다 거리를 떠돌고, 정원의 나무를 태우고, 이미 죽은 이를 기다리고, 애써 그린 그림을 불태우고, 자신의 전 재산인 아파트를 생면부지의 남에게 넘기려는 그들의 행위는 부조리하고, 광적이고, 자멸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요하게 달라붙는 어둠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근원적인 사건들이 제시되고 있다. 어려서 부모가 죽거나 반대로 어린 자식, 임신한 아내, 쌍둥이 동생 등의 가족이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는 상실의 경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심연의 주민들이 저마다 간직한 가족사의 비극이나 신산한 삶의 이력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무게감을 지닌다기보다는 압도적인 검은 물의 이미지를 합리화하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둠강의 이미지가 이방인의 서사를 만들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연의 초상이 육화된 존재가 이 이방인들이라면 그 살아 있는 물그림자를 자화상인양 들여다보며 전율하는 인물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자기 파괴로 치닫는 존재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자멸을 제지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자이며, 그 존재가 자신의 등 뒤에 일렁이는 어둠강을 가시화하는 까닭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와 절연(絶緣)하려는 인물이며, 그러나 결국은 스스로 그를 만나기 위해 심연 앞에 서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는 방죽 위의 거주자이다. 『여수의 사랑』 전편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짝패 관계에 대하여 김병익은 인간의 근원적인 우수와 비애를 공동으로 나누어가진 ‘일란성 쌍둥이’로 비유한 바 있다.(김병익, 「희망 없는 세상을, 고아처럼」,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p. 310-312) 실제로 한강 초기작의 세계에서 심연의 거주자들과 함께 중심인물의 또 다른 한축을 이루고 있는 방죽의 거주자들은 그 분신적인 짝패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오랫동안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발견하고, 그 원천을 향해 더욱 깊이 침잠함으로써 외상적인 기억의 실체와 마주한다. 요컨대 그 세계에서 ‘너’는 심연 속의 ‘나’이다. 그래서 ‘너’와의 대면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장막을 해체하여 그것이 가리고 있었던 심연을 드러내 보여준다. 한강의 인물들을 어두운 심연으로 인도하는 이 짝패와의 만남과 거부, 그리고 추적의 과정이 그녀의 초기작들의 한 중심적인 서사를 이룬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방죽 아래의 물은 왜 그렇게 쉽게 암전(暗轉)된 액체로 변하는 것일까? 또 그 어두워진 물에 다가가는 일이 왜 한강의 인물들에게 그토록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강의 상상 세계에서 물은 ‘죽음’을 수용하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물에 삼투되어 물은 죽음의 실체적인 물질이 된다. 실제로 한강 소설에 나타난 모든 죽음에는 물이 관여되어 있다. 즉 그녀의 인물들에게 죽음은 곧 ‘익사(溺死)’이다.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여수 앞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으며, 「붉은 닻」에서 동식의 아버지는 폭우로 불어난 계곡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저녁 빛」의 재헌은 스스로 배를 몰아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검은 사슴』의 민영은 제주도 근처의 바다에서 친구들과 밤낚시를 하다가 배가 전복되어 익사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익사가 아니더라도 죽음이 물 이미지와 결합되는 경우가 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 명환은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지만, 그가 몸을 던진 서울의 밤하늘은 “집어등을 밝힌 오징어잡이 어선들”같은 불빛이 드문드문 켜진 밤바다로 묘사되기에 그의 죽음 역시 어두운 물에 흡수된다.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 ‘나’의 어머니는 철길에 머리를 던져 죽었지만, 그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의해서 곧 익사로 탈바꿈된다. “그곳이 무슨 강이라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철길을 흐르는 강」, 『내 여자의 열매』, p. 308) 이와 같이 사랑하는 이들을 삼킨 물, 다시는 영원히 건너올 수 없는 삼도천(三途川)은 점차 어두워지고 농밀해지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이 물은 포우(E.A.Poe)적인 물이다. 포우의 물은 그림자를 물질적으로 빨아들여 날마다 더 검고 무거워지는 물이자, “우리들 안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에, 나날의 무덤을 제공하는” 물로서 죽음의 물질적인 지주(支柱)이기 때문이다.(Gaston Bachelard, 이가림 역, 『물과 꿈-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시론』, 문예출판사, 1980, pp. 81-86)

그래서 방죽 위의 인물들에게 검은 물, 그리고 심연 자화상과 대면하는 일은 자아를 해체시키고 ‘보호고치’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보호고치란 존재론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심연으로부터 이 자아를 격리시키는 일종의 방파제라고 할 수 있다.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에 의하면 ‘보호고치’란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괄호치기’를 통해 일상사를 관행적으로 처리하고 자기 전기(傳記)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방어 기제를 의미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전통과 의례가 점차 힘을 잃게 되자 현대인들은 자아의 성찰적인 기획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누구나 일관된 자아정체성의 서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순간 제기되는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생긴다. ‘습관’이나 ‘관행’의 수준에서 실존적인 문제들을 적절히 괄호쳐내지 못한다면 ‘불안’과 ‘수치’를 초래하게 되고, 이것은 정신적인 안녕은 물론이고 존재론적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Anthony Giddens, 권기돈 역, 『현대성과 자아정체성-후기 현대의 자아와 사회』, 새물결, 1997, pp. 38-49) 따라서 일상의 무사감(無事感)이나 ‘정상성’은 실존적인 파도와 도덕적인 심연을 가려주는 장막으로서의 보호고치가 제대로 기능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아를 심각하게 교란하는 파동인 물 이미지가 미만한 한강의 소설들은 이러한 존재론적인 무사감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취약한 기반 위에 조성된 것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방죽 위의 인물들은 덮쳐오는 물과 심연의 자화상에서 눈을 돌리는 한에 있어서만 ‘나’의 안정된 자아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검은 유동체가 주는 불안을 막고 존재론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방죽 위의 인물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정착하기를, 분신적인 짝패와 절연하여 죽음의 기억이 영원히 봉해지기를 희망한다. 이 정착과 절연의 기도는 나중에 물을 가리는 환상의 베일과 ‘가면’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붉은 닻」의 동식은 계곡에서 실종된 아버지의 혼령이 출몰하는 집, 즉 “바위에 찍혀 망가진 그의 살집이, 옷에 엉킨 뼈와 혈관들, 더러운 외투와 속옷과 흙탕물로 얼룩진 찢긴 바지가 흉몽 중에 격렬한 물살이 되어 출렁거”(「붉은 닻」, 『여수의 사랑』, p. 299)리는 자신의 후락한 집과 늘 어둠에 잠겨 있는 그 황량한 동네를 떠나 ‘월급봉투’, ‘아내와 자식들’, ‘아파트 청약금’으로 상징되는 안온한 소시민의 삶에 영원히 정박(碇泊)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정착과 안주의 꿈이다. 그러나 동생인 동영은 밤안개처럼 어둠속을 유랑하며 끊임없이 아버지를 환기시킴으로써 그의 이러한 희망을 배반한다. 「여수의 사랑」에서는 이 분신적인 짝패가 불러일으키는 검은 물에 대한 환기력과 절연의 시도가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정선과 자흔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정선에게 자흔은, 술에 취한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이 익사한 여수 바다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즉 정선은 그녀에게서 “여수 앞바다의 짠물 냄새”와 “선착장에 버려진 상한 생선들의 냄새”를 맡기에 이르는 것이다. 정선의 결벽증과 구토, 자흔에게 보이는 거부의 몸짓 등은 바로 여수의 검푸른 바다에 대한 무의식적인 부정 혹은 두려움에 찬 회피임을 알 수 있다. 자흔을 만나기 전까지 정선의 의식 속에서 여수의 바다는 견고한 차단막으로 비교적 잘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정착과 절연의 시도는 끝내 실패하고, 방죽 위의 인물들은 분신적 짝패인 심연의 인물들이 열어 보여주는 외상들을 응시함으로써 자아의 ‘죽음’을 체험한다. 자아의 이러한 붕괴 과정은 이슬에 젖어드는 옷, 허물어지거나 산산이 흩어지는 살과 뼈, 액화되는 몸의 이미지들로 나타난다.

우선 어둠강의 희생자들이 보내오는 검은 파문을 응시하는 강둑의 주민이 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밤하늘이 액체적인 유동성을 지닌 어둠의 대양으로 묘사되며 액화된 어둠은 다시 유영하는 거대한 우주적인 포식자로 제시된다. 도시의 밤은, 이모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기식(寄食)하는 영진을 포위하는 검은 바다이다. 빛의 천적인 포식자-어둠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침투하여 술렁대며 또아리를 틀고, “검푸른 혓바닥을 낼름거리”(「어둠의 사육제」, 『여수의 사랑』, p. 269)며 흥건한 타액을 흘리면서 불빛의 입자들을 덮쳐서 “도시를 한 입씩 집어삼키”(p. 248)고 있다. 이처럼 암전된 물 혹은 액화된 어둠의 이미지가 이 작품에서 특히 공격적이고 난폭한 내면성을 지니는 것은 그것에 도시 군상들의 우울한 죽음과 불행의 그림자가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환은 교통사고로 임신한 아내를 잃고 자신은 다리가 잘렸는데, 가해자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그 가족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집을 얻어 그들을 괴롭히다가 그 일가가 견디다 못해 이사하자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생면부지의 남인 영진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넘기려한다. 한편 인숙은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봉제공장을 다니며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다가 간암을 선고받자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영진 몰래 전세금을 빼내 달아난다. 명환의 보복과 광기어린 호의, 그 젊은 아내의 무고한 죽음, 인숙의 독기 서린 배신과 비관은 서로 조응하며 사나운 검은 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명환의 방에서부터 헤엄쳐”와 영진의 베란다 문을 두들겨대는 어둠의 파도는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 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 모를 여인의 하혈 같았”(p. 259)던 것이다. 여인의 늘어진 ‘머리채’나 ‘하혈’은 어둠강의 제유적 이미지로서 위협적인 ‘밤바다’를 환기한다. 영진은 이 어두운 물의 난폭성에 전율하면서 그 희생자들이 보내오는 고통의 파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파문들은 서늘한 빗물이 되어 심연 앞에 선 인물의 몸을 적시다가 종내에는 그 살과 뼈와 내장을 해체시킨다. 「저녁빛」에서는 이러한 붕괴가 살이 뭉개어지고, 뼈들이 “일제히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주저앉”고, “모든 근육과 내장들이 성내며 사방으로 튕겨져나”(「저녁빛」, 『여수의 사랑』, p. 181)가는 환영으로 나타난다. 이 붕괴를 거쳐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궁극적인 단계가 바로 융해되는 신체, 액화하는 몸의 이미지이다.

내 눈에서 격렬한 눈물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얼굴이 오래된 귤 껍질같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기도(氣道)와 폐가 바싹 구운 싸구려 밀과자처럼 꼬였다. 눈물은 눈에서뿐 아니라 온 몸뚱이의 살에서 뻘뻘 흘러나왔다. 끈적끈적한 사지가 방파제의 콘크리트 바닥으로 녹아내렸다.

마침내 들쥐 새끼만한 크기로 쪼그라든 나는 은박지처럼 구겨진 가슴을 움켜쥐며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길과 방파제가 만나는 모서리에는 얄따란 홈이 패어 있었는데, 내 눈물은 이미 그 홈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한때 내 살과 뼈였던 것들이 박명에 음음히 번쩍이며 물살쳐갔다. (중략)

커다란 손 하나가 내 몸뚱이를 집어올린 것은 그때였다.

반항하는 내 뒤틀린 몸을 손은 차근차근 분해하기 시작했다. 물컹한 살갗을 비집고 흰 척추와 갈비뼈를 추려내는 손놀림은 사뭇 자연스러웠다. 눈도 귀도 코도 녹아버린 나에게 손의 주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는 것이 이상했다.(『검은 사슴』, 문학동네, 1998, pp. 11-12)

『검은 사슴』의 허두에 제시된 인영의 악몽은 바로 이 융해된 몸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는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신체의 완전한 액화와 그에 이은 어두운 바다와의 혼류, 그리고 분신적 짝패의 분해적인 역할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한강의 작품들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어둠강은 ‘나’의 통합된 자아라는 환상을 교란하고 자아의 견고한 보호고치로 삼투하여 그 상상적인 의복을 내부로부터 파괴한다. 결국 방죽의 거주자들이 스스로 ‘나’라고 생각해서 애착을 가졌던 모든 것들은 어둠강에 의해서 최후를 맞고 물로 환원된다.

3. 파라핀의 늪(‘沼’)과 갈수(渴水)의 이미지

어둠강의 거주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한강의 문학적 노력은 점차 심화된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된다. 하나는 자아의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이방인들에 대한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영속성을 믿는, 일종의 도피자들의 초상을 추적하는 것이다. 전자가 심연의 거주자들에 대한 탐구의 일환이라면 후자는 방죽의 거주자들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먼저 도피자들의 초상을 살펴보면, 그것이 물의 증발이나 응고 혹은 경화(硬化) 등의 갈수(渴水)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딱딱한 탈을 만들어 쓰고 그것이 영속하는 자아의 본체인 양 믿음으로써 심연으로부터 눈을 돌리고자 한다. 한강은 심연의 초상을 은폐하는 가면에 의존하여 벌이는 도피자들의 필사적인 곡예를 꾸준히 서사화하고 있다.

우선 얼굴에 단단한 껍질이 서서히 응고되는 상상적인 과정이 제시된다. 「질주」에서 진규는 동생 인규를 죽인 동네 아이들에게 복수를 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그들과 독액을 나누어 마시는 상상을 한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진규는 복수심에 불타던 자신의 유년기를 돌아볼 때마다,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해서 자신이 언제나 소량의 독액을 복용해온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가 마신 독이 그의 얼굴에 냉정한 껍질을 응고시”(「질주」, 『여수의 사랑』, p. 75)켜 버렸으며 그 껍질을 부수지 못하는 자신은 비정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심연은 복수심이라는 독액에 의해서 응고되고 마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애착과 강력한 보호고치에 대한 열망 때문에 실존적인 의문들이 일렁이던 심연 위로 응고와 갈수의 이미지들이 두터운 층을 이루며 겹쳐진다. 이제 심연은 “뻘의 단단한 피부를 뚫고 나온 상흔”(「붉은 닻」)처럼 이 응고된 피막을 찢고서야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삶의 생기를 잊은 ‘자동인형들’은 “반인반수”(「어느 날 그는」)처럼 오토바이와 일체가 되어, 도심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빛나는 강물을 아무런 감흥 없이 질주해 지나친다. “진흙으로 빚은 가면”(「저녁 빛」)이나 “포커페이스”(「아기 부처」), “메마른 얼굴”(「여수의 사랑」), “납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한 얼굴”(「해질녘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등이 심연의 응고나 경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기호들이다. 이 가면과 껍질의 층위는 불안을 봉쇄함으로써 존재론적인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보호고치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가면에 집착하는 ‘나’는 ‘너’와의 진정한 만남과 대화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나-너’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변질시켜버린다. 생의 본질적인 변화나 실존적인 전환의 가능성을 묻어두려는 이러한 태도가 심화되면 마치 “이미 죽은 뒤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것”과 같은 표정을 낳기 때문에 한강 소설의 모든 가면과 껍질들은 ‘데드마스크’로 수렴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도피자들에게 조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데드마스크’를 쓴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여 회피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영속성의 부정으로서의 ‘죽음’인 것이다.

한강은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사회 속의 자아가 겪는 모험을, 심연을 덮고 있는 얇은 막 위에서 가면을 쓴 채 곡예를 벌이는 상황으로 투시해낸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그대의 차가운 손』, p. 313)가는 것이다. 여러 가면의 기원과 일생을 추적하고 있는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은 인간관계 속에 드러나는 가면들의 곡예, 즉 가장무도회를 그려내는 동시에 껍질처럼 되어버린 가면을 벗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자문하고 있다.

액자구조로 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액자 내부의 주인공인 장운형은 조각가로서 모델의 손과 몸, 그리고 얼굴의 형상을 석고로 떠내는 작업을 한다. 이때 손과 몸은 정체성을 누설하며 동시에 교묘하게 숨기는 독립적인 얼굴이기에 그가 떠낸 껍데기들은 말 그대로 가면이자 보호고치이다. 살아있는 몸의 형상 그대로이되 딱딱하고 속이 빈 형태인 이 탈들은 응고된 외피의 가장 완벽한 구현물이다. 외관과 내면의 괴리에 관한 인식, 그리고 그 미지의 은폐물들을 꿰뚫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장운형의 예술적인 동기가 된다. 그는 웃는 얼굴의 이면을 투시하려는 욕망을 예술적인 열정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선 앞에서 타인의 가면들은 보호고치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장운형의 모델인 L과 E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출과 가혹한 통제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L은 어릴 때 양부의 성폭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살을 찌워 ‘괴물’ 같은 거구가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자 이제 거식과 폭식을 오가며 생명을 건 다이어트에 몰두한다. ‘거울’과 ‘저울’로 상징되는 타인들의 시선에 주권을 넘겨준 자아는 사회적인 모델이 제시하는 ‘날씬함’이라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체의 무자비한 통제를 단행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나타나는 거식증과 폭식증 등의 식이장애는 이러한 자아의 기획이 자기보호본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E역시 과거의 ‘나’와 철저하게 절연하고 타인의 거울에 둘러싸여 모방적으로 살아간다. 그녀는 ‘육손이’로서 살았던 과거를 폐기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절단하고 과거의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떠난다.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실존적인 문제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조건으로 치환된다. 즉 그녀는 “예절과 호의, 외모와 지위, 흔히 인간성이나 마음씀씀이라고 부르는 것”(p. 301)의 영역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이처럼 인위적인 통제와 연출의 영역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러움’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그녀는 심지어 성적 흥분을 가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혹한 자기 통제와 치밀한 자기 연출에 의해 허위적인 ‘자아’가 탄생하며 그 고유의 생을 살게 된다.

실존적인 문제들이 격리되고 가면이 중시되는 문화에서 타인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심연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제 자신만을 되돌려주는 거울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로 작용하기 때문에, 모두 완벽한 연출을 통해서 타인에게서 제 자신의 고정된 상을 얻으려고 한다. 심연의 초상을 거부하는 이 도피자들에 의해 심연은 응고된 물, 혹은 파라핀의 늪이 되고 만다. 『그대의 차가운 손』의 E가 디자인한 카페 ‘沼’의 실내공간은 이 응고된 심연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세하게 묘사된다. 층계와 내부 공간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원주형 유리그릇, 그리고 소파와 소파 사이로 놓인 유리 칸막이에는 “마치 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파라핀”(p. 199)이 채워져 있다. 응고된 물인 파라핀의 늪은 더 이상 심연의 초상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어둠강이 심연의 거주자들을 탄생시킨 양수라면 물처럼 보이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연출된 물질인 파라핀은 도피자들의 모방적인 가면을 만들어내는 가짜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허위적인 ‘자아’를 둘러싼 파라핀의 막과 가면은 ‘과거’의 틈입으로 때때로 균열이 생긴다. E에게는 때때로, 잘라내기 전의 여섯째 손가락의 이미지가 불현듯 닥쳐서 정체성의 일관된 서사를 끊고 불연속점을 만들어낸다. 그 불연속점은 ‘진짜’ 심연으로 통하는 통로의 입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파열의 틈은 정운형과 E가 차례로 전신에 석고를 발라 굳힌 후 떼어내는 ‘껍질 벗기’ 행위를 통해 극단적으로 넓혀진다. ‘껍질 벗기’는 그동안 걸치고 있던 ‘나’라는 가면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일종의 제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강 소설에서 응고되고 경화된 보호고치가 붕괴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영속성의 상실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삶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순간을 극적으로 그려낸 장면이다.

4. 심연의 진화론과 부조리한 생의 원형적 이미지

심연의 거주자들은 이제 연속되는 ‘껍질 벗기’, 매순간의 죽음을 통해서 더욱 더 깊고 어두운 수중으로 침잠한다. 매순간 죽음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이들은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생명 이전의 물질로 회귀하면서 마치 누적된 죽음에 의해서 계통발생적인 진화를 역으로 거스르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의 환상인 자아라는 ‘외투’를 벗고, 물의 의지, 즉 생의 의지로서의 물에 자신을 맡기는 인물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넘어서는 부조리한 추구이다. 심연의 거주자들은 이러한 부조리한 추구에 의해 꽃이 되고, 빛이 된다.

『검은 사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정상성의 궤도에서 이탈한 듯이 보이는 의선의 불가해한 행위들은 바로 한 존재를 보호해주는 실존적인 '외투'가 완전히 결핍되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시의 대로를 나신(裸身)으로 뛰어다닌 그녀의 광태는, 자아를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외상적인 기억의 출몰에 대응하거나 그것을 적당히 괄호쳐줄 실존적인 ‘외투’가 결여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왜 의선에게는 보호고치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녀는 어린 나이에 유기된 존재, 사회의 일원으로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이었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에 의해 산 채로 버려진 늙은 개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그녀는 정신병을 앓아 집을 나간 어머니에 의해서, 또 그 어머니를 찾아 나선 아버지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버림받았으며,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아서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로 상징되는 사회 체계에도 초대받지 못한다. 의선 자신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올지도 모를 고향에 정신지체자인 오빠만을 남겨 두고 도시로 떠남으로써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고 또 누군가를 버리는 상처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악순환에 빠진다. 그녀에게는 해일처럼 덮쳐오는 실존적인 의문들에 대한 적당한 답변이 가족이나 사회, 그 어느 편에 의해서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실존적인 ‘외투’의 상실과 결핍은 융해된 몸의 이미지를 낳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즉 인영은 "의선의 쇠약한 나신이 햇볕에 뻘뻘 흘러내리는 것을, 살색의 끈끈한 액체가 보도 블록에 고이는 것을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며, 의선이 알몸으로 서있던 그 자리에 “아열대 식물의 수액 같은 연홍색 액체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을 것만 같”(『검은 사슴』, p. 254)다고 여기는 것이다.

의선의 불가해한 행보는 자기보호본능을 넘어선 부조리한 추구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즉 빛에 대한 갈구와 나체 활보, 외상적 기억에 대한 한 반응으로서의 귀향과 유랑은 실존적인 문제들을 괄호치는 ‘가면’이나 ‘외투’를 뚫고 나오는 생의 근원적인 힘을 암시한다. 이 부조리한 힘은 원초적이며 원형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의선은 어둠 속에서 검푸른 허공을 향해 “아무도 감히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묵묵한 걸음걸이”(p. 437)로 나아가는 ‘상처 입은 초식동물’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이 소설에 소개된 전설 속의 ‘검은 사슴’과 동일시된다. 지하의 암반 사이에 살면서 지질시대 식물의 변형물인 광석을 씹어 먹는 ‘검은 사슴’은 초식 동물의 원형이다. 이 동물은 하늘을 보기 위해서라면 목숨과도 같은 번쩍이는 뿔이나 이빨을 기꺼이 내놓는데 그로 인해 결국은 눈물과 피를 흘리며 죽거나, 간혹 하늘을 보는데 성공하더라도 햇빛을 받자마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결국 ‘검은 사슴’은 지하에 편재하며 자아를 해체시키는 힘으로서 보전이 아니라 소멸을, 안전이 아니라 수난을 택하는 부조리한 생의 원형적인 상징이며, 의선은 그 세속적인 현실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층 더 깊은 침잠, 한층 더 많은 죽음에 의해 심연의 인물들은 식물-되기를 추구한다. 그들은 수액(樹液)의 심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연작에서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푸른빛의 몽고반점은 그녀가 수액에 젖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무 불꽃」에서 그녀는 식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물이 되어 땅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란다. 이처럼 한강의 작품 어디에서나 심연의 물은 죽음을 흡수하는 원소인 동시에 새로운 생의 원형질이 되고 있다. 영혜가 깊은 심연 속에서 식물-되기라는 부조리한 추구를 감행한다면, 동생과 남편의 자멸적인 행위들을 곁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인혜는 거기에 구현된 서늘하고 무자비한 물의 의지, 즉 생명의 원리를 직관하고 전율한다. 그녀에 의해 나무와 숲은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로 현상된다. 한강 소설에서 나무는, 그리하여 심연의 존재들은 매순간 죽음으로써 밝게 빛나는 불꽃과 같은 운명을 지닌 것이다.

심연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계통발생적인 역행을 통해서 한강은 모든 생명들이 물로 만들어진 불꽃이라는 직관에 도달한다. 그녀는 이러한 직관을 밀어붙여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사회》에 연재 중)에서는 우주와 물질의 생성 과정을 물이 핏줄처럼 흘러가고, 식물처럼 자라서 제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는 한 폭의 이미지에 담아내고 있다.

물이 그린 거지. 난 잘 흘러가게 터주고 막아주고 한 것밖에 없어. 식물 키우는 거랑 비슷한 거야.

갓 태어난 별의 불꽃이 하얗게 타오르는 그의 그림을 향해 나는 다가갔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에는 모세혈관들 같은 무수한 섬유질의 길들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길들을 따라 퍼져가는 먹의 모양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잡아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것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바람이 분다, 가라(연재2회)」, 《문학과 사회》80, 문학과지성사, 2007년 겨울, p. 189)

먹과 한지와 물을 이용한 이 그림은 죽음이면서 시작인, 폭발하는 별과 형태상 닮아 있다. 한강은 가장 오래된 죽음이자 시작인 이 우주적인 탄생의 순간을 바로 심연의 식물적인 성장이라는 이미지로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5. 투명성, ‘나’ 없는 아름다움

한강의 소설은 존재론적인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보호고치의 작용과 양상을 예리하게 파헤쳐 보여주는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의 부조리한 추구를 원형적인 이미지와 상징적인 기호들을 사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그녀 소설의 결말은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지는 마술적이고, 섬광과도 같은 순간들을 시적으로 부조해놓은 경우가 많다. 결국 그 이미지들은 한강 소설의 기저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작가적인 관심사, 즉 ‘무엇이 인간의 생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움에 눈 뜰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문학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상승하는 물과 수액(樹液), 투명한 ‘빛방울’, 새와 모래 등이 이 답변과 직결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자아의 죽음과 신생(新生)이라는 차원에서는 무엇보다도 상승하는 물의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슐라르의 말대로 모든 살아 있는 물은 죽어가는 물이지만(Gaston Bachelard, 이가림 역, 『물과 꿈』, 문예출판사, 1998, p. 72) 수액과 같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물은 가볍고, 밝고, 맑은 물, 중력을 거슬러 역류하는 물이다. 맑고 투명한 생명의 물인 수액은 깊고 어두운 땅속에서부터 길어 올려지는 대지의 즙이다. “캄캄한 흙 속을 비집고 내려간 흰 뿌리”는 “어둠과 빛의 한 몸뚱이를 잎사귀까지 길어올”(『여수의 사랑』, 작가후기)리는 것이다. 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은 한강의 인물들에게 역설적으로 가장 밝은 빛, 즉 “열두 덩이의 태양이 폭 넓은 강의 물살을 에워싸며 떠오르는 꿈을”(「흰 꽃」) 선사한다. 「어느 날 그는」의 결말에서 태식은 굵은 전선에 “매달려 있던 검고 섬세한 빗방울들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흘러내리다가 이내 떨어지곤” 하는 모습을 보고 ‘자동인형’과 같았던 과거의 ‘나’가 죽었으며 새로운 생의 순간을 맞게 되었음을 느낀다. 이 성스러운 환희의 순간을 한강은 차오르는 수액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크고 작은 그의 혈관들이 소리내어 흐르기 시작했다. 맑은 수액 같은 빗물이 수없는 실핏줄들을 타고 일제히 차올라왔다.”(「어느 날 그는」, 『내 여자의 열매』, p. 64)

이 수액의 상상력은 생의 비약과 새로운 약동을 촉발하는 고요하지만 강력한 맑은 물을 작품 속으로 끊임없이 유입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아기 부처」의 아내는 “갈참나무들은 아직 헐벗은 나뭇가지들을 허공으로 뻗어 올린 채 침묵에 잠겼지만, 저 검은 나무껍질 속에도 봄 대지의 즙이 흘러올라와 있을 것”(「이기 부처」, 『내 여자의 열매』, p. 125)임을 알게 되며, 「흰 꽃」의 ‘나’는 “햇빛이 내 머릿속과 내장, 무수한 혈관들과 딱딱한 뼈의 속까지 그득그득 채워,” 자신이 “마치 한덩이의 뭉쳐진 빛이 되어”(「흰 꽃」, 『내 여자의 열매』, p. 266) 있는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수액과 맑은 물의 이미지가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 작품이 바로 「노랑무늬영원」이다. 이 작품은 35개의 작은 장들이 중첩되어, 2년 전 교통사고로 한 손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화가 현영의 절망과 그녀에게 조용히 흘러드는 생의 의지를 그려내고 있다. 절망의 심연, 사랑이 메마른 사막과 같은 삶 속으로 소리 없이 흘러드는 빛과 물. 노란 빛점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노화가 Q의 그림, 최인성과의 추억과 그의 죽음에 대한 연민, 친구 소진과 그 아이들의 환대, 도마뱀 '노랑무늬영원'의 새로 돋아난 투명한 앞발, 사진관 주인과 소진의 정성어린 수공작업, 무엇보다도 수시로 찾아드는 잔멸치떼의 환영. 이러한 투명함, 밝음, 고요함, 재생과 관련된 이미지와 일화들이 투명하게 중첩됨으로써, 즉 각각의 일화가 자신을 통해 다른 일화를 볼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여러 층의 삽화들이 하나의 깊이 있는 의미의 우물을 형성하고 있다.

세면대의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담그고 있는 현영의 상상이 이 어둠 속으로 흘러드는 맑은 물과 밝은 빛 이미지의 심리학을 정확하게 밝혀준다. 현영은 “붉은 혈관을 눈앞에 그린다. 빛 속에 손을 담그고 있다고 상상한다. 불길 같은 빛이 콸콸 흘러들어와 혈관을 채우는 것을, 무수한 붉은 피톨들이 끓어오르는 것을, 그 힘으로 손의 손상된 관절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그린다. 간절히 집중한다.”(「노랑무늬영원」, 《문학동네》34, 2003년 봄, pp. 189-190) 한강이 전선에 맺힌 빗방울의 그림자, 싱그러운 연푸른 잎들에 차있는 맑은 수액, 투명한 빛 덩어리 같은 몸을 물살에 부딪치며 나아가는 싱싱한 잔멸치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 생명의 ‘빛방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죽음은 융해나 액화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상이 ‘새떼’나 ‘모래’로 변하는 환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는 물살이 새떼로 변하더니 자신의 몸 안에서도 새떼들을 뛰쳐나가는 환상이 나타난다. 「아기 부처」의 선희는 흉악한 모습으로 일그러진 부처상을 만나는 꿈을 꾼 다음에 자신의 모습이 부슬부슬 모래알로 허물어지는 꿈을 꾼다. ‘새떼’나 ‘모래’는 단단하게 굳어 있던 보호고치의 붕괴와 그에 따른 자아의 죽음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자아의 죽음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움의 발견이라는 길을 열어준다. 한강의 소설에서 물과 투명성은 삶의 과정에서 자아를 끊임없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두려움 없이 보호고치를 허무는 것과 같다. 두려움은 흔히 자아를 죽음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람은 살기 위해 매순간 죽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녹음해 놓은 것처럼 그저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애착이 미적 대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죽음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리하여 무심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J. Krishnamurti, 정순희 역,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요아침, 2005. pp.182-202) 한강이 끊임없이 자아의 죽음과 재생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물 이미지를 통해 삶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죽음을 포착하려 애써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의 시선으로, 즉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빛과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평론 당선소감 - 이학영
"마지막 획 그을 때까지 바람을 피하지 않겠다”


화필을 쥐고 캔버스 앞에 홀로 서 있는 비쩍 마른 여인, 릴리 브리스코우. 그녀가 한순간 명확하게 보았던 형체들은 붓을 들어 첫 획을 그으려는 순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화폭에는 아무렇게나 긁적거려놓은 듯한 자국만이 남는다. 그럴 때마다 모든 의구심의 질타가 바람처럼 귓전을 때린다. ‘여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창조할 수 없어.’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녀에게 오래전, 접힌 채 전달된 서신, 풀지 못한 매듭이 된다. 10년 뒤 릴리는 다시 이젤 앞에 서면서 필사적으로 되뇐다. ‘그것을 잡아서 다시 시작하라.’

정확하게 언제부터 『등대로』의 릴리에게서 평론가의 초상을 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소설이 그 누구도 완전히 펼쳐보일 수 없는 편지라면 내가 펼쳐 읽은 부분을, 그리고 그것이 남긴 생생한 파문을 하나의 캔버스에 고정시켜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겹겹의 메시지와 이미지들은 본래의 생동감을 잃고 보잘것없는 흔적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완성하지 못할 일이라면 이쯤에서 포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무렵에 뜻밖에도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우선 미숙한 글에서 어떤 시도를 읽어주시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오랫동안 노트북 바탕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한강’ 폴더에 ‘당선 소감’을 저장하는 감격을 누렸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매듭들을 위해서 다시 그것을 열어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첫 획을 그을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주신 분들이 너무도 많다. 오랜 시간 자식의 ‘고집’을 참고 지켜봐주신 부모님께는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상이 가족들에게 작은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릎이 꺾이려 할 때 ‘극기(克己)’할 수 있는 힘과 가르침을 주신 조남현 선생님과 서울대 국문학과 여러 교수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좁고 험한 길에서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도반이 되어 준 동학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내 글에서 장점을 찾으려 애쓰고 응원해준 아내이자 문우(文友)인 지혜에게도 애정을 담은 감사를 보낸다.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마지막 획을 그을 때까지 바람 앞에 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1976년 인천 출생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평론 심사평
교양 감각·정독 돋보여 … 신인다운 패기는 아쉬워


본심에 올라온 평론은 한결같이 2000년대 이후의 새로운 문학, 그것도 한 작가나 시인을 대상으로 한 작가론·시인론이나 작품론이 대세를 이뤘다. 신인다운 패기로 새로운 문학적 담론의 지평을 연 글에 대한 기대는 아쉽게도 유보해야 했다. 두 작가의 세계를 통합적으로 다룬 두 편의 글(강용훈·성가인)은 작품 해석 감각과 시도는 좋았으나 유기적 구성이 취약하고 글의 완성도가 떨어져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강영준씨의 ‘김이듬론’은 『오딧세이아』에서 세이렌의 경계적 존재론의 감각을 빌려 시인으로서 김이듬의 존재론을 해명하고자 했다. 발상이나 문장 감각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해석에 무리가 따르고, 시 인용 방식이 서툴렀다. 소수의 시편들만을 대상으로 글을 엮어 김이듬의 세계가 다소 재단된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황유정씨의 평문은 김훈의 소설을 대상으로 미시적 분석을 정치하게 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분석에 치우쳐 자신의 비평적 논리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데 취약함을 보였다. 이학영씨의 ‘물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한강론’은 한강 소설의 심층을 물의 수사학으로 포착하여 그 문학 세계의 핵심을 드러내려 한 평문이다. 나름의 교양 감각과 정독의 열의가 돋보였고, 억지 주장과는 거리를 두면서 비평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해석의 맥락을 위해 동원한 논거들 사이의 유기성이 다소 떨어지고, 최근의 심화된 이론들에 대한 이해를 함께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작가가 동시대의 현실과 대결하면서 형상화한 문제의식을 해석할 적절한 문제틀을 구성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것이지만, 비평가가 도전해야 할 핵심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안정감과 잠재력을 보인 이학영씨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우찬제·류보선 ◆예심위원=권혁웅·김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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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장의 내력(중앙신인문학상080918)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9 00:59
시 당선소감“꿈에 그리던 별 따다가 내 방에 걸어”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ilgoo@joongang.co.kr

그림자는 아무도 기대지 않은 벽에서 몰려와 잡풀 무성한 골목 안에 슬며시 몸을 풀어 놓고 갔다. 그런 날 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친구의 고층 아파트를 찾아가곤 했다. 나를 달로 화성으로 북극성으로 날라다 줄 것 같던 사각의 방. 한 번도 눌러 보지 못한 비밀의 버튼은 꽤나 높은 곳에 매달려 반짝였다. 별을 딸 수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올라탈 수 있던 공중의 꿈들.

그런 반짝이는 꿈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당선 통보로 즐거운 나의 일상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별 하나 따다가 내 방에 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낙선을 반복할 때마다 시 쓰기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유언에 있었다. 어머니와 마지막 순간 꼭 좋은 시인이 되겠다고 약속한 지 7년 만에 당신과의 약속을 절반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쁠 따름이다. 하늘에서 얼마나 흐뭇해하고 계실지, 그 미소가 오늘 밤 계속 아른거린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아직 너무도 부족한 나에게 시 쓰는 것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끝까지 살아남는 시인이 되리라는 약속과 함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이토록 반짝이는 언어의 빛들을 처음 알려주신 양승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게으른 나를 항상 뜨겁게 채찍질하시며 시에게 목숨 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박주택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열심히 쓰라고 언제나 따뜻하게 격려해 주신 김재홍, 김종회 선생님과 이문재 선생님, 그리고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최상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끝까지 함께 시 쓰기를 약속한 재범·은기·규진·진명·은지·현진을 비롯한 여러 경희문예창작단 선후배 여러분과 문학도로서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 준 현대문학연구회의 선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하늘새재 선후배들을 비롯해 따뜻이 관심 가져준 국문과 선후배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밖에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너무도 많지만, 지면이 작은 것을 핑계 삼아 차후에 일일이 감사함을 전하겠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임채순님을 비롯한 온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

시 심사평
“사물을 보는 시선 삶 전체로 향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을 하게 되어 있다. 낙선한 한 사람으로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최소한 유심히 읽을 만한 사람은 그 낙선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심사소감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실은 심사소감처럼 상투적이고 설득력 없는 글도 없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이 바뀌어도, 심지어는 응모된 작품들의 경향이 그렇게나 변해도 예나 지금이나 초지일관 심사소감은 새롭지 않다거나 아니면 유행을 탄다거나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시를 쓰라는 말씀인가! 대안의 예를 제시해 주시든지….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심사위원 당사자들의 시나 글을 새삼 떠올리면서, 지적사항에 가장 많이 해당하는 자가 바로 당신이지 않은가! 그 원성이 들려온다(맞다! 모두가 선후에 서서 고투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심사평을 계속해서 늘어놓자면, 그럼 왜 그럴까. 새롭다고 느껴졌던 시가 바로 낡아지는 것을 볼 때가 흔하다. 유행을 타는 시다.
평론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시인이 고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 소치이다. 젊은 문학도의 조급증은 눈앞의 물결을 수평선으로 착각하는 셈이다.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온 낡디낡은 주문이 있다. 과연 스스로에게 시는 진실(眞實)과 진심(眞心)의 뗏목인가에 대한 되물음이다. ‘우선’ 그것이 아니어서야, 그것이 느껴지지 않아서야 이 하찮은 ‘언어 상태’는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 되물음이 깊고 익어서 ‘방법’을 낳고 ‘파괴’를 낳고 다시 익을 때 ‘개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엄밀히 신인에게 개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진실한 발성인가가 그 가능성의 초점일 수밖에 없다.

잘 쓴 분들로 삼십여 분이 넘어왔다. 그중 어렵지 않게 세 사람으로 압축이 되었는데 임경섭·조율·이우성 제씨가 그들이다. 모두 삶을 감싸 안으려는 생각의 두께가 다른 응모작들보다 치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율 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에 있는 풍경들을 촘촘히 살피고 선명하게 내면화하는 매혹이 있었다. ‘골목의 무릎’이며 ‘빨래방’ ‘세탁기’ 등의 제목이 말해주듯 거창하지 않은 세목들이 거뜬히 시가 되었는데 일정한 패턴화가 단점이었다. 이에 비해 이우성 씨의 시들은 훨씬 언어미학적으로 경쾌한 맛이 있었다. ‘어쩜 풍경이 멈춰 있다고 생각했을까’ ‘평생 먹을 수 있는 잎사귀가 정해져 있다면’ 같은 시는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이미지의 돌출이 걸리긴 해도 삶의 풍경을 파악하는 감각이 새롭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전체 응모작이 한 작품을 잘라 나열한 것이라 해도 될 만큼 각 작품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았고 뒤쪽에 배열한 소품들은 서툴렀다. 가령 ‘오후의 냄새를 떠올리는 내일의 분주함’같은 구절은 치명적이다.

임경섭 씨가 당선자가 되었다. 잘 썼다. 응모한 여섯 편의 시가 모두 고르다는 데 우선 점수가 주어졌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점을 잃지 않고 삶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말이 세련되지 않은 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진지하고 끈덕진 면으로 보면 장점이고 필요 이상 시가 길어져서 여운을 빼앗는 점에서 단점이다. ‘잘 썼다’는 것은 오래 습작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뜻인데 그것이 자신을 묶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 주길 바란다. 이, 외진 오솔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한다.

위 언급한 외에 유병록·김상혁·남민영·이해강 씨의 시들이 아까웠으며 더불어 결심에 오른 모든 작품은 심사위원이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좋은 시들임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심사위원=나희덕·장석남 ◆예심위원=강정·김선우·권혁웅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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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중앙 신인문학상080918)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56

그림=황주리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김성중

[1]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말하기 좋아하고, 말을 많이 하는 족속은 의자다. 그들은 L자의 입을 가진 굉장한 수다쟁이들이다.

당신은 내가 공상을 좋아한 나머지 모든 사물이 말을 걸어온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냐고 빈정거릴 수 있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침대는 굉장히 과묵하다. 침대는 피곤한 육신을 받아 주고 근사한 꿈을 선사해주지만 온통 애무만 할 뿐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건 책상도 마찬가지다. 널따란 등짝을 척하니 내밀지만 당신이 책상에서 종이를 채우든 오리든 별 관심이 없다. 글쎄, 어떤 사람은 가로등의 말을 듣고 또 어떤 사람은 한강 다리와 떠들 수 있는지도 모르지. 여하튼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말이 많은 사물은 오로지 의자, 의자뿐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솔한 대화가 소원이라며 ‘발을 제외한 온몸이 입뿐이니 그럴 만하지 않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등과 엉덩이를 밀어 넣는 그 오목한 구석을 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당황스럽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모든 의자들은 스스로를 실용적인 측면에서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개성적인 고독을 지닌 견자(見者), 즉 바라보는 자들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세상에 대해서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떠들고 싶어했다.

내가 만난 최초의 말하는 의자는 팔걸이가 높고 등받이가 깊숙한, 베이지색 격자무늬의 일인용 소파였다. 몸에 꼭 맞아서 앉으면 의자에게 푹 싸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구립도서관 한 귀퉁이에 놓인 그 의자는 비어 있을 때가 많았다. 시청각자료실에서 내 눈길을 끈 건 오디오 사용자를 위한 네 개의 탁자였다. 탁자도 큼직하고 유리 칸막이가 쳐진 데다 팔걸이가 높은 일인용 소파에 쿠션까지 놓인, 공공시설에선 보기 드물게 안락한 좌석이다. 게다가 이 도서관은 한강변에 있기 때문에 창밖으로는 강의 전경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오디오 한 대가 모자라는 바람에 ‘무선 인터넷 노트북 사용자를 위한 좌석’이라는 텅 빈 책상이 있었는데 나는 즉각 이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이 켜지는 소리를 들으며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말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자유롭게, 어떤 말이든 지껄여볼까요? 그건 제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제나 소재를 정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앉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전 끝없이 떠들어댈 운명을 지녔으니까요. 아마도 전생에 벙어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생에 못한 말들이 있다면 이생에 다 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다음 번엔 온전한 언어를 갖게 되겠지요. 온전한 형체도요…… 저는 지금 의자거든요. 정말이지 하품 나는 형체예요.

창밖엔 가로등의 열주 사이로 차들이 지나가는 다리가 보이는군요. 그 아래에는 한강이 흐르고요. 어떻습니까, 썩 나쁜 풍경은 아니지요? 그러면 이 멋진 전경 아래 우리의 첫 대화를 시작해봅시다.

현재 당신은 글을 쓰고 싶어하는데, 그다지 열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가장 정직한 욕망인지 확신하지 못하는군요. 당신은 중산층의 삶에 공포를 느끼지만, 한편으로 중산층의 삶에서 완전히 멀어질까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소질이 없다며 넌덜머리를 내고 있는 게 가장 정확한 상태일 겁니다. 이것에 대한 처방은 딱 한 가지입니다. 행동하고 또 행동할 것! 아무리 짧더라도, 혹은 완전히 무위의 시간을 보내더라도 저에게 와주십시오.

계절은 겨울이고 날씨는 아직 춥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겠지요. 조금 부지런하다면 매일 저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게다가 이 공기! 도서관 특유의 조심스럽고 진지한 침묵을 떠올려보세요. 2층엔 책들이 그득하고, 사람들의 입술에 침묵이 걸려 있습니다. 사색의 추를 드리우기에 딱 적당한 농도로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전 언제나 예술가의 후원자가 되는 삶을 동경해왔습니다. 작가와 화가들로 가득 찬 살롱에 홍차를 나르고 조용히 미소 짓는 16세기 귀부인처럼 말이죠. 이제 막 현관에 들어선 예술가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보고 매달 수표책에 서명을 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하지만 전 구립도서관의 의자로 태어났고, 수표책도 금화도 없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동안 품어줄 몸뚱이뿐이지요.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무언가 쓸 작정이라면 기꺼이 그 글의 대부가 되어 드릴까 합니다.”

이건 뭐랄까,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는 이웃집 남자가 둘만 탄 엘리베이터에서 돌연 악수를 청하는 느낌이다. 의자는 터진 둑처럼 줄줄 말을 내뱉었고 심지어 내 카운슬러를 자청하며 과장된 말투로 떠들었다. 이 굉장한 달변가는 말을 마치고 수줍게 툭 물러나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다음날 그를 만나러 도서관에 갔을 때 활발하게 말을 걸더니 그 후로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앉아 있기만 하면 되겠어. 의자가 떠드는 말만 받아 적어도…….’

궁둥이 밑의 수다를 듣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때 내가 원한 건 그저 타격감, 일정한 속도로 자판을 두드릴 때의 고른 리듬뿐이니까.

그날부터 글이 써지지 않는 건 오로지 도서관 의자에 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디어는 모두 의자에서 나왔고 나는 그저 받아 적는 타자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글을 써보려 했지만 깎아놓은 손톱처럼 쓸모없는 서설만 수북이 쌓일 뿐이었다. 그러니 다시 도서관에 오는 수밖에. 그러면 의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열정적인 이야기꾼으로 변하는 것이다.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조각가 브랑쿠시의 말이던가요? 명심하세요. 한 가지 삶을 얻으려면 백 가지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겁니다.”

그림=황주리
내 도서관 의자는 이렇게 유식한 말도 잘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있는 동안 예술가는 그였고 나는 어디까지나 조수에 불과했다.

추위를 싫어하는 나지만 이번만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의자와 수다를 떠는 동안 기묘한 겨울이 찾아왔다. 개나리와 목련이 피어나는 겨울, 바람이 옷소매를 부드럽게 부풀리는 겨울, 봄빛이 짙어도 내 마음속 겨울은 깎여나가지 않았다. 이 계절에 나는 한 명의 본처와 여러 명의 애인을 거느린 호색한마냥 많은 의자와 사귀게 되었다.

이를테면 지하철 승강장에 나란히 박힌 일곱 개의 의자들은 그중 한 개에만 앉아도 동시에 짹짹거리는 것이다.

“아직 겨울외투네?”

“그런다고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잠깐, 가지 말아요. 여기 오는 사람은 모두 금방 가버린다고요!”

전철 안에 앉으면 이번엔 긴 의자가 한숨을 쉬며 말을 걸었다.

“저 빌어먹을 무료 신문 좀 치워줘…… 그런데 자넨 척추가 꽤 휘었군그래.”

이런 식으로 만나는 의자마다 지껄여대니 성가신 적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자들이 무례하다는 뜻은 아니다. 대화는 항상 ‘사귀고’ 나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나를 눈여겨 본 의자들이 눈치를 보다가 말을 좀 들어주겠다 싶으면 그때부터 입을 연다는 뜻이다.

새로운 친구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친한 건 도서관 의자다. 가끔 다른 의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도서관 의자는 숨죽이며 들었다.

“붙박이 의자로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그래도 지하철 의자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겠네요. 그건 부러운데요.”

“다른 의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

“로마 시대 집정관이 앉는 의자나 우아한 곡선을 가진 귀부인의 휴식용 의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죠.”

우리의 대화는 가보지 않은 삶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나와 동명이인인 여자를 본 적이 있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까?”

“테라스에 놓인 등나무 의자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다 집어치우고 집에 내려가서 살걸 그랬나봐.”

“극장 의자면 영화는 실컷 봤겠지요?”

서로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도서관 의자는 평범한 식탁 의자라거나 사무실 의자가 아닌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이 의자는 어깨너머 읽은 책들에 중독되어 있었고 일상적인 세계는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무의식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우리가 가지 못한 길들을 적어 보았다. 아무 의미 없는 글이었지만 하얀 모니터 위에 까만 개미 같은 글씨들이 톡톡 지나가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또 이런 상상을 했다. 이 순간은 백지 위에서 의자와 내가 사이좋게 산책하는 시간들이라고. 나는 이국의 포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옮겨 적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번역가라고.

새로운 친교에 빠져 있는 사이 내 일상은 다리가 썩어 삐걱대는 의자처럼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우선 예정된 가난이 덮쳤다. 번역 아르바이트비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전화를 걸어 ‘결재는 언제…’라고 웅얼거리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분노가 치솟았다.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데 왜 이렇게 비굴하게 느껴질까? 문제는 통화의 주제가 ‘돈’이라는 데 있고 돈을 재촉하는 소리는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도 품위 없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서관 대신 술집으로 직행한 어느 날, 나는 내 푸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 궁둥이 밑 파란 플라스틱 의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들이 똥을 싸기 전과 싸고 난 후가 다르다 이 말이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의자와 통성명을 하고 난 후였다. 어라? 나는 취기를 털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새로운 술동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과 낡아서 닳아빠진 다리가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처럼 관록이 붙어 보였다.

“그만 좀 쳐다보라고. 등받이가 없는 것도 서러운데 다리까지 부러져서 아주 고단한 인생이니까.”

의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내 시선을 뿌리치며 톡 쏘아붙였다. 마치 술주정까지는 들어주겠지만 개인 사생활은 묻지 말라는 바텐더처럼.

나는 즉각 술집 의자의 까칠한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도서관 의자는 지나치게 지성을 강조했고 울분을 나누기에는 적당한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도서관 의자라니, 더럽고 낡아빠진 술집 의자야말로 내 궁둥이에 어울리지 않을까? 기왕 의자의 말을 받아 적는 거라면 술집 의자의 얘기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나는 몽롱한 취기 속에서 넌지시 내 생각을 말해보았다.

“헛소리 말고 꺼져.”

술집 의자는 단칼에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의자들에게 환대만 받던 나로서 이건 좀 당황스러운 반응이다.

“소주 주소!”

그때 포장마차의 주홍색 비닐차일 사이로 벙거지 모자를 쓴 부랑자 하나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마치 자기 차례가 되어 연극무대에 나선 배우처럼.

모든 것이 검거나 누런 인간이다. 누런 옷으로 감싸지 않은 살은 시커멓게 때가 끼었고,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누런 이빨은 반쯤 까맣게 썩어 있다. 그 뒤로 크고 툽상스럽게 생긴 도사견 세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따라 들어와 나를 비롯한 모든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벙거지는 출입문 근처에 앉아있는 내게 곧장 다가오더니 손짓으로 비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느닷없이 자리를 옮기라니,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개들이 탁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닥에 침을 뚝뚝 떨어뜨렸다. 기세에 눌린 나는 먹던 소주와 잔을 들고 옆으로 옮겼다.

벙거지는 단골 레스토랑에 들어온 사업가처럼 당당하게 내가 내준 의자에 턱 앉더니 큰 소리로 주문했다.

“내 새끼들 먹이게 우동도 세 그릇 갖고 오고!”

다들 벙거지와 개를 힐끔거렸다. 포장마차 주인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벙거지에게 다가가 술 한 병을 내밀었다.

“나가서 먹어. 술값은 안 받을 테니.”

“뭐야, 거지처럼 밖에서 먹으라는 거야? 나 돈 있어!”

“알아. 아는데 장사하는 데서 이러면 어떡해.”

“오사리 잡년 같은 게 확 찢어 죽일까보다. 어디서 사람을 차별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에잇 쌍!”

그는 인상을 우그러뜨리더니 점점 더 더럽고 추잡한 욕을 쏟았다. 보다 못한 직장인 하나가 벙거지에게 외쳤다.

“거 곱게 처먹을 것이지 왜 행패요? 말씀을 너무 심하게 하시네.”

그 말을 들은 벙거지는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마치 상대해줘서 고맙다는 듯 화색이 도는 얼굴이다. 오냐 좋다, 본격적인 드잡이판을 벌려보자. 이런 콧노래가 나올 것 같다.

“너, 이 년하고 무슨 사이야, 니가 전 남편이라도 돼?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안 그래도 우리 아그들이 고기 맛 본 지 좀 됐거든?”

순식간에 실내는 난장판이 됐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고, 꽤나 용감하게 나서던 직장인도 ‘드러워서 피한다’는 둥 변명을 눙치더니 나가버렸다.

놀라운 건 포장마차 여주인의 침착한 태도였다. 주인여자는 온갖 더러운 욕이 퍼부어질 때도 침착하더니 벙거지가 집기를 내던지는 순간에도 고요히 파를 썰고 있었다. 그리더니 행주로 손을 쓱 닦고 휴대폰 버튼을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좀 와 줘야겠는디……. 김씨가 또 행패네요.”

구석에 쭈그리고 잔을 비우던 나는 과연 누가 올지 몹시 궁금해졌다.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제 가게를 부수고 있는데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지 않나?

막상 출동한 해결사는 육십이 넘어 보이는 작달막한 할머니였다. 눈빛이 맵고 안차고 다라진 인상이다. 그렇다한들 다 늙은 할머니가 불한당을 어떻게 대적하겠는가 말이다.

할멈은 들어서자 송아지만 한 개 세 마리가 재빨리 달려들었다. 변이라도 당할까 싶었는데 웬걸, 꼬리를 들까불고 재롱을 떠는 개들의 품새가 스스럼이 없다. 벙거지도 슬그머니 들었던 의자를 내려놓았다. 입으론 여전히 욕설을 씨우적거렸지만 삶아놓은 고기마냥 분노의 핏기가 빠지고 흐물흐물해진 모양새다. 할멈은 그제야 빙긋 웃으며 두 팔로 벙거지를 감싸 안더니 소리 나게 등을 두들겨댔다.

“오랜만이여. 근데 뭣에 이리 성이 나셨을꼬. 피차 먹고 살기 힘든 팔자들인데 어려운 사람끼리 도와야지 여기서 뭐하는겨.”

“저 년이 나가서 먹으라잖아요! 다른 사람한테는 잘만 파는데.”

“그거야 자네 개들이 워낙 무섭게 생겨서 그렇지. 그래도 어쩌겠어. 자네가 개를 팔 것도 아니고, 아줌마는 장사를 해야 하고…….”

할멈은 조곤조곤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벙거지를 달래기 시작했다. 벙거지가 고함을 치려 하면 할멈은 가죽 같은 손으로 등을 쓸어내린다든지 반쯤 포옹을 한다든지 해서 완곡하게 막아섰다.

“자자, 나가서 한잔 하세.”

대체 무슨 조화속인지 몰라도 할멈은 마침내 벙거지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데 성공했다. 실내에는 다시 주인 여자의 파 써는 소리만 고요히 재생되고 있었다.

“한판 시끄러울 줄 알았지.”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뒤스럭거리며 운을 뗐다. 속사정이 궁금할 때는 그 집 의자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다.

“대체 누구야? 저놈이 왜 고분고분한 거지?”

“굉장히 멋진 분이지?”

자부심으로 뿌듯해진 표정으로 의자는 약간 뜸을 들였다.

“공장에서 막 태어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분이야. 이곳에서 장사를 오래하셨고 돈도 꽤 만지셨어. 나중엔 사람을 두고 포장마차를 다섯 개나 하셨지. 여주인이 워낙 통 크고 인심이 좋아서 이 근방의 부랑아치고 국밥 한번 안 얻어먹은 놈이 없거든.”

의자는 여왕을 모신 기사처럼 으스댔다. 팔이 있으면 술잔도 털어 넣을 기세다. 어쩐지 술을 마신 건 난데 알근해지는 건 그의 파란 얼굴이다.

“가끔 말썽꾼이 나타나면 저렇게 중재를 해주셔. 다들 왕년에 얻어먹은 국밥이 목에 걸려 행패를 길게 안 부리거든.”

“오호라, 근데 어떻게 그렇게 사정을 잘 아니?”

“처음 가게에 온 의자 중에 살아남은 건 오직 나뿐이거든. 보시다시피 우리가 수명을 길게 타고 난 의자는 아니잖아……. 저 사람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 내 다리가 시원찮다고 청테이프를 붙여준 것도 저 사람이야.”

포장마차 의자는 열심히 벙거지 편을 들었다. 내 느낌엔 의자는 할멈을 존경하고 벙거지를 사랑하는 듯했다.

비틀거리며 포장마차를 나왔을 때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짝을 떼다 뭐에 걸려 고꾸라질 뻔했다. 발밑을 살펴보니 이런, 아까 그 벙거지가 아닌가.

그림=황주리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기 않은 3월의 밤, 개들과 벙거지는 포장마차에서 멀지 않은 길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개들은 큰 몸을 옹송그리며 주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벙거지 역시 자기 옷을 끌어당겨 한사코 개들을 덮어주려고 애쓴 자세다. 아까 행패를 부리던 놈이 맞나 싶게 순하고 불쌍한 모습이었다.

“그 놈이 목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은 나한테 앉아 있을 때뿐이거든.”

문득 포장마차 의자의 말이 떠올랐다. 한때 할멈이 퍼주는 음식으로 목숨을 연명한 그는 돈만 생기면 이곳에 와서 우동을 사먹었다. 개들 때문에 안쪽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출입구 쪽 의자에 앉아서 한 그릇씩 비워내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 온 주인은 아예 그를 들이려 하지 않았다.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에 벙거지는 모욕을 느꼈고 올 때마다 실랑이를 벌였다.

어쨌거나 자신을 기필코 사수하려는 사람을 만난 포장마차 의자로서는 그가 천하의 불상놈이라도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과 벙거지는 나와 도서관 의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끈끈한 사이라는 거다.

“세상에 의자와 사귀는 사람이 너 하나뿐인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해 그런 사람은 나 혼자뿐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의자에 자기의 이야기를 묻히고 다닌다는 것을 모르듯이, 의자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나 외에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모르는 것이 많아 울고 싶은 밤이었다.

나는 가벼운 궁둥이를 팔락거리며 그 거리에서 퇴장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명의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도서관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세상엔 완전히 미친놈도 있고 덜 미친놈도 있는데 그중 몇 할은 반드시 구립도서관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도서관에서 뭘 ‘이용’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반쯤은 온전한(완전히 돌았다면 제 발로 여길 오겠는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이들은 자기 몫의 한 자리를 차지한 후 조심스레 광기의 똬리를 풀기 시작한다.

매일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내 존재는 자판기나 책상, 혹은 서가에 꽂힌 책처럼 도서관의 정물 중 하나가 됐다. 그럼에도 가끔 일찍 온 사람에게 내 의자를 뺏기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공공시설이니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이 밉고 싫었다.

그날 내 의자를 차지한 사람은 대머리였다. 대머리는 엄청나게 큰 구형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방석과 보온 병, 한 뼘 크기의 약병까지 들고 왔다. 나는 마누라 뺏긴 남편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그가 가버리기만 기다렸다.

약병은 임산부들이 먹는 철분제처럼 보였다. 사실 그게 약병인 줄도 몰랐다. 대머리가 5분마다 대여섯 개의 알약을 꺼내 씹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와그작와그작.

조용한 실내에 그 소리는 꽤 요란한 파동을 남겼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차츰 소리의 진원지로 모여들었지만 대머리는 느긋했다.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나는 대머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경고를 해야 할 텐데, 수개월째 의자하고만 대화하고 어떤 인간과도 말을 섞은 적 없는 내가 나설 일은 아닌 듯했다.

와그작와그작.

다시 알약 깨무는 소리가 들리자 『경영정보시스템』이라고 쓰인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안경 쓴 남자가 들으라는 듯이 욕설을 뱉었다. 그 사람이 뭔가 행동을 하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그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은 채 몸을 돌려버렸다. 나는 소심하고, 다른 사람은 비겁하고, 그 결과 저 끔찍한 소음을 견뎌야 하는 사실에 아찔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와그작와그작.

삼십 분쯤 지나자 대머리의 소음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열람실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아무도 대머리에게 경고를 주지 않는다. 아무도! 난 머릿속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온 것처럼 거슬려 죽겠는데 다들 괜찮은 걸까? 나처럼 인질로 잡힌 의자가 없기 때문인가?

결국 한참을 고민 끝에 아까부터 써둔 쪽지를 들고 대머리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도서관입니다. 먹는 일은 밖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쪽지가 대머리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더 이상 침묵함으로서 대머리가 아닌 나 자신을 질책할 일에선 벗어난 셈이다. 그러니 제발 입 좀 닥쳐준다면 나로서는 사소하지만 무척 큰 성취감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말았다.

대머리가 벌어진 꽃처럼 활짝 웃었던 것이다. 마치 예쁜 여자에게 ‘우리 밖에서 만날까요?’라는 쪽지를 받은 사람처럼. 영문 모를 웃음은 그의 정신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제야 일을 벌인 게 후회가 됐다. 벙글벙글 웃는 대머리와 돌처럼 굳은 나를 도서관에 있는 모두가 안 보는 척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그가 미친놈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대머리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시 알약을 입가로 가져갔다. 와그작와그작.

머릿속의 벌레가 수십 배 불어난 느낌이다.

다음날 그대로 도망쳐버린 어제의 일을 사과했을 때 도서관 의자는 듣는 둥 마는 둥 말허리를 잘랐다.

“어제 그분 말이죠? 실제로 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스프링을 신나게 쿨렁거리는 의자는 일종의 흥분상태였다. 그런데 ‘어제 그분’이라니, 설마 나에게 망신을 준 대머리 말인가?

“우리 세계에선 유명 인사거든요. 십 수년 전 어떤 의자와의 인연을 맺었고 그 후 수많은 의자를 옮겨 다니며 순례를 하는 중이죠. 와, 난 이 모든 게 그저 뜬소문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온갖 의자를 앉아보고 돌아다니는 미친놈이란 말이야? 왜 그런 짓을 하지?”

도서관 의자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잠시 말이 없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이야기를 잘하는 의자를 찾으려고요. 그 사람도 작가랍니다.”

대머리가 사라진 후 이번에는 혼잣말을 하는 여자가 등장했다. 폭우가 심한 장마기간이라 실내엔 그녀와 나, 둘밖에 없었다. 정기간행물실 유리 너머로 두어 개의 머리통이 더 보였지만 어쨌든 이곳엔 그녀와 나뿐이다. 예감이 안 좋았다.

혼잣말은 키보드가 부서져라 두들겨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끄러웠는데 잠깐잠깐 쉴 때마다 불규칙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나이프처럼 날카롭고 돌연한 목소리.

“하하하하, 내일도 나올 거지?”

처음엔 그녀가 휴대폰 통화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혼잣말의 손아귀엔 전화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 다시 노래를 부르듯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카모마일이 좋아. 로즈메리는 싫어.”

나는 몸서리치며 의자에 파고들었다. 또다시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형국이다. 독처럼 차오르는 아찔함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나는 몰라. 오, 미셀, 윤주를 괴롭히지 말아줘.”

정작 괴로운 건 나다. 폭우를 뚫고 도서관에 도착했더니 또다시 광인이 내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올렸지만 이래서는 도서관 의자하고 대화할 수 없다. 망할 사서들은 늘 그렇듯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문득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여자에게 말을 걸더라도 쳐다볼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사실에 용기를 얻은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그녀 앞에 섰다.

“소리 좀 낮춰요. 당신 목소리가 얼마나 큰 줄 알아요?”

그녀는 깜짝 놀라 쳐다보더니 입술을 움직여 이렇게 되받아쳤다.

“소리 좀 낮춰요. 당신 목소리가 얼마나 큰 줄 알아요?”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반복했다. 메아리가 된 님프처럼.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짜증나.”

“아, 짜증나.”

길쭉하고 못난 얼굴. 풀어진 눈자위. 왜 미친 사람은 한 번에 한 명씩만 나타나는 것일까? 무슨 영역 표시라도 되어 있나? 이렇게 내 도서관을 더럽힐 바에야 한꺼번에 나타나 굿판을 벌이고 사라지면 좋으련만.

결국 하릴없이 내 자리로 물러나온 나는 투덜대며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 왜 저래?”

“자신의 목소리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거 아닐까요? 책에 그런 사례가 나왔잖아요. 자신이 낯설어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 얘기.”

“속으로 떠들면 환자가 아닌데, 겉으로 지껄이니까 문제지.”

“저 여자는 아마 자기 자신과 사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일 겁니다. 뭐 누구나 자기 자신과 잘 지내긴 쉽지 않으니까.”

“대체 왜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은 거지?”

나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여전히 떠드는 혼잣말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당신 처지를 생각해보세요.”

도서관 의자가 너그럽게 웃는다.

“의자와 얘기를 나누는 건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머리와 혼잣말을 내쫓고 싶었던 건 이곳이 ‘나의 구역’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도 조금씩 미쳐가는 것은 아닐까?

의자와 나는 결국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인물의 첫 등장은 근사했다. 하지만 갈수록 갈팡질팡하더니 시무룩하게 앉아 우리 둘의 말다툼을 쳐다보기만 했다. 의자와 나는 자주 싸웠는데 처음엔 왓슨 역할을 자처하던 그가 점차 홈즈 노릇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 왓슨 역할인 내가 홈즈 노릇을 하려 든 건가?

시간이 갈수록 의자는 까다롭게 굴었고 나중엔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이 부분은 문제가 있어요.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는 티가 너무 난다구요.”

의자는 이야기의 모든 부분이 ‘전면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니까 첫 문장이 다음문장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맡겨야지 머리를 굴려 논리를 맞추는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안테나를 세우고 특별한 전파가 수신될 때까지 뿔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신성한 방법이며, 쓸데없는 노력으로 전파를 뭉개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의자 주제에 중뿔나게 뮤즈 타령이라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옷도 돈도 필요 없는 그가 다달이 불어나는 내 카드빚을 알 리 없지만, 그보다 견딜 수 없는 건 그의 말이 갈수록 꼬여간다는 것이다. 이 난삽한 독서가가 불러주는 글들은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서랍처럼 어떤 것부터 받아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았다.

나는 심술이 나서 일종의 태업으로 응수했다. 가끔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아무 이야기나 적어버리기도 했다. 내가 쓰는 내용은 에디슨이 고안한 전기의자였다. 쇠로 된 족쇄와 처형자의 몸부림을 막기 위한 벨트가 달린 끔찍한 괴물, 앉으면 영혼과 생명이 뽑혀나가는 ‘처형 의자’에 대한 글자가 찍혀나가자 내 친구는 불같이 화를 내더니 종일 입을 닫았다.

며칠간 도서관에 발을 뚝 끊기도 했다. 일부러 다른 자리에 앉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의자의 초조한 시선을 무시하는 일이 왜 그리 통쾌했는지 모르겠다. 풀죽은 그는 아이를 잃어버린 우둔한 유모 같았다.

나는 이 모든 상황에서 날카로운 쾌감이 느껴졌다. 뭔가를 배반하는 일은 야만적인, 따라서 즐겁기까지 한 에너지를 몰고 왔다. 결국 나는 친구의 고통을 희생제물 삼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이렇듯 의자와 거리두기를 하던 어느 날, 적게나마 용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들어왔다. 나는 의욕에 차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보란 듯이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프린트 물을 놓고 번역을 하는 동안 해는 긴 꼬리를 남기고 창밖으로 사라졌다. 입을 꾹 닫고 지켜보던 의자는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자 말문을 뗐다.

“그…… 전기의자는 어떻게 됐나요?”

그는 여전히 이야기에 집착했다. 그 얘기들은 커서가 깜박거리는 모니터의 끝에서, 마치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여자처럼 붙박여 있는데 말이다.

“글쎄, 의자 얘기는 좀 신물이 나서.”

인간과 말을 튼 대부분의 의자들은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의자는 아직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그런 일’이 막 벌어지는 참이다.

“그러면 나를 찾지 않을 건가요?”

의자는 처량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예술가의 후견인 운운한 건 그저 나를 붙들려는 핑계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의 외로움에 잠깐 지핀 모닥불 같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이미 시작한 잔인함엔 가속이 붙어 있었다.

“오늘 온 건 너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야. 더 빨리 떠났어야 하는 건데.”

작별이란 말을 떠올리자 신파적인 낭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간 친구가 되어 주어 고맙다, 하지만 너 말고도 가져야 할 것들이 많다는 말이 내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도서관 의자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더니 간신히 작별인사를 건넸다.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말았군요. 그래도 꼭 한번 저를 찾아주셨으면 해요. 자격증 교재나 창업 가이드 같은 것이 당신 손에 들려 있더라도 전 상관없어요.”

마지막 말은 그런 꼴을 꼭 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의자가 나를 비꼰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의자에게 끌렸던 중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말이었다. 감히 의자 주제에 나를 비웃는 건가? 수개월간 나를 포로로 잡아놓고 조종했으면서. 어쩌면 조롱했으면서 말이다.

그때 내 마음엔 오직 한 가지 욕망밖에 없었다. 의자에게 모욕을 주고 박살을 내주고 싶은 욕망.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도서관 의자를 밀어 버렸다. 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간 의자는 네 가랑이를 허공에 세운 채 나자빠졌다. 볼트와 너트와 베니어합판, 아무렇게나 찍힌 호치키스 자국, 먼지와 범벅이 된 더러운 밑바닥이 속수무책으로 드러났다. 내 환상의 친구는 이토록 남루한 내면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내가 세워주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일어날 수도 없다. 의자는 말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하고, 자신의 고유한 상태를 모조리 잃어버린 채 아랫도리가 벗겨진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었다.

도서관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불화를 목격했다. 책이, 책상이, 다른 이용자들과 사서들이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대머리도 이 광경을 훔쳐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상이 그에 이르자 그토록 증오했던 광인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벌이고 있는 꼴이라니.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와 그대로 도서관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구립 도서관의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 그때까지 나를 감싸고 있던 얇은 막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란 창공이 사라진 자리에 검고 더러운 우주가 드러났다. 와그작와그작, 벌레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머릿속 가득 번식했다.

도서관을 나온 다음에도 나는 많은 의자를 만났다. 사무실의 하이테크 의자나 아내가 사온 식탁 의자 같은. 시간이 갈수록 부양해야 할 의자가 늘어났고 여러 개의 의자를 가진 삶이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어떤 의자도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2] 의자들은 고독한 인생을 산다. 서지도 눕지도 못한 채 평생을 보내는 이 족속은 바닥에서 약간 올라온 곳에 흐르는 공기- 우리의 무릎이나 종아리 부분 정도-를 호흡하며 누군가 말을 들어주기를 기다린다. 어떤 의미에서 의자의 삶은 나무와 비슷하다.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한 자리에 붙박여 있어야 하니 말이다.

내가 자주 가는 공원의 벤치는 오랫동안 자신이 나무인 줄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우선 그는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있었다. 발은 흙 속에 묻혀 있고 몸뚱이에 나이테가 그려져 있는 탓에 자신은 하늘을 향해 직립한 생명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의자가 되면서 기억을 잃었을 뿐이라고, 나무와 자신은 형제라고 공원의자는 생각했다.


차가운 김밥을 밀어 넣던 나는 ‘넌 시멘트로 만들어졌고 공원에 어울리게 꾸며진 것뿐이야. 얼마나 조악한지 멀리서도 가짜 나무라는 게 티가 난다고. 지금 내 엉덩이가 얼마나 차가운지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이 말은 김밥과 함께 꿀떡 삼켜 버렸다. 오랫동안 어떤 의자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공원 의자가- 작게 축소된 인공자연 속에 살아서 그런지 소박하고 눈치가 좀 없는- 실로 오랜만에 말을 붙인 것이다.

“나무와 전 부부나 다름없어요. 사람들은 그늘을 보고 제게 오지요. 저에게 앉아 다시 나무를 바라보고요. 우린 젓가락과 숟가락처럼 한 세트인 셈이죠.”

내가 보기에 이건 순전히 공원 의자만의 착각이다. 나무는 과묵하다. 나무는 이미 하나의 대륙, 하나의 세계였기 때문에 의자의 이런 마음을 알 겨를이 없다. 사철마다 다른 과제가 주어지고 수많은 잎, 꽃, 열매를 가진 그에게 다른 짝이 필요할까? 나무가 주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세계는 충분히 복잡하고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의자는 나무를 사랑했다. 그의 그늘,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을 통과해 들어오는 햇살을 즐겼으며 씨주머니에서 떨어진 열매가 자기 몸 위에서 도르르 굴러가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빨간 잎들이 쏟아지는 가을의 나무 샤워는 환희를 안겨주었고 첫 순이 움트는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봄밤의 며칠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면 나무보다 더 빨리 쓸쓸해졌다. 겨울에는 사람들도 나무도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의자 혼자 고독 속에 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청승에 장단을 맞춰줄 시간이 내겐 없었다. 도서관을 떠난 다음부터 내 우주엔 구직과 실직밖에 없었으니까. 끼니를 때웠으니 이력서를 제출할 시간이다.

다시 공원 의자를 만난 것은 꽤 오랜 후였다. 그러니까 한 번의 실패를 여러 번의 실패로 늘리고 환상도 현실도 다 잃어버린 끝에 우연히 공원을 찾은 것이다. 공원 의자는 홀로 되어 있었다. 번개가 몹시 치던 밤, 나무는 허리가 반으로 꺾여 죽음을 맞이했다. 공원 의자는 나무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대지의 젖줄에 맞닿아 있고 태양과 교신하는 위대한 그가 이렇듯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무서울 정도로 성성한 푸른빛에서 어떻게 생명이 싹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제 자신이 두 동강 나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사람들은 흉측하게 변한 나무의 주검을 파헤쳤다. 나무뿌리는 공원 의자의 발이 묻혀 있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속정 깊은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의자는 눈물을 삼켰다. 뿌리를 모조리 뽑고 나자 또다시 아득한 구멍이 드러났다. 생명을 빨아들이고 푸른색을 검은색으로 바꾸어버린 암흑이었다.

그 구멍을 메우며 시간이 흘러갔다. 어차피 시간은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나침반이 남과 북을 가리키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의자는 긴 잠을 잤다. 공원은 꿈으로 가득 찼다.

나무의 꿈을 너무 많이 꾼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자의 몸은 점점 파랗게 변해갔다.

“늙을수록 푸르러지는 몸뚱이.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나요?”

나는 공원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이끼가 껴서 앉을 데도 마땅치 않은 낡은 의자를. 비로소 나무가 되어버린 의자를. 당신이 나라면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난 너무 가벼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순간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푸름에 몸을 내준 채 녹이 슬고 있는 저 의자는 좀 더 무거운 엉덩이, 백지의 끝까지 걸어간 자에게 말을 걸었어야 했다. 나이 오십에 초경을 치르는 여자처럼 수줍음이 가득 차 자신의 몸을 내보이는 그에게 ‘당신은 늙고 나서 젊어졌다’는 모순을 멋있게 말해줄 요량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꿈꾸기를 다시 시작한다면 그처럼 푸른 몸뚱이를 가질 수 있을까?

오래 전 나에게는 도서관 의자가 있었다. 그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세상엔 쓸 만한 꺼리들이,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들이 아무 데서나 옷 벗고 눕는 여인처럼 떠다닌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적으려면 내 도서관 의자가 필요하다. 나는 타자수, 그는 내 두뇌이자 영감이기 때문이다. 도서관 의자와 대화할 수 없는 내가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늙은 나무가 내 친구의 안부를 묻는다.

“당신의 의자는 잘 있나요?”

그 의자는 여기에도 없고 도서관에도 없다. 딱 한 번 내가 그를 찾았을 때 그곳은 각종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커다란 탁자 아래 놓인 열 개의 의자들은 완강한 침묵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공원에 앉아 나는 내 의자의 최후에 대해 상상했다. 내가 찾지 않은 동안 도서관 의자는 창밖을 나와 한강을 건너 우주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그와 내가 만든 이야기들은 우주의 불쏘시개가 되어 어디선가 활활 타고 있을 것이다. 어느 귀부인 못지않게 예술가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그러나 실은 자신이 예술가였던 도서관 의자가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세상에 의자와 사귀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비극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악기를 잃고 어떤 사람은 주머니를 잃었을 것이다. 당신은 라디오를 잃고 또 다른 당신은 거울을 잃었다. 유년 이후 처음 말을 붙여준 사물이 다가올 때 우리가 소통한 세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들은 우주에서 기다란 성운을 이루며 떠다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같은 비애를 가진 이와 그곳을 여행하고 싶다. 우리에게 말을 건네던 모든 사물들이 떠다니는 성운. 당신의 악기·주머니·라디오·거울이 떠 있는 그곳에서 내 도서관 의자를 되찾고 싶다. 그곳은 우주의 고물상 같겠지만 우리들의 낡은 꿈이 모인 가장 아름다운 별일 테니까.

우주를 여행하는 그 의자에게 돌아오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도서관 의자가 있다면 이 글은 이렇게 서툴게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 없고 나는 그 겨울을 떠올리고 있다. 종이 위에 글자가 끝나가는 순간이 몹시 두렵고 그가 그립다. 등을 기대고 깊숙이 앉을 때 건네 오던 도서관 의자의 명랑한 첫 인사가.

오후에 나는 내 인생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라고.


소설 당선소감
“링에 올라 맞을 시간 … 심호흡하고 발 떼겠다”


김성중
▶197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그러니까 성동구청 1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이었을 것이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 한 평 남짓한 엘리베이터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실업급여를 타러 올라가는 사람들, 패배자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여자, 남자, 젊은이, 늙은이가 골고루 있지만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이다. 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숨 막히게 비참하다. 내가 받을 실업급여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해고가 아무리 부당한 것이라 해도 그곳에 오르는 일은 구걸처럼 느껴진다.

5층과 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려 했던 5층과 9층의 사람들은(그들에게는 직장이 있다! 더구나 공무원이다) 실업자로 꽉 찬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다. 문이 닫히고, 우리는 서로의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올라간다. 패배의 통조림에 들어가 있는 3분 남짓한 시간. 빌어먹을 성동구청이 나에게 가르쳐준 그 시간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패배에 끌린다. 링에 올라 흠씬 두들겨 맞고 무릎이 꺾이는 쪽이야말로 내 시선을 모으는 곳이다. 맞고도 헤실헤실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부어터진 입에 국밥을 밀어 넣는 사람들, 환상에 싹수가 있지만 운과 재주가 부족해 좇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항상 더 매력적이다.

더 많이 받아 적으라고, 링에 올라 얻어맞을 시간이라고, 당선 소식은 내게 그렇게 들린다. 어설프게 잽을 날리면 어퍼컷이 들어온다는 것도 잘 안다. 물러설 데가 없는 링에 올려주신 세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어머니께도, 아버지께도, 대학 은사이신 박범신 선생님, 이제하 선생님께도, 큰아버지, 큰어머니, 고모, 이모, 내 동생 수환에게도, 나처럼 툭하면 쓰러지는 내 길동무들에게도 고맙고 감사하다. 심호흡 한번 하고, 발짝을 떼겠다.


소설 심사평
“의자와의 ‘대화 세상’ 흥미롭고 훈훈하게 그려”


응모작엔 개와 고양이 얘기가 유달리 많았다. 앵무새도 등장했다. 애완 세태의 반영일까. 개구리, 모터사이클, 심지어는 의자까지 나와서 곧잘 말을 했다. 진지하고 다양했던 연애 이야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할 만큼 올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소설의 관심, 혹은 애정의 대상이 사람에게서 동물과 사물로 이동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람의 자리를 동물과 사물이 차지한다는 게 소설에서는 전혀 낯선 설정이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라면 가일층 심화된 인간소외의 국면들이 글 쓰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충동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인간중심적 사고의 폐해와 한계를 그와 같은 ‘관계의 확장’을 통해 반성적으로 초극하려는 시도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결선에 올라온 작품 중 ‘포스트잇’ ‘두 남자의 회색 앵무새’ ‘안녕 할리’ ‘친구야, 노래해’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가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 특히 ‘친구야, 노래해’와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두 편을 놓고 오래 고민했다. 나머지 세 편은 공히 서사의 힘이 뚜렷하게 감지됐던 반면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 즉 예리하고 민감한 감성적 요소로서의 ‘찌름’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덜했다. 친구의 죽음을 끔찍하게 그렸지만 암울한 실존의 상징소(素)들로 인해 ‘친구야, 노래해’는 읽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미지 비약이 심하고 동상(銅像)등 소재의 처리가 난삽한 데다 등장인물들의 역할도 지나치게 암시적으로만 처리되어 작품의 의도가 독자에게 미치지 못하고 글쓴이의 독백으로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본심은 10일 중앙일보 중회의실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심사위원 김형경·구효서·신경숙씨. [김태성 기자]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또한 독자를 향한 팔매질이 야물지 못하여 의미의 돌멩이(문장)들이 충분한 비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던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자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경험하는 세상을 흥미로울 뿐 아니라 훈기까지 더해 서술해 내는 솜씨는 칭찬할 만하거니와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감성적 안정감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당선작으로 밀었다.

◆심사위원=구효서·김형경·신경숙 ◆예심위원=권여선·김영찬·박성원·윤성희·이기호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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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상 2005년 당선작 ‘미실’

대한민국 신춘문예 2008/11/09 00:34
국내 최고의 고료를 내걸고 한국문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제정된 제1회 세계문학상 첫 당선자가 탄생했다. 사랑으로 천하를 얻었던 신라의 여인 ‘미실’과, 그 여인을 소설로 새롭게 환생시킨 작가 김별아(36)가 그 주인공이다.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21세기 한국 땅에서 두 여인이 만나, 세계문학상의 첫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200자 원고지 1500장 분량의 당선작 ‘미실’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색공(色貢)을 통해 당대의 권력자들을 휘어잡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자유롭게 다가갔던 여인의 기록을 힘차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려낸 작품이다.
당선작이 결정된 후 작가 김별아(36)에게 수상 사실을 통보했을 때, 그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 당선사실을 확인해주자 그제야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세계일보 편집국에 나온 김별아는 지난 밤 내내 잠을 설친 탓인지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어제는 전화받고 기뻤지만, 오늘은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지나친 겸양이 아니라 그저 조용히 늙어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게 제 꿈이었는데, 갑자기 큰 격려를 받고 보니 당황스럽네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처럼 큰 격려를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거든요.”

당선작은 오늘날 우리네 가치 기준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신라시대 여인의 극히 자유롭고 생물학적인 사랑 행태를 따라간다. 김별아는 고대사에서부터 근세사까지 역사 관련 서적을 오랫동안 탐독해 왔고, 서구 문명사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고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결과가 ‘미실’로 탄생한 것이다. 3년여의 자료 조사 끝에 지난해 8월부터 세계문학상을 목표로 집필을 시작해 마감일 직전까지 이 소설에 매달렸다.

“미실이라는 여인을 알게 된 순간,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캐릭터라는 사실을 직감했지요. 수많은 남자들을 거느렸는데 그 남자들은 대부분 미실을 향한 일부종사로 일관했고, 심지어 미실을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합니다. 열정과 순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남자들이지요.”

김별아는 1969년 강릉에서 부부교사인 부모의 1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김남정·현재 태백시 교육장)가 사다 준 금성출판사판 세계명작전집을 밤새워 읽기 시작한 이래 책벌레가 되었다. 고교 시절 장래의 희망을 구체적으로 소설가로 설정했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작가가 되기 위한 체험의 중요성에 대한 강박 때문에 버스안내양 아르바이트까지 자청했다. 대학 시절에는 총학생회 간부로도 활동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따로 등단 절차도 밟지 않고 무작정 소설집 ‘신촌 블루스’를 펴낼 정도로 당찬 기질을 발휘했다. 정식 등단을 권유하는 주변의 뜻에 따라 1994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니, 등단 만 10년 만에 중요한 문학인생의 고갯마루에 올라선 셈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문화의 힘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고구려는 자기 문화를 소중하게 상승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백제는 온유하지만 칼날까지 둥글게 만들었던 유약함이 보이는 데 비해 신라는 자유분방한 성적 에너지를 슬기롭게 승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미실이라는 여인상은 극단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이래 교육받아온 선입견만 버리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먼지처럼 스러져가는 것인데, 솔직하고 자유롭고 편견 없는 삶을 살아갔던 우리 선배들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뒤 경기 과천에서 살고 있는 김별아는 아들 혜준(9)을 아침에 학교에 보낸 뒤 서울대공원 호숫가를 한바퀴 돌다가 들어와, 다시 아들이 하교할 때까지 집필에 매달리는 단순한 생활을 반복해 왔다. 그 단순하고 집중된 환경에서 역사와 문명서적을 탐독하고, 한 번도 일단 세워놓은 집필계획은 어겨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집요한 스타일이다. 토마스 만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그는 책도 두꺼운 게 아니면 도전할 흥미가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는 당찬 여인이다. 당선의 흥분도 잠깐, 그는 벌써 지금 계획 중인 새 장편을 위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중이다. 평가는 독자와 평자들에게 맡기고 조용히 제 갈 길 가기 위해.

1995년 역사학자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에 의해 공개된 남당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는 아직도 첨예한 진위 논쟁에 휩싸여 있는 상태다. 본래 ‘화랑세기’는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 32명의 전기다.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에 의해 저술되어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 부분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화랑세기’는, 신국(神國)으로서 신라의 모습과 그들 특유의 신국의 도(道)를 밝힌 독특한 저작이다.

하지만 학계의 진위 논쟁 중에는 이러한 ‘신국의 도’가 지나치게 음란하고 방종하다는 것이 ‘화랑세기’를 악의적인 위작으로 판명하는 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금석문과 사료를 가진 고대사를 중세적 도덕관으로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야말로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아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므로, 고대사는 여전히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과 탐구를 요구한다. 이 소설은 ‘화랑세기’를 주된 질료로 하여 쓰였다. 나는 오로지 1500년 전의 그들을 작가로서 이해할 뿐,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화랑세기’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인 미실은 지금 우리 식의 도덕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미실은 왕과 그 일족의 부인을 공급하는 계통으로서의 인통(姻統), 그 중에서도 대원신통의 여인으로, 진흥·진지·진평왕 3대를 색(色)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린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팜 파탈’이다. 스스로 권력을 얻어 전주(殿主)와 새주(璽主:옥새를 관장하는 지위)로서 내정을 장악하고 화랑도의 원화(源花)가 되는가 하면, 진지왕의 폐위에 중심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미실의 부침과 인생 역정은 조선조 이후 급격하게 하락해야 했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본디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비록 뛰어난 미모를 무기로 삼기는 했으나 미실은 언제나 스스로의 본능에 충실했고 운명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에게 기꺼이 복종한 신라의 신실한 사내들은 남성미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여준다. ‘화랑세기’의 신라는 음란하고 방종한 나라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섬기고 모시는 신국이었고, 미실은 그 신국에서 사랑으로 천하를 얻은 여인이었다.


최종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이누의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와 금현의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 그리고 김별아의 ‘미실’ 세 편이었다. 가독성이 뛰어난 것은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였다.
존재론적 정체성을 잃고 무국적자로 위태롭게 살다가 파멸에 이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고백체로 담아내고 있는 ‘몽이의 블루헤어에 갇힌 새’는 잘 읽힐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기능적으로 얽어짠 솜씨가 좋았으나 지나치게 고양된 영탄조의 문체, 생모의 갑작스러운 출현 등이 보여주는 작위성, 붉은 단추의 상징화 미숙, 결말의 안이성 등이 지적되어 당선권에서 제외됐다.
남은 두 작품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와 ‘미실’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소설 문법을 보여주고 있어 장시간 토론이 이어졌다.
‘이봐…’는 짧고 세련된 문체와 현실·가상 공간을 넘나들다가 점층적으로 결말에 이르는 모던한 소설 기법 등은 좋았으나 전반적으로 서사의 볼륨이 빈약하다는 점과 지나치게 대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주제의식이 불분명하여 공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미실’은 그와 달리 ‘화랑세기’에 기록된 역사 속 인물을 독특하고 뚜렷한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진지하게 형상화해냈다는 점에서 호감을 샀다. 물론 역사의 기록을 소설적 상황으로 재구성해내는 데 필연적으로 따르는 창조적인 관점이 미흡하다든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서술 때문에 로맨스적 구조에 가깝다든가, 결말부에서 상투적인 계몽성을 드러냈다든가 하는 점들이 지적됐으나, 작가의 탐구심이 돋보이는 문장과 호방하게 밀고 나가는 서사력과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를 응축해놓은 솜씨 등에 비해서는 부분적인 결함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대부분 일치했다. 무엇보다 신라의 여인 ‘미실’을 왜 오늘의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는지, 작가가 명백한 대답을 갖고 있는 듯 보여 마음 든든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스타작가’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내면화 경향이라고 요약되는 1990년대식 협소한 소설 문법을 밀어내면서 호방하고 장대한 서사를 담아내는 로맨스적 구조의 소설들이 최근 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미실’은 그런 상황에서 선도적 역할을 능히 감당해내리라고 믿는다. 새로운 서사의 시대가 열리기를 바란다.

본심에 오른 세 편의 작품 중 ‘몽이의 블루 헤어에 갇힌 새’는 스토리 텔링 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다. 그러나 보다 명료하게 형상화되어야 할 인물의 개성, 장편 분량에 걸맞은 서사, 제대로 된 한판 갈등 등이 확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불필요하게 냉소적인 말투와 화자인 18세 소녀의 언행으로 볼 수 없는 대목이 자주 드러나는 점도 거슬렸다.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는 오랜 연마 과정을 거쳐 뽑아낸 정제된 형태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문체의 개성이 확보되어 있고 지문이나 대사의 재기발랄함도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어디선가 만난 듯한 상투성, 설익은 사유의 아마추어리즘 등이 독서를 방해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단편 규모의 빈약한 서사를 너무 큰 그릇에 담은 듯 허전한 뒷맛이 남는다.
‘미실’은 장편이라는 장르적 규범에 가장 충실하며 또한 프로페셔널한 작품이다. 쓰고자 하는 대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점, 역사 소설을 쓸 때 필요한 기초 지식을 잘 확보하고 있는 점, 역사적 사실 위에서 펼치는 상상력의 전개가 거침없다는 점, 장편에 걸맞은 서사의 부피를 확보하고 있는 점, 그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는 문체의 숙련성 등이 두루 믿을 만했다. 특히 이 소설의 매력은 신라 여인 ‘미실’을 통해 그동안 예술 영역에서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여성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미실’은 데미테르 같은 모성의 여성도 아니고, 팜 파탈인 치명적 매혹의 여성도 아니다. 남성에게 의존하거나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 또한 아니다. ‘미실’은 여성을 통제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 성 모럴이 정립되기 전, 남녀가 가장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인간으로 존재하던 시기의 여성이며 이 소설은 그런 여성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사적 사실에 지나치게 충실해 구성의 묘를 발휘하지 못한 점, 역사 지식을 되도록 많이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불필요한 의고적 표현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2004년 5월, 1억원 고료 장편소설을 공모하는 제1회 ‘세계문학상’을 고지한 뒤 지난해 12월30일 최종 마감한 결과 모두 139편이 응모했다. 통상적인 장편문학상 응모작 수의 배에 이르는 양이었다. 이후 약 한달 여에 걸친 본격적인 심사 장정에 들어갔다. 응모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이나 기존의 심사 방식에서 진일보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주최 측은 고심을 거듭했다.
우선 심사위원을 국내 문학상 심사 사상 가장 많은 9명으로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이 초기 단계부터 열심히 작품을 읽고 최종후보작을 압축해놓은 뒤에는 손을 놓고 본심위원들 몇 명의 심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통상적인 심사 방식을 바꾸어, 예심위원들도 마지막 결정 과정까지 참여하기로 했다. 이 방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국 문단의 대선배들이 흔쾌히 젊은 후배들과 심사를 함께하는 ‘기득권’ 양보가 필수적인 전제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과정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성석제 김형경 하응백 서영채 김미현 김연수에 이르는 6명의 청장년층 심사위원이 구성됐고, 노년층에서는 김윤식 김원일 박범신씨 등 3명이 참여했다.
2005년 1월 26일 오후 5시 세계일보 편집국 대회의실. 최종 후보작 ‘이봐, 바람개비가 돌고 있잖아’ ‘미실’ ‘몽이의 블루 헤어에 갇힌 새’ 등 3편을 놓고 한 시간여에 걸친 토론이 이어졌다. 어느 한 작품으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현 단계 한국 소설의 경향에 대한 평가가 오고간 뒤 심사위원들은 무기명 비밀투표를 하기로 합의했다.
1차 투표 결과, 각 작품은 위에 언급한 순서대로 4:3:2의 표를 얻었다. 어느 한 작품이 과반의 표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상위 두 작품을 놓고 결선투표를 하기로 한 심사위원들의 사전 약속에 따라 2차 투표에 들어갔고, 5:4의 결과로 ‘미실’이 극적인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수의 논리가 늘 정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점수를 매기기 어려운 문학작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왕도는 없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쉽게 문턱에서 좌절한 응모자에게는 따뜻한 위로를 보낸다. 아울러 지난해 내내 계절과 밤낮을 잊고 작품 집필에 몰두했던 많은 응모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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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세계08)

대한민국 신춘문예/문학평론 2008/11/09 00:29

작품명: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
 
 성 명 : 조효원
 
 
 
문학평론 심사평 - 김주연


한 편의 평론작품으로서는 구성이나 짜임새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 있으나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무엇보다 비판정신과 힘, 요컨대 젊은 패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서 응모자의 앞날이 기대된다.

그가 말하는 사실인식과 메시지의 타당성에 있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비평에서 소중한 항목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의문문 만들기’의 가능성을 문학에서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김훈 소설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는 이 작품은, 구성의 작은 서투름을 덮어줄 신선함으로 매력을 끈다.

 
 
고대권의 ‘인간人間, 인간因間의 투쟁―황동규의 〈꽃의 고요〉’, 박승희의 ‘언어의 온기―나희덕론’도 당선권에 가까운 작품들이지만 어딘가 미흡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예컨대, 고씨의 작품은 지나치게 멋을 부린 구성이 오히려 독서의 진행을 방해하는 한편, ‘자유’라는 분석의 화두는 겉도는 느낌을 준다.
박씨의 작품은 이와 달리, 깊이 있는 분석 대신 이미 행해져온 평가를 독창적 목소리를 거치지 않은 채 재현하고 있는 인상이어서 아쉽다. 응모해 준 모든 분들에게 격려와 분발의 말씀을 드린다.
 
 
작품명: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
 
 성 명 : 조효원
 
 
 
원고를 보내고 기다리는 기간의 하루하루는 대선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과 겹쳐 있었다. 선거전에 돌입한 후보들의 노래와 춤과 외침은 맹렬했다. 그 맹렬함은 무차별한 시간의 흐름에 마디를 새기며 시간을 꺾을 듯했지만, 맹렬함이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는 게임이 끝나고 나자, 맹렬함이 지나간 자리는 적막했다. 그 적막함을 뚫고 들려온 당선 소식은 적막함에 서먹해 하던 내 감정을 아주 조금 누그러뜨려 주었다. 누그러진 감정으로,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문학이 무엇인지, 文이 무엇이며 또 學은 무엇인지, 아득하고 낯설다. 이 낯섦을 벗 삼아 인생을 지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두렵고, 행복하다.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적당히 모르는 것을 확실히 모르는 것으로 만들기, ‘숨어 있는 무의미를 명백한 무의미’로 만들기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께 고맙고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고 싶다. 누나와 매형이 좀 더 행복하기를 빌고, 조카 서영이의 몸과 마음이 상처와 흉터 없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께는 더 성실한 글쓰기와 공부로 보답해 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1981년 경남 진주 출생

▲성균관대학교 독문학 학사

▲동대학교 독문학 석사과정 재학 중

 
 
작품명: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
 
 성 명 : 조효원
 
 
 
문학은 끝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철학, 역사, 자연과학, 그리고 심지어는 법정에서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말’들은 사실에 닿지 못한다. 철학의 ‘사실’이란 영원한 진리이고, 역사의 ‘사실’이란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건이며, 자연과학의 그것은 보편타당한 법칙이며, 증언의 ‘사실’은 판결을 위한 도구이다. 이러한 각각의 언어들이 ‘사실’이란 말로 묶여 인간의 입과 귀 사이를, 손과 눈 사이를 떠다니는 것은 신비에 가깝다. 그러면 문학의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에의 도달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말과 글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는 것, 즉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또 거짓말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에 사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 대신에 문학은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런 까닭에 문학은 항상 음지에 묻혀 지낼 수밖에 없다. 다른 ‘말’들이 제각기 ‘사실’을 주장할 때 그 말들은 항상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을 주장하는 말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문학은 무기력하게도 항상 이러한 힘들에 억눌린다.
그러나 문학이 이 모든 힘들을 압도하는 일시적인 순간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문학이 예언으로 변모할 때이다. 인간의 언어 가운데 예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예언은, 특히 그것이 높고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부터 나온 것일 때는 더욱더, 구속적인 힘을 발휘하며, 이 힘은 그것의 소유자에게는 더없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 가령 IMF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른바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위기대처법’ 운운하는 강연과 저술을 통해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배를 불렸던 사실을 상기해 보라. 철학과 역사 혹은 자연과학이나 정치, 경제 분석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말’들이 어떤 힘을 가지는 현상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언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양태로 실현되는 언어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예언인 것이다.

예언은 특히 미래라는 시간의 영역을 담당하는 말이기 때문에 ‘불안’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는 인간 존재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마음씀Sorge라고 명명했거니와, 인간의 마음씀은 언제나 ‘앞’을 향해 있는데, 앞이 캄캄하므로 걸음을 내딛거나 방향을 잡는 일은 늘 모험인 것이다. 모험은 늘 위험과 함께 닥치는 것이고, 인간은 지나온 모험/위험의 기억으로 인해 더욱더 모험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데 예언이 정말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예언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부터 올 때이다. 예언을 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예기치 못했는데, 그것이 예언이 되어버리는 경우. 가령 부모가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너는 가망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해도 그 말은 아이에게 무서운 예언이 되어버려서 그 아이의 미래가 정말로 가망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선 명령형을 미래형으로 말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쪽이 강한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 미래형과 명령형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라는 것은 “이렇게 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이에 대해 너는 실패한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언어와 비극』, 도서출판 b, 2004, 76면.)

소설가 김훈은 제 글쓰기의 이유를, ‘말로 해선 안 되는 세상에 말 거는 자의 슬픔’이자 동시에 밥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말과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는 지금 한국 최고의 인기 작가다. 그의 최신작 『남한산성』이 최근 기업 면접에서 활용될 정도로 그의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강하다.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는 그의 ‘밥벌이용’ 글쓰기가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예언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대한 탐구가 이 글이 나아갈 길이다.


시간의 알갱이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신문인터뷰 중에서)

김훈이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는 것은 그것이 삶의 자리에 붙박여 있지 못하고 헛바람처럼 떠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로 상징되는 삶의 직접성에서 문학에 이르는 거리는 말 그대로 아득하다. 그가 보고 겪은 모든 삶의 무늬들은 ‘밥벌이’라는 틀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밥을 무시하거나 밥벌이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인간의 행위, 특히 믿을 수 없는 ‘개소리’로 배고픈 영혼을 구원하려는 문학은 없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찮은’ 문학 따위는 제쳐둘 수밖에 없다. 불을 꺼서 밥을 먹는 소방관의 이야기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이라는 것이 하나 마나 한 헛바람처럼 느껴지지만, 그 중에서도 수락!은 아주 대표적인 헛바람일 것이었다. 밥과 불의 세월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이 생애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수락이나 배척을 일체 떠나서, 비비적거리고 쓸리우면서 자리 잡는 과정이거나, 그 쓸리움에서 분비되는 진물 같은 것이어서, 그 진물에 질척거리는 시간 속에서 수락한다는 말이나 그 반대말로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배척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하나 마나 한 소리일 것인가.(『빗살무늬토기의 추억』, 128면.)

허허로움을 본질로 하는 바람조차도 되지 못하는, 헛바람 같은 말. 무기나 폭력 앞에서 ‘말’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나 ‘폭력’이라는 말이 아닌 진짜 무기와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목숨의 직접성을 남김없이 실감케 된다. 살 떨리는 생의 직접성. 김훈에 따르면 이 직접성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남한산성』, 180면.)

아무도 달아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이 뒤섞이고 풀어지며 흘러가는 것이 역사라는 생각에 김훈은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포위하므로 삶을 지배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삶의 직접성에서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다. 가장 자명해 보이는 것,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희미하고 가장 멀리 있다는 이 역설 앞에서 김훈의 언어는 주춤거린다.

궤도가 땅바닥에 비벼질 때, 시간의 들숨과 날숨은 그 숨결 위에 실리는 무거움을 버림으로써 그 무거움을 밀어젖힐 힘을 빨아당기는 것이었는데, 시간의 숨결 위에서 밀고 당겨지는 그 버림과 얻음은 흔적도 구획도 없었고, 공간을 통과하되 공간에 의하여 채색되지 않는 시간은 순결했고 무균(無菌)했으며, 이윽고 한 바퀴의 회전이 끝날 때 시간의 알맹이들은 궤도의 위쪽으로 떠올라 한동안 허허로운 무위의 공간을 흘러갔으나 그 무위의 시간들은 궤도의 밑바닥에 깔리는 수고로움의 시간과 한 피대의 지속으로 엉기면서 수억만 개의 알맹이로 소리 없이 명멸했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84면.)

이 묘사는 소설의 화자가 작중 인물 장철민이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가지고 작업하는 순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어휘 선택과 그 선택에 의한 문장의 구성으로부터 독자가 받게 되는 느낌은 우선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정확한 느낌이다. 이 말은, 김훈 식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하나 마나 한 말’에 불과한 것이다. 인용문 전체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문장에서 ‘수억만 개의 알맹이로 소리 없이 명멸했다’라는 서술어의 주어는 ‘시간의 알맹이’이다. ‘시간의 알맹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아득히 먼 느낌을 주는데, 이 알맹이들이 또 알맹이로 명멸한다는 대책 없는 동어반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독자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시간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데, 시간이 수억만 개의 알맹이로 소리 없이 명멸한다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도 역시 명멸하는가? 수억만 개의 알갱이로 흩어져 버리는가? 그러면 결국 인간도 말도 모두 먼지에 불과한 것인가? 김훈은 위의 인용문이 담긴 자신의 첫 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두고 ‘문체를 실험한 난삽한 작품’이라 평했는데, 그렇다면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은 이러한 대책 없는 동어반복에서 벗어난 것일까?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서 눈이 길게 불려갔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드러났다.(『남한산성』, 41면.)

적에게 닿는 저 하얀 들길이 비록 가까우나 한없이 멀고, 성 밖에 오직 죽음이 있다 해도 삶의 길은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뻗어 있고 그 반대는 아닐 것이며,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죽음 또한 돌이킬 수 없을진대 저 먼 길을 다 건너가야 비로소 삶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남한산성』, 197면.)

눈 위에 바람이 불었는데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히고, 눈이 길게 불려갔는데 그 자리에 새로운 시간의 무늬가 찍힌다면, 그 시간의 무늬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도대체 볼 수 있는 것인가?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성 밖에는 죽음이 있는데, 삶의 길이 성 밖으로 뻗어 있다면, 성 밖은 죽음인가 삶인가? 그리고 성 안은? ‘문체를 실험한 난삽한 작품’으로부터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그는 이 대책 없는 동어 반복에서 달아날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 없음’과 ‘동어 반복’은 그에게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의 기술이고 전략이며 무기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무기가 어떻게 ‘변신’을 하는지 살펴보자.


육체와 어둠, 어두운 육체

인간은 입이 있으므로 말을 한다. 그런데 입은 홀로 입이 아니다. 입은 얼굴과 함께이고, 목구멍과 함께이며, 또한 허파와 함께이다. 따라서 인간의 입은 다른 것들과 함께 몸으로서 있는 것이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고로 인간의 입은 몸이고, 말하는 것은 몸이다. 인간의 몸은 살아 있어야 몸인 것이지, 죽은 자의 그것을 몸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면 몸의 살아 있음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먹고 움직이고 자는 따위의 특징들을 들 수 있을 테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과 온기이다. 호흡과 온기는 몸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호흡과 따뜻함이 있어야 인간은 말을 할 수가 있다. 호흡과 따뜻함이 실린 말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살아 있음을, 인간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김훈이 그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하나같이 ‘느낌표(!)’가 없다. 아무리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이어도, 흥분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이어도 느낌표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늙음’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란 점에서-다시 말해, 연륜이 주는 침착함이라고 본다면- 일견 그럴싸해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살아 있음의 강렬함 혹은 인간됨(감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느낌표’가 없다는 것은 그 인물들이 동시에 죽음에 속해 있다는 표시로 생각될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살아 있는 육체 속에 이미 죽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 김훈의 소설들이 대개 병病과 아픔(혹은 이에 연접하는 전쟁과 고통)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드러나지만, 더 세밀히 관찰해 보면 ‘어둠’에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어둠은, 깊고, 멀다…….


-얘, 난 이게 올 때 꼭 몸속에서 불덩어리가 치솟는 것 같아. 먼 데서부터 작은 불씨가 점점 커지면서 다가와서 아래로 왈칵 터져나오는 것 같아. 넌 어떠니?

나는 어떤가. 나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감당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우울과 어둠이 안개처럼 배어나와서 온몸의 모세혈관을 가득 채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물을 떨구듯이, 게눈에 거품이 끓듯이 조금씩 조금씩, 겨우겨우 몸 밖으로 비어져나온다.(『강산무진』,「언니의 폐경」, 234면,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이 어둠이 꼭 인간의 육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도 식물에게도 있다. 동물과 식물도 제각기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살고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눈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삶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 먼 어두움’을 응시하는 특별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눈은 파충류의 눈구멍이나 꽃봉오리 안으로까지 파고든다.

그 눈구멍을 통해 그것들의 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린 파충류의 내면에는 깊이 모를 어두움이 바다처럼 고여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의 어두움이 그것들의 눈구멍을 통해서 그처럼 깊고 날카로운 어둠의 빛을 쏘아내고 있는 모양이었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34면, 강조는 인용자.)

날이 저물어서 수련이 꽃잎을 오므려가고 있었다. 아직 덜 오므려진 틈새로 안쪽의 꽃술이 내비쳤고, 꽃잎의 안쪽에 흐린 어둠이 배어 있었다. 어둠은 밖에서 꽃봉오리 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 같기도 했고, 봉오리 안에서 생긴 어둠이 꽃잎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강산무진』, 「강산무진(江山無盡)」, 347면,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이 어둠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그의 특별한 눈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 어둠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냄새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냄새에 대한 묘사는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냄새는, 가령 생선 비늘의 비린내와 정육점 고기의 피비린내, 파, 부추, 양파, 마늘 등의 채소에 묻어 있는 흙냄새, 그리고 순대와 곱창, 잔치국수와 떡볶이 등의 온갖 음식 냄새와 더불어 장사꾼과 짐꾼의 땀냄새, 그리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건네어지며 왔다 갔다 하는 돈냄새가 모두 어우러지는 장터의 그것에서 보듯이, ‘살아 있음’에 가장 가까운 표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음을 확인케 해주는 이 냄새는 동시에 육체의 어둠에 접속되어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몸의 저 깊은 오지에서 나의 몸과는 무관하게 살아 있는 짐승이 어두움의 벽을 향해 내지르는 발길질처럼 구역질은 난데없는 복받침의 파장으로 창자를 거꾸로 타고 올라와 목젖을 눌렀고, 출동대기하던 간밤에 먹은 라면과 김치가 창자를 따라 내려가면서 삭는 냄새의 끄트머리가 구역질을 따라서 목젖을 넘어 왔다. 입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구역질을 어금니를 응물어 몸속으로 밀어넣으면 구역질은 몸의 어둡고 먼 곳으로 내려가서 희미하고도 둔중한 여운을 끌며 떠돌았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22면, 강조는 인용자.)

라면과 김치가 삭는 냄새가 가 닿는 곳은 ‘몸의 저 깊은 오지’, ‘몸의 어둡고 먼 곳’이다. 이 어두움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을 통과한 냄새는 악취로 변한다.

아내의 똥은 멀건 액즙이었다. 김 조각과 미음 속의 낱알과 달걀 흰자위까지도 소화되지 않은 채로 쏟아져나왔다. 삭다 만 배설물의 악취는 찌를 듯이 날카로웠다.(『강산무진』, 「화장(火葬)」, 45면.)

이처럼 냄새는 저 어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삭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삭는 것이 냄새의 본질이고, 그것이 저 어둠으로 뻗어있는 길인 것이다. 이 어둠을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까?

국물에서 흙냄새가 났다. 봄볕에 부푼 흙냄새 같기도 했고 젖어서 무거운 흙냄새 같기도 했고 마른 여름날의 타는 흙냄새 같기도 했다.(『남한산성』, 104면.)

졸립던 그 봄날, 대낮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햇볕에 부푼 황토 흙을 집어먹고 싶은 충동에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흙 속의 잔구멍 속으로 햇빛이 스며서 구멍 속에서 가는 빛과 그림자들이 오글거렸다. 햇볕에 부푼 그 흙을 집어먹으면, 몸이 부드러운 흙 속에 누운 것처럼 편안해지고 손가락 발가락 사이와 겨드랑과 허벅지, 그리고 자궁 속에까지 빛이 자글거릴 것만 같았다.(『강산무진』, 「언니의 폐경」, 239면.)

빛, 빛이 있는 것이다. 이 빛은 사람의 발이 닿아 있는 흙 속에 스미는 것이고, 이 흙을 먹으면 ‘자궁 속에까지 빛이 자글거릴 것’이다. 자궁은 김훈이 ‘몸의 깊고 어두운 곳’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곳인데, 봄볕에 부푼 흙을 먹으면 그곳에서까지 ‘빛이 자글거린다’는 것이다. 비록 그 흙을 실제로 집어먹진 못한다 해도 그 생생한 느낌을 가질 수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냄새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통하는 이 냄새를 맡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말로써 말을 다투는 자들’이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라고 김상헌은 읽은 적이 있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남한산성』, 121면.)

살아 있음의 냄새를 맡고, 그리하여 또한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자는 말과 글을 다루는 자들이 아니라 몸으로 몸을 다루고 몸으로 ‘사실’들에 부딪치는 자들이다. 말과 글에는 냄새가 없으며, 그러므로 말과 글의 인간은 ‘봄볕에 부푼 흙냄새’도, ‘몸의 어둡고 먼 곳’으로 내려가는 냄새도 맡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말과 글의 인간은 삶에서 비켜나 있으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헛것이요 혼백들이다. 그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은 것인데, 이것들은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켜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삶의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린다.(『남한산성』, 9면) 보이지 않는 산맥이 시야를 가리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이 바로 김훈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이유다. 보이지 않는 산맥은 다시 산산이 흩어져 말먼지로 변하며, 기이하게도 이 말먼지들이 성을 쌓아 살아 있는 사람들을 거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기묘함이 파쇄되어야 된다고 보고, 그것을 목표로 ‘글쓰기’에 도전하는 의지가 김훈의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묘함이 주는 긴장은 그것 자체로 스스로의 꼬리를 물고 도는 우로보로스의 형상으로 지속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산맥과 말먼지가 사람들의 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해서도 안 될 터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속수무책’의 상황에 대하여 김훈은 말과 글로써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대책 없는 동어 반복’은 그의 본질이자 생존의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 몸부림을 ‘컥컥거림’이라 부른다.

그의 말투는 몸속 깊은 곳에 가두어져 있던 말의 토막들이 목구멍을 기습적으로 넘어오는 순간의 컥컥거림이었다. ...... 죽은 장철민의 살았을 적 컥컥거림을 주워모아 그것들을 인간의 언어 속으로 편입시키려 한다면, 거기에는 죽은 자의 컥컥거림 위에 산 자의 컥컥거림이 겹쳐서, 개의 짖음에 소의 울음을 포개는 꼴이 될 터이지만,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생애 속에서 이물스럽게 살아서 걸리적거리는 그의 생애로부터, 이해되었다는 구실 아래 이제는 그만 돌아서기 위하여 그 컥컥거림의 길로 나아간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80∼81면.)

이 컥컥거림의 길은 너무나 멀고, 살아 있는 김훈은 죽을 때까지 ‘소의 울음’을 포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김훈은 울며 말한다.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죽음 또한 돌이킬 수 없을진대 저 먼 길을 다 건너가야 비로소 삶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남한산성』, 197면.)


예언과 비극

말로써 말을 쓸어내고자 하는 김훈의 애처로운 시도는 그것이 아름다운 까닭에 더욱 애처롭다. 말을 쓸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동시에 인간이기를 거부하는/벗어나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죽음의 순간에야 비로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 욕망이 정말로 충족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살아 있는 우리는 언어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언어의 길을 통해서만 시도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인 시도이다. 시작과 동시에 좌절되는 시도.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두고 ‘언어의 비극성’이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말에 의해 있고 말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자연사적인 조건이라는 것은, 그것을 없앨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와 비극』, 66면.) 김훈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자연사적인 조건’으로서의 언어의 본질이다. 그에게 말은 헛바람이기 때문이다.

말이 헛것이요 헛바람이라는 진술은 오직 파악할 수 있고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의 세계를 상정할 경우에만 타당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라도 사실을 확정할 수는 없다. 사실이란 것 자체가 이미 말 속에 묶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사실 자체가 말에 의해 빚어지고 시간에 의해 풍화되기 때문에, 말과 시간의 흐름에 실려 있는 존재는 그것과 함께 흐를 수 있을 뿐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실이란 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고 변형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실제 현실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사실’은 조작되고 왜곡되고 변형된다. 어떤 경우에는 있었던 사실마저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도 실은 언어의 힘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언어의 헛됨에 대한 김훈의 비판은 과녁이 잘못 조준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활시위는 왜곡과 조작과 은폐, 요컨대 언어를 이용한 술책으로 이득을 꾀하려는 자들을 향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로 화살이 당겨지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을 꾸며내고 제멋대로 바꾸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말로써 말을 다투는 일’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 이때 ‘말로써 말을 다투는 일’이란 결코 탁상공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꾸며진 사실’의 권력에 대항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삶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안간힘, 진실을 지키고 일구어내려는 노력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문학이다.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말로 지어진 성을 무너뜨리려는 김훈에게는 분명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계는 악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는 온갖 이념과 이데올로기, ∼주의 따위가 ‘밥벌이’와 ‘목숨’에 무슨 소용이냐고 따져 물을 것이다. 진리와 올바름을 말로써 독점하려는 그 모든 헛바람들이 헐벗고 주린 자들에게 밥과 옷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옳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세계의 칼과 폭력 앞에서 문학 따위의 헛바람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김훈이 몰랐던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사실’이 다만 ‘그의 사실’일 뿐, 다른 이의 사실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사실에 입각해서 아름답고 화려한 말의 성을 축조해 내었을 때, 그곳에 들어간 자들에게 그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예언’이 되고 명령이 된다는 점이다. ‘예언’ 앞에서 칼 따위는 무기력하다. 미래에의 불안을 양식으로 삼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게는 눈앞에 닥친 칼보다도 캄캄하게 펼쳐진 미래가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미래의 캄캄함에는 과거의 짙은 어두움이 포개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예언’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다.

김훈이 “삶 속의 어떤 사태는 설명이나 이유와는 애초에 무관한 것이어서 그 앞에 ‘왜’를 붙여서 의문문을 만들 수는 없을 터인데 아마도 ‘너는 왜 소방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 따위가 그러하리라. 인간의 생애가 어떤 필연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라고는 이제, 말할 수 없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27면.)라고 말할 때, 그는 삶에 어떤 필연성을 그리하여 운명이라는 굴레를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의문문’을 만들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김훈이 삶에 덧씌우는 운명의 굴레다. 이 운명은 ‘삶에는 필연성 따위는 없다. 악은 악으로서 다만 악이니, 그저 살아남아서 살아가라’는 예언의 형태로 선포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거짓예언’에 대항해 끊임없이 진실을 일궈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문학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문학은 개별적 삶에 이래라 저래라 혹은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문학은 언어의 그 비극적인 양가성 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 하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김훈의 소설이 앞으로도 계속 ‘의문문 만들기’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그의 ‘소설’은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이름은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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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세계08)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9 00:28

작품명 : 너와집
 성 명 : 박미산
 
 
 
<심사평> 신경림·유종호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쓴 아주 따뜻한 시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수준이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특별히 개성 있는 시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이재근), ‘나비의 꿈’(문계현), ‘너와집’(박미산) 같은 작품들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준은 넉넉히 되었다.

먼저 ‘실직’은 삶에 뿌리박은 정서의 시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한데 무언가 신선한 맛이 덜하고, 죽음의 이미지가 시를 무겁게 만든다. 게다가 너무 건조하다.
 
 
같은 작자의 ‘얼굴’은 읽는 재미는 ‘실직’보다 낫겠는데, 산만하고 장황한 것이 흠이다.
‘나비의 꿈’은 장애인 부부의 외식 나들이가 소재가 된 시로서,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비유가 좀 억지스럽고 관념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화자가 되고 있는 ‘붉고 둥그스름한 다라이’는 정리가 더 돼야 할 소재 같다.

하지만 남과 같지 않은 상상력은 그의 앞날에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너와집’은 아주 따듯한 시여서 일단 호감이 간다.

물론 ‘너와집’은 실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과 ‘내’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말이나 감각도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심사위원은 최종적으로 박미산의 ‘너와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작품명 : 너와집
 성 명 : 박미산
 
 
 
느리게 공부하는 내게 격려·질책해 준 선생님께 감사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한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산을 탔다. 바싹 마른 말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무너지려 할 때 지리산을 완주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설악과 북한산에 다니면서 내 몸을 다져 밟았다.

잘근잘근 밟혀 돌아오면 후줄근한 내 몸에서 말들이 피어나왔다. 허기진 가슴에서 바람이, 구름이, 안개가 시로 피어났고 때로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은 나도 모르게 곳곳에 쌓여 갔다.

찰랑찰랑 의심하던 사랑을, 요절을, 시를 여름 계곡에 떠나보내고 푸른빛이 사라져 이슥해진 나의 겨울 계곡은 은빛의 물 뿌리가 드러났다. 바닥이 다 드러난 나는 솔솔 내리는 눈발에 목을 축이고 사모하는 긴 혀를 따라 구불구불 의심했던 길을 다시 갔다.

피어나지 못했던 말은 부패되지 않은 채 골짜기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부딪치며 새 물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밤 나는 가장 예쁜 꿈을 꾸었다. 눈 쌓인 계곡에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살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철없는 나에게 ‘늦게 피는 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와 질책을 아낌없이 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시 합평회를 할 때마다 묵사발을 만들어준 수요시창작팀, 유안진 선생님, 장만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과 구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하시는 친정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 단비와 차래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십년을 함께 땀 흘린 택견패들에게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도 유종호 선생님과 신경림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말로 살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삶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씀으로써 두 분 심사위원께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참이다.

 


박미산(본명: 박명옥)

▲1954년 인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방송대 강사
 
 
작품명 : 너와집
 성 명 :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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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세계08)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27

작품명 : 우유
 성 명 : 전윤희
 
 
 
<심사평> 김윤식·오정희

사소한 문제서 사회 위협하는 폭력 긴강감 있게 묘사

예심에서 올라온 11편의 작품들 중 5편의 작품에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김경의 ‘민들레 귀하’는 문장과 스토리 전개의 빠른 흐름이 경쾌하였으나 비교적 단순한 내용과 깊이의 부족이 지적되었다. 신윤아의 ‘1683 라모를 찾아서’는 나름대로의 실험성과 안으로 파고드는 치열성이 돋보이나 무리한 주제 설정으로 작위성이 드러나는 것이 흠이 되었다. 이희진의 ‘이빨’은 상실과 결핍과 소외라는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닥터피시’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매개로 하여 끌어내고 치유를 꾀한다는, 다소 생경하고 특이한 소설이다. 소설을 만드는 솜씨의 능란함과 탄탄한 문장력에 호감이 갔으나 작품 전반에 걸쳐 ‘닥터피시’에 대한 설명이 장황한 데 비해 그것의 상징성이 약한 것이 소설적 긴장의 약화로 이어졌다.

임기선의 ‘룸메이트’는 무엇보다도 능숙한 문장과 소설의 유려한 흐름에 호감이 갔다. 시종 객관성을 잃지 않는, 작가로서의 시선도 쉽게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계속하여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면서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흡혈인’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든가 결말에 가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동성애 모티프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 때문에 작가가 어떤 소설적 필연성보다는 유행하는 시류에 편승한 면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윤희의 ‘우유’는 여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소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일상적 사건 안에 이 시대적 삶과 사회를 위협하고 잠식해 들어오는 폭력, 점진적으로 고조되어가는 공포와 불온한 긴장, 그리고 그 앞에서 나약하고 주눅들어 있으며 무력한 분노에 차 있는 자신과 이웃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담아냄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하고 소심한 사람들의 의식과 삶의 한 단면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룸메이트’와 ‘우유’를 놓고 논의한 끝에 ‘룸메이트’의, 버리기 아까운 여러 미덕을 인정하면서도 글쓰기에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세련된 문장과 따뜻하고 진솔한 시선, 주제를 확실히 장악하는 능력 등을 높이 사서 ‘우유’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작품명 : 우유
 성 명 : 전윤희
 
 
 
삶의 진실 탐색 위해 눈과 귀 늘 열어놓겠다

카페 루카는 아늑했지만 음악은 좀 시끄러웠다. 차분히 분위기를 잡고 앉아 당선소감을 쓰고 싶었던 바람은 다소 빗나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깊은 내면에서부터 신이 났다. 한 해 동안 비교적 열심히 살았다. 나름대로 완성작이라 생각하는 소설을 세 편 썼고, 쓰다 버린 소설이 두 개 더 있다. 열정적으로 덤비다가 제풀에 꺾여 무기력증에 빠지다가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성경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 나는 늘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들 앞에서 의기소침했다. 그러나 성경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열 달란트로 불려놓은 사람만 칭찬하지 않는다.

두 달란트를 네 달란트로 불려놓은 사람도 똑같은 칭찬을 받는다. 사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빤히 보면서 내 손의 두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마음을 비울 수 있었을 때, 당선 소식을 들었다. 미학적 깊이를 담은 명작을 쓸 자신은 없다. 대신 삶의 진실과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눈과 귀를 늘 열어놓겠다.

주위에서 나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오래 소설과 함께 한 문우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행운이 내게 온 것은 내가 그들보다 인내심이 적고 조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내게 양보해준 그들에게 감사한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또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까다로운 성격에도 늘 곁에 있어준 부모님과 세 명의 자매, 남편과 아이들,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시편의 다윗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968년 서울 출생

▲성심여자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영문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졸업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명 : 우유
성 명 : 전윤희
조간신문과 함께 우유를 들고 들어오던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해. 우유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어.”

신문을 건네주고 아내는 식탁 위에 우유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워낙에 극성인 아내인지라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신문을 펼쳐 들었다. 아악! 갑자기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컵에 담긴 우유에 허연 덩어리와 노리끼리한 액체가 엉켜 있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누구 죽일 일 있어? 애가 먹었으면 어쩔 뻔했어.”

아내는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건우가 마실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내의 성난 팔꿈치에 차이기 전에 얼른 수상한 물체를 개수대에 쏟아 붓고 찬물을 세게 틀었다. 물컹거리는 덩어리는 몽글몽글한 작은 입자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분해되지도, 뽕뽕 뚫린 구멍 속으로 빠져 나가지도 않았다. 다시 물살을 세게 틀었으나 놈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지는 못했다.

역한 냄새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비가 오려는 듯 대기 중에 습기가 가득했다. 날씨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가는 한순간 개어 버렸고, 햇살이 따갑다가도 소나기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비가 오다 개다를 다섯 차례 반복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한쪽에선 거세게 비가 내렸고 다른 쪽에선 습기 찬 바람만 불고 말았다. 날씨의 변덕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날씨가 미쳐 버렸다고 말했다.

아내는 당장 대리점에 전화를 걸겠다며 고지서를 찾았다. 삼십 분 넘게 헤매다가 겨우 찾아낸 것은 지난달치 미납 고지서였다. 액수가 꽤 된다 싶어서 자세히 보니 그 전달의 액수와 합한 금액이었다. 도합 세 달이 밀렸던 것이다.

“아니, 왜 우유 값을 이렇게 밀렸어! 제때 내지 않고…….”

우유 값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불평을 한다는 것이 좀 마뜩찮아서 나는 한마디 했다. 그러자 아내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때맞춰 은행 가기가 그렇게 쉽니? 잊어버릴 수도 있고 바빠서 시간을 못 낼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이런 거지 같은 날씨에 오로지 우유 값 내자고 나가고 싶겠어?”

아내는 씩씩거리며 고지서에 나와 있는 번호를 따라 전화버튼을 눌렀다. 꽤 오랫동안 신호가 갔으나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는 눈치였다. 메시지를 남겨 놓으라는 자동응답기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내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돈 좀 늦게 냈다고 상한 우유를 넣는단 말이지? 당장 끊어버릴 줄 알아.”

그렇다고 일부러 상한 우유를 넣었겠냐고, 날씨가 이렇듯 더우니 우유가 상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아내는 양심에 찔려서 지레 흥분하고 있었다.

바캉스 짐을 꾸리면서도 아내는 생각날 때마다 대리점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후에는 이내 녹음된 테이프가 돌아갔다. 아내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출발 직전까지 아내의 전화는 계속되었고 수화기 건너편에선 침묵이 계속되었다. 현관문을 잠그기 전에 아내는 가스 밸브는 잠갔는지 창문은 모두 닫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고지서에 적힌 우유 대리점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우유를 넣지 말라고 메시지를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싫어. 직접 말할 거야.”

고집을 피우던 아내는 궁여지책으로 4절지 도화지에 ‘당분간 우유를 넣지 마시오’라고 써서 문 앞에 붙여놓았다. 글씨부터 쓰고 붙였으면 좋았을 것을. 문에 붙여진 종이에 쓰인 글씨는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아내는 마지막에 느낌표를 세 개나 찍음으로써 그 단호함을 표현했다.

차를 타고 동해로 가는 길에서도 날씨의 광기는 계속되었다. 와이퍼가 미처 쓸어내기도 전에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앞차가 켜놓은 비상등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 움직일 만큼 거세게 비가 쏟아지다가도, 터널 하나만 지나면 햇살이 반짝거렸다.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내는 중간중간 잠꼬대처럼 말했다.

“미쳤어. 미쳤어. 다들 정말 돌았나봐.”

흐린 여름날의 바닷물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해수욕장은 한적했고 그나마도 모래성이나 쌓고 있을 뿐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는 신이 나서 튜브를 몸에 걸고 바다를 향해 달려갔으나 발을 담가 보더니 곧 돌아섰다. 몇 번의 물웅덩이를 지나며 일곱 시간 가까이 곡예 운전을 한 결과치고는 빈약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바닷가에서도 아내는 연신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에게서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여기 화영아파트 304혼데요, 앞으로 우유 넣지 말아 주세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우유 넣지 마세요. 우유 값 계산해서 고지서 보내세요. 참, 어제 우유는 상해서 버렸으니 제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아내는 결국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에 승복했다. 그러나 결코 패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우유를 끊겠다는 의사를 단호한 음성으로 남겼다. 사실 그보다 확실한 처벌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는 더 이상 휴대폰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면 길거리에서 우유를 서너 개씩 나눠 주며 호객행위를 하는 새로운 대리점과 계약을 맺으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냄비세트나 요구르트 제조기 같은 꽤 괜찮은 사은품도 줄 것이다. 아내는 벌써 머릿속으로 뭐가 필요한지 주방의 수납장을 훑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우리는 해수욕을 포기하고 콘도 앞에 마련된 물썰매를 탔다. 썰매를 들고 언덕을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아서 나는 곧 지쳤지만 아이와 아내는 매우 즐거워했다. 아내는 우유 같은 건 벌써 잊은 얼굴이었다.

바캉스에서 돌아온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푼 우유팩 네 개가 문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집을 비운 지 정확히 4일째였다. 건우가 걔 중 가장 덜 부푼 것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이건 날씬하다.”

“너 당장 내려놓지 못해!”

아내의 날카로운 소리에 나는 아이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았다.

“가져다 버릴까?”

“버리긴 어디다 버려? 거기다 그대로 놔둬. 지들이 가져가게. 증거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나는 들고 있던 우유를 다른 세 개의 터질 것 같은 우유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바야흐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전화도 받지 않는 우유대리점과 아내 사이의. 나는 그들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에서 불꽃이 파다닥 튀는 것을 목도했다.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화기부터 들었다. 신호가 열 번쯤 가고 난 후에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뭐예요?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아내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나는 건우를 데리고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폭염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좀처럼 잠도 자지 못했고 식욕이 없어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았지만 창밖의 날씨도, 방안의 공기도 후텁지근하긴 마찬가지였다. 선풍기를 틀어도 더운 바람만 불어왔고 에어컨도 가동되는 동안에만 시원할 뿐, 전원을 끄는 순간 바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나마도 전기 값을 염려하는 아내의 눈치가 보여 맘대로 틀 수도 없었다. 도대체 더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집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TV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TV에서는 연일 사건 사고가 쏟아졌다.

“자식들, 덥지도 않나? 사고를 치려면 좀 선선해진 다음에나 치지.”

7년간 동거했던 여자를 변심했다는 이유로 토막살해를 한 남자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의 기사를 들으며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아내가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저랬지? 그녀를 힐끔거리다가 나는 아내가 변하는 것도, 우유대리점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도 모두 죽 끓듯이 변하는 날씨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유 배달부가 찾아왔다. 하필이면 아침 뉴스에서 패륜아가 복면을 쓰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사건 현장을 재연하는 광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벨이 울리자 건우가 쪼르륵 달려갔다. 건우는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부터 열었다.

“엄마 계시니?”

현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누구시죠?”

“우유 바꿔 드리러 왔습니다.”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마른 체구에 키만 비죽하니 컸다. 양미간이 좁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그런지 인상도 내성적이고 소심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1000㎖짜리 우유가 다섯 개 들려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려는 찰나에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가 내 손을 가로막았다. 아내의 품에는 네 개의 터질 것 같은 우유가 들려 있었다. 아내는 그 애물단지들을 그의 발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필요 없어요. 우린 다른 회사 우유를 먹기로 했어요. 고지서는 가져왔나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내와 나를 그리고 건우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우리 가족을 스쳐갈 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인상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공포를 느꼈다.

“주인 아저씨가 안 계셔서 메시지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주인이 아니면 댁은 누구죠?”

“우유 배달하는 알바생이에요.”

“주인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을 보내? 다 필요 없으니까 고지서나 보내라고 해요.”

아내가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유 배달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왠지 그가 건우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다.

그날 오후 아내는 새로운 대리점과 1년 계약을 맺었다. 아내의 손에는 플라스틱 어린이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아내가 책상과 의자를 물걸레로 닦아주자마자 건우는 자리를 잡고는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아내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좀 참지,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나는 왠지 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TV를 켰다. 9시 뉴스에서는 변심한 동거녀를 죽인 남자와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죽인 폐륜아의 기사가 또 나왔다. 이번에는 폐륜아의 누나가 나와서 그 애가 얼마나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였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열했다. 온몸에 다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제야 왜 우유배달 아르바이트생을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유 배달부가 입고 있는 노란색 바탕에 해골무늬가 그려진 티셔츠와 똑같은 티셔츠를 그 폐륜아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짧은 머리스타일과 체구도 비슷했다.

“이봐, 저 사람 그 아르바이트생하고 느낌이 비슷하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왜 옷도 같은 거잖아, 해골무늬가 있는 노란색 티셔츠.”

“그랬나? 생각 않나.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아내는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드라마 볼 시간이라며 채널을 돌려버렸다. 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게 드라마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 문밖의 주머니에는 새로운 상표의 우유가 들어 있었다. 만족스런 얼굴로 우유를 꺼내던 아내는 이전의 대리점에서 보낸 고지서를 발견했다. 그것 또한 아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아내는 달력을 넘겨가며 날짜를 셌다. 혹시 잘못 셌을까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그어가며 다시 셌다. 그러고는 전자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갔다.

“이 사람들이 상한 우유까지 모두 계산에 넣었어. 나를 아주 우습게 봤나본데 누가 돈을 낼 줄 알고?”

아내는 대리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쪽에선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남기라는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내도 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정신이 아니었던 게다.

“이봐요, 계산이 틀리잖아요. 상한 우유 값까지 내란 말인가요? 제대로 된 고지서를 가져올 때까지 우유 값을 내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요.”

아내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자동응답기를 틀어놓고는 상대방의 흥분된 목소리에 신이 나서 킥킥거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전화를 안 받겠다 이거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아?”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는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상대는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지고는 못 배기는 아내의 성격에 속이 얼마나 끓을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 건우는 무사할까. 나는 애틋한 마음으로 건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그러나 퇴근 후 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표정은 꽤 밝았다.

“잘 해결됐나 보지?”

“방법을 찾아냈지. 내가 누구야.”

“새로 고지서가 온 게 아니고?”

“곧 올 수밖에 없겠지. 내일까지 새 고지서를 보내지 않으면 돈을 단 한푼도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단지 내 인터넷 사이트에 고발해버릴 거라고 협박했지.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우리 단지 가구수가 몇인데 지들이 버틸 수 있겠어?”

아내는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으나 나는 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당연하지, 그런 놈들은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해.”

다음날, 우유 주머니에는 1000㎖짜리 우유가 두 통 들어 있었다. 새로운 대리점으로부터 하나, 먼저 번 대리점으로부터 하나. 아내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새로운 대리점의 우유만 가지고 들어왔다. 출근길에 문 밖에 놓여 있던 우유는 퇴근길에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단지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었다는 것이 달랐다.

“고지서에 있는 금액을 다 내지 않으면 우유를 끊을 수 없다는 거야. 말이 돼?”

그러나 그들은 아내의 협박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우유가 배달되었다. 아내는 집 안으로 우유를 들여놓지 않았다. 우유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져서는 당당하게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해골무늬 노란티셔츠의 청년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몇 번 마주쳤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잦았다. 그를 처음 마주친 것은 24시간 편의점에서였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꺼내다가, 컵라면이 쌓여 있는 진열대를 그가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술에 좀 취해 있었다. 그를 보자 팔뚝에 소름이 돋으면서 술이 확 깼다. 그다음 그를 본 것은 지하철에서였다. 출근 길 지하철 안은 꽤 복잡했으나 나는 그가 입은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를 금세 식별했다. 그는 야구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자 밑으로 그의 소심한 눈이 번뜩이며 내 동향을 좇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불안했다. 건우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 오는 길에도 멀찍이서 노란색 티셔츠가 지나가는 것을 언뜻 보았다. 나도 모르게 건우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불안에 떠는 사이, 아내는 분주히 움직였다. 아내는 아파트 주민용 인터넷 사이트에 ‘당신의 아이가 먹는 우유 이래도 됩니까?’라는 제목으로 사연을 올렸다. 처음 상한 우유가 들어온 것부터 바캉스 기간 내내 상한 우유가 쌓여간 것이며, 이제 아예 상한 우유 값까지 내라고 협박을 하는 얘기를 구구절절이 남겼다. 그리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의 사진을 찍어서 첨부했다. 단지 우유 값을 연체한 얘기만 건너뛰었다.

안타깝게도 아파트 주민용 사이트의 방문자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 홈페이지에 열중하느라 그런 사이트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인터넷을 들락거리던 아내는 전화통을 붙들기 시작했다.

“민주 엄마,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 우리 아파트 사이트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지? 자기, 신문은 보고 사냐?”

“승준 엄마? 아파트 사이트에 내가 글 올려놨으니까 지금 당장 들어가 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좀 알려. 이건 정말 생명이 달린 중요한 얘기야.”

“반장님, 사실 이런 일은 반장님이 앞장서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세상 무서워서 애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사람들은 우리 단지에 발을 못 들여놓게 해야죠.”

통화의 효과는 생각보다 빨리, 강하게 나타났다. 아내가 아는 사람들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들과 또 그들이 아는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여자들은 모두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그런 악덕 업체는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을 뭘로 본 것이냐. 평수가 큰 건너편 동아 아파트였다면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으로 저지른 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나도 그 우유 먹였는데 당장 끊겠다……. 소문은 들었으나 컴맹이라 인터넷에 댓글을 달 수 없는 사람들은 아내를 찾아와 함께 울분을 터뜨렸다.

언제까지나 탄탄할 것 같던 동맹은 삼일이 못 가서 깨어졌다. 새로운 댓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이전에 있던 댓글마저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을 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혼돈의 빛이 역력했다. 단지에서 만난 이웃들은 아내를 슬슬 피하기까지 했다. 아내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것은 집집마다 배달된 산세베리아 화분이었다. 집 안 공기를 청정하게 해준다잖아, 라고 윗집 사는 민주 엄마는 얼버무렸지만, 눈치 빠른 아내가 산세베리아의 출처를 모를 리 없었다.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그러게, 왜 우유 값을 제때 안 내, 라며 아내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대리점은 잃을 뻔했던 고객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없던 고객도 따냈던 것이다. 인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던 아내는 마침내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소비자고발센터는 괜히 있는 줄 아나보지!”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의 냉면집에서 나는 또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의 남자를 보았다. 박 대리와 함께 냉면을 먹는 동안 계속해서 그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요, 과장님, 브루스 리, 이소룡도 말입니다. 한참 정상가도를 달리던 그가 왜 서른두 살에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죽느냔 말입니다. 의사가 밝힌 사망 원인은 그가 두통약으로 먹은 에콰제식의 성분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른 의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잖아요. 홍콩을 비롯해 전 세계 무예계에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지요. 게다가 이소룡이 죽기 몇 달 전부터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도 돌았다니, 음모론이 나돌 만하지요.”

“음모? 그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는 건가?”

나는 박 대리가 말한 ‘음모’란 단어에 솔깃했다. 그러고 보니 박 대리는 오늘 따라 음모에 대해 유독 관심을 보였다. 주문을 하기 전부터 냉면을 먹으면서도 쉬지 않고 메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위로 떠도는 갖가지 음모들을 침을 튀기며 늘어놓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1970년대에 트라이어드 같은 중국 범죄조직의 범행이라는 것이죠. 그치들은 홍콩의 영화배우들에게서 보호 명목으로 돈을 뜯어냈는데 이소룡은 이런 요구를 과감히 거절한 것이죠. 그 때문에 괘씸죄로 찍혀 독살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박 대리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를 슬쩍 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는 핏물처럼 빨갛게 범벅이 된 비빔냉면을 먹고 있었다. 유령처럼 예기치 않은 장소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가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 그가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그날 따라 냉면집의 에어컨은 너무 세게 가동되었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물냉면의 국물을 한 모금 마시자 이가 딱딱 부딪혔다.

아르바이트생인 그 청년은 아내로 인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을지도 몰랐다. 손해액을 변상하라거나,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급여를 줄 수 없다고 협박을 당했을지도……. 그 뻔뻔한 대리점 주인은 그딴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상한 우유의 값까지 계산해서 보낸 사람이 아닌가. 그 순간 왜 갑자기 폐륜아의 누나가 한 말이 떠올랐을까. 그녀는 그 애가 얼마나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였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열했다. 홧김에 그 소심하고 평범해 보이던 아르바이트생이 범죄를 저지르면 어쩌나…….

이쯤 되자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와 마주칠 것만 같았고 화장실을 갈 때도 왠지 불안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그가 잠복해 있다가 내 눈 앞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상상되기까지 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에 그가 들어오지 않으면 안심하다가도, 어디선가 몰래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해코지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불안해졌다.

그가 건우나 아내의 근처를 얼씬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가 건우의 얼굴을 본 것이 꺼림칙했던 기억이 났다. 부모의 직감이었을까?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건우가 올 시간이 다 됐는데. 나도 모르게 거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옆자리의 박 대리가 나를 힐긋 보았다.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부재중이니 다음에 다시 걸어 달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처가에 전화를 걸었다. 처가에도 처형의 집에도 아내는 없었다. 아내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심장이 점점 빨리 뛰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우유팩처럼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외출을 신청했다. 회사를 나오면서도 누군가 나를 미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맘 같아서는 건우가 다니는 유치원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혹 미행이라도 당한다면 더 위험해질 것 같아 집으로 갔다.

문 앞에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분노에 가득 찬 우유가 일곱 개나 모여 있었다. 언젠가 저것들이 폭발해 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내 몰래 가져다 변기에 쏟아 넣고 물을 내려버릴까. 회오리처럼 빠져나가는 물줄기 속으로 뭉텅이진 카제인 덩어리도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굴도 모르는 대리점 주인만큼이나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의 청년만큼이나 아내도 낯설고 두려웠다.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집 안이 엉망이었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이 뚜껑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초파리들이 새까맣게 앉았다가 부스스 날아갔다. 내가 아침에 보았던 신문도 거실 바닥에 그대로 흩어져 있고 건우가 가지고 놀았을 블록도 발에 밟혔다. 아내는 들쭉날쭉한 날씨와 문밖에 쌓여가는 우유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도무지 살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리는 좀 하고 살지. 나는 블록을 집어서 바구니에 넣다가 문뜩 이곳이 사건의 현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나는 집어들던 블록을 다시 내려놓고 살금살금 걸어서 안방 문을 열었다. 누가 왔다 간 흔적처럼 침대 위에는 아내의 옷이 여러 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건우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건우의 방은 평소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다시 아내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도록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나는 건우의 유치원에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번호를 몰랐다. 아내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을 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유치원에서 받아 온 유인물도 어디다 두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접 찾아가볼 수밖에 없었다. 막상 찾아가려니 마음이 급해져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 밖을 나오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 계단 어디에서 그가 나를 지켜볼까봐 염려가 되었다.

다행히 건우는 유치원에 있었다. 동화책을 읽고 있는 선생님을 둘러싼 아이들 사이에 건우도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러나 지하철 역사에서 노란 티셔츠를 발견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졸아들었다. 다시 보니 노란색 티셔츠의 주인은 긴 머리 여학생이었다. 가슴팍에 해골무늬도 없었다. 한적한 오후의 지하철에서도 우유 배달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빈 의자를 찾아 앉아 숨을 돌렸다. 시원한 냉방이 땀을 말끔하게 식혀 주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들의 싸움에 말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전화했었어?”

“도대체 어디 갔었어?”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었다.

“말도 마. 아침부터 얼마나 바빴다구. 소라 엄마가 구청에서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강연이 있다고 해서 갔다 왔지. 전문가한테 두 시간 동안이나 강연을 들었다구. 필기까지 해가면서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알아? 이제 걔들은 다 죽었어.”

아내의 빠르고 높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쏟아졌다. 나는 아내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녀와 나는 동갑인데 나만 부쩍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거리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더운 날이었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 누군가 내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해골무늬 노란티셔츠였다.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과장님, 왜 이렇게 놀라세요?”

박 대리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해골무늬 노란티셔츠를 가리켰다.

“저, 저 해골무늬…….”

“과장님, 모르셨어요? 저 옷 요즘 젊은 애들 사이에서 뜨는 디자인이잖아요.

박 대리의 말을 듣고 보니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쪽에도, 저기 저쪽에도 해골무늬 노란색 티셔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을 하고 무심하게 나를 지나쳐 갔다. 간신히 버티고 섰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박 대리의 팔을 붙잡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내는 인터넷의 소비자보호센터에 사연을 올렸다. 억울한 심정이 신파적 언어로 잘 드러난 길고 긴 사연 아래에는 비교적 짤막한 답변이 달렸다. 〈소비자 분께서 주장하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하나 증거불충분으로 중재가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 한 답변치고는 너무 짧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담원은 처음엔 양자 간에 말로 잘 해결해 보라고 타이르다가, 아내가 꺾일 기세가 아니자 미친개에게 물린 셈치고 그냥 빨리 잊어버리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고는 상담원이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자, 아내는 구청에서 주워 들은 것은 있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선 중간에서 합의가 된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느냐,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느냐며 핏대를 올렸다. 아내가 전화를 하는 내내 나는 분쟁이 소비자와 소비자고발센터로 옮겨가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결국 아내는 대리점에 시정경고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리점에서 사과 전화가 오길 기다리던 중, 나는 예기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아내와 건우는 자축파티를 위해 케이크를 사러가고 없었다.

“경호회사 하이에나 시큐리티의 경호팀장 강준구입니다. 근래에 속 썩은 일이 있으시죠?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잡음 없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음산할 정도로 낮았다. 스포츠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새까만 선글라스까지 쓴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떻게 우리 집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을까? 소비자고발센터에 고발한 내용이 빠져나간 것일까?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못했다. 단지, 좀 생각해 본 후에 연락을 하겠다는 말만 했다.

“연락 주시면 고객님의 마음과 뜻과 목숨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여운을 남기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사라지자, 착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사람이 내게 접촉을 해온 것하며 목숨을 지켜 주겠다는 과격한 말까지 남긴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일이 너무 커져 가는 것에 대해 나는 두렵고 화가 났다. 아내가 돌아오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에 대해 따질 생각이었다.

아내를 기다리며 거실을 서성이는 동안 생각은 점점 바뀌어 갔다. 여차하면 나는 그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아내는 요즘 들어 종종 내게 불만을 표시했다. 강 건너 불 구경한다며 나의 태만함에 대해 화를 내기도 했고, 뭐가 그렇게 겁나냐며 경멸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해골무늬 노란 티셔츠 때문에 두려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그 같은 공포를 이용해 대리점 주인을 혼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섣불리 경호팀장이라는 남자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최신무기라도 하나 감추고 있는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전세(戰勢)는 역전되고 있었다.

삼일이 지나도록 대리점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우유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소비자고발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서류를 확인해 보더니 시정경고를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원하신다면 다시 한 번 시정경고를 할 수는 있지만,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이상 어떤 조치도 불가능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검색버튼을 누르고 하이에나 시큐리티를 입력하자 경호회사의 전화번호가 액정화면 위로 떠올랐다. 출근길에, 나는 대리점을 찾아갔다. 대리점 앞에 있는 커다란 초록색 플라스틱 통들 안에는 크고 작은 우유팩들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동굴 속을 탐사하듯 쌓아 올려진 우유팩들 사이사이를 지나가자, 대리점 안쪽 깊숙한 곳에 주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은 얼핏 보면 인자한 인상으로까지 보였다. 그의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어둑어둑한 공간에서도 반짝였다.

“어떻게 오셨지요?”

그가 나를 힐긋 보며 말했다.

“소비자고발센터에서 경고조치를 받으셨을 텐데요.”

나는 되도록 목소리를 낮게 깔고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은 흡사 경호팀장의 말투와 비슷했다.

“글쎄요, 제가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해서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 그는 말끝을 흐렸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라고 말하며 책상을 한번 쾅 내리칠 참이었다. 그때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으로 테두리까지 입힌 명함에는 분명 하이에나 시큐리티라고 적혀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지갑을 열었다.

“진작 그러실 것이지. 우유는 기어코 바꾸실 건가요?”

상한 우유뿐 아니라 오늘 아침에 들어온 우유의 값까지 모두 합한 돈을 세면서 대리점 주인이 말했다. 그의 느물거리는 웃음을 보며 나는 그가 새로운 우유에 독극물이라도 집어넣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이번에는 1년 계약이라 어쩔 수가 없고요, 대신 그 계약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지요. 근데 믿어도 되겠죠?”

“가계약이라도 할까요?”

“뭐, 그러실 필요는 없고 일단 믿어보지요. 아저씨는 경우가 바른 사람인 것 같구먼.”

그는 옆에 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통에서 200㎖ 우유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차가운 우유팩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저, 상한 우유 값은 제한 금액으로 영수증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아내가 알면…….”

“하하, 역시 현명한 남편이십니다.”

그는 흔쾌히, 영수증에 힘을 주어 금액을 적고, 사인을 했다.

대리점을 나오자 햇살이 따가웠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을 닦았다. 하얀 손수건에 누르스름한 얼룩이 생겼다. 몇 걸음 걷고 나니 갈증이 일었다. 들고 있던 우유를 열었다. 파란색 우유팩 속에서 찰랑거리는 순백의 우유를 보는 순간, 훅! 구역질이 넘어왔다. 여름은 끝없이 이어질 듯했다.

〈끝〉

◇그림 = 화가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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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세계07)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24

작품명 : 혀
 성 명 : 김희진
 
 
 
<심사평> 김윤식·서영은

예심에서 넘어온 작품은 ‘인형풍경’(신명희), ‘낙서족’(이효정), ‘혀’(김희진), ‘사각지대’(박윤주), ‘실어증에 대한 소고’(이종태), ‘내 피에는 설탕이 많아’(김성순), ‘색’(이희진), ‘쥐덫’(장정옥) 등 모두 8편.
전체적으로 보아 작품의 소재와 내용의 다양성이 돋보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색’과 ‘혀’.

 
 
‘색’. 염색업을 하는 독신녀의 내면을 다룬 것. 이 작품의 특이성은 섬세한 여성적 색채감각과 그 저 너머에 있는 삶의 덫을 그려낸 점. 누구나 삶의 덫이 있는 법이지만 이 작품의 그것은 알비노(백색증)의 체질과 출생 비밀에서 왔다. 아쉽게도 이 두 연결점이 미진해보였다.
‘혀’. 이 작품의 중심 문장은 ‘불길한 징조처럼 보였다’이다. 작중화자인 벙어리 청년 ‘나’가 관찰하는 불길한 징조란 무엇이었던가.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들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혀를 잃어간다는 것. 입에서 빠져나온 혀들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현상을 다룬 이 작품은 우화적 수법과 어울려 말이 가벼워진 오늘의 세태를 유려하게 드러내었다.

 
 
 
작품명 : 혀
 성 명 : 김희진
 
 
 
내 글의 모든 결정권이 내 손안에 있듯, 내 인생 또한 내 맘대로 써 내려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난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고, 전 세계를 맘껏 여행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한 나라의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불행은 나를 피해 가고, 슬픔도 이별도 실패도 없는 인생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글 밖에서의 나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컨트롤 돼야만 하는 인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하고, 암흑의 구렁텅이에 빠져야 하고, 온갖 고통의 연속에 살아야 하는 게 나인 것이다. 비록 내 삶은 내 맘대로 써지진 않을 테지만, 내가 써온 글과 앞으로 써야 할 글들은 내 삶을 조금 웃게 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이들까지도.
이제 들어와도 된다고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려는 걸까. 마침 나는 손발이 꽁꽁 얼어가던 차였고, 그 문 너머의 세계가 몹시도 궁금하던 차였다. 지금 문턱에 서 있는 나는, 다만 내 발로 그 문을 박차고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휴지조각이 될 뻔한 내 글을 휴지통에서 건져 올려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76년 광주 출생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작품명 : 혀
성 명 : 김희진
식탁은 시끄럽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떠먹는 건 밥이나 국이 아니다. 찌개도 아니고 형형색색의 반찬도 아니다. 그들은 매일 널따란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집어먹는다. 유아기 때부터 익혀온 능숙한 수저질로 수많은 말을 집어먹느라 정신없는 그들. 그들 틈에서 나는 늘 혼자다.

그들은 결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탁에 모이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혀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식탁에 모인다. 내 눈엔 분명 그렇게 보인다. 음식물을 골고루 섞어 맛을 음미하는 동시에 연속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그들의 혀. 음식물 섭취에 필요한 혀와 말하는 데 쓰이는 혀가 다르다는 듯, 그들은 두 개의 혀를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먹으면서 끊임없이 말을 한다. 말을 못하는 너를 대신해서 우리라도 지껄여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식탁에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 중 아버지라는 사람이 잠시 수저질과 얘기를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한다. “오늘은 왜 그렇게 말이 없니?” 그들은 가끔 내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자기들끼리 수다란 수다는 다 떨며 식사를 하면서 예의 없이 나보고는 왜 말이 없냐고 묻는다. 잠시 동안이지만 나는, 내가 벙어리가 아니라 단지 말수가 적은 스무 살의 청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입에서는 외마디 소리 하나 나오지 않는다. 짜증이 난 나는 시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어요,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말없이 다시 수저질을 한다.

그림 석철주

오늘 식탁에 모인 그들의 혀에 걸려든 사람은 옆집에 사는 ‘마녀’다. 단지 매부리코를 가졌다는 이유로 옆집 노파는 이사온 지 열흘 만에 마녀가 돼버렸다. “자식들이 꽤 잘된 모양이야. 그러니까 저런 큰 집에서 혼자 살지.” “고집은 되게 세 보이던 걸?” “늙으면 느는 건 주름하고 고집뿐이라니까. 당신도 그렇잖아. 아버님 어머님은 또 어떻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어머니를 쏘아본다.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노인네가 무슨 놈의 향수를 그리 뿌리고 다니는지,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였어.” “너도 맡아봤니? 싸구려 향수 같진 않던데?” “저런 할망구가 옆집으로 이사 올 게 뭐야.” “왠지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식탁 위에 올려진 옆집 마녀는 그들의 혀와 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잘려 나간 옆집 마녀는 점점 해체돼 가더니 식사가 끝나갈 즈음에서야 그들의 식탁에서 사라진다. 저렇게 얘기를 하고도 그들의 밥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나는 마냥 신기할 뿐이다. “근데 넌 정말 저 마녀 집에 피아노 쳐주러 갈 거니?” 누나가 내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엄청 괴팍스런 여자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갈 거야?” 형이 다시 한번 묻는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혀의 저주 같은 말, 말, 말들. 세상이 어지러운 건 그놈의 혀와 혀가 뱉어내는 말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만의 조용한 식사는 오늘도 이렇게 끝이 난다.

*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들을 수는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종종 귀를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내가 밤마다 귀를 틀어막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다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암흑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세계. 온갖 소음이 사라진 태초의 세계. 그런데 그런 생각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잠잠해진다. 이 세상에 하모니의 결정체인 음악이 없었다면 나는 귀가 열려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피아노 앞에 앉힌 건 어머니였다. 말을 못하는 내게 손쉬운 인생을 안겨 줄 사물은 피아노뿐이라고 생각한 어머니. 어머니의 탁월한 선택 덕에 나는 손가락이 나의 언어이자 감정이고 표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넌 반드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돼야 해. 그게 니가 살길이야. 넌 피아노 교습소도 차릴 수 없잖아. 그러니까 일류가 아니면 안 돼!” 어머니는 피아니스트가 못 되면 꼬마 아이들이나 가르치면 되지, 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훌륭한 일류 밥벌이로 성장해야 했다. 하지만 내겐 대개의 일류 음악가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던 그 천재성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게 필요한 건 피나는 연습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친구는 오로지 피아노뿐이었고, 나의 언어는 피아노 소리였으며, 피아노만이 내 미래의 생계 수단이었다.

마녀는 내 피아노 연주가 꽤 맘에 드는 눈치다. 내 연주가 시작되면서부터 마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놀려대던 혀를 입속에 뭉개고 있다. 혹시 마녀가 내게 또 말을 걸까봐 나는 연주에 심취한 듯 한 번씩 눈을 감아준다. 날카로운 마녀의 목소리는 꽤나 신경에 거슬렸다.

첫 대면 시 마녀는 우리 집 한 끼 식탁에 모일 법한 말을 혼자서 쏟아 냈다. 자식들과 죽은 남편에 대한 얘기, 오랜 세월 간직해온 버릇과 좋고 싫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얘기 등 끝이 없었다. 마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마녀는 말을 못하는 나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내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마녀는 내가 해야 할 말까지 찾아내느라 더욱 부지런히 혀를 놀려야 했다. 나와 마녀 간의 의사소통은 의외로 쉬웠다. 마녀는 뭐든 내게 질문을 던졌고 내가 해야 할 대답을 마녀 스스로 찾아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나이는 몇 살인가? 스물 둘?” 그러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스물 하나?” 나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스무 살이겠네.” 나는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말을 못하게 된 거야?” 마녀는 내 표정을 보더니 단번에 쯧쯧쯧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그래서 피아노를 가르친 거로군. 뭐 그다지 나쁜 선택 같진 않네. 근데 돈은 벌어서 뭐하게? 사고 싶은 거라도 있나보지?” 내가 바로 고개를 가로젓자 마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모양이야. 암,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외국으로 나가야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녀는 뭐든지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녔다. 사람에 대한 통찰력은 점쟁이 수준에 가까웠다.

나는 집에서도 모자라 말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 좀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사실 이만한 아르바이트도 없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가면 되니 내겐 몸에 딱 맞는 아르바이트였다. 보수는 마녀가 자기 집 울타리에 써 붙여놓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내 연주 실력을 보고 난 마녀는 보수를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이 정도 돈으로 살 순 없지. 난 도둑년이 아니거든.” 어머니의 혜안대로 피아노는 나의 좋은 밥벌이가 돼 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 연주에 푹 빠져 있던 마녀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난다. 자신의 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내게 다가온다. “내 혀가 이상해. 학생, 잠깐 내 혀 좀 봐줄 테야?” 나는 잠시 연주를 멈추고 근사한 그랜드 피아노에서 일어난다. 마녀는 내 얼굴 앞으로 혀를 잔뜩 늘여 빼고는 “에!” 하고 소리를 낸다. “혀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나? 혀에 있는 기운이 몽땅 빠져나간 것 같은 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혀에 이상 징후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백태가 낀 것처럼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 말고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혀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게 왠지 느낌이 이상해.” 마녀는 손으로 혀를 비틀고 꼬집어본다. 나는 혀가 아무렇지 않다는 뜻을 또 한번 전달하기 위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마녀를 위한 연주를 계속한다. 마녀는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어 입 안 가득 털어 넣는다. 잠자고 있는 혀를 깨우려는 듯한 몸부림에 웃음이 나온다. 나처럼 말을 못하게 될 일도 없을 텐데, 마녀는 지나치게 호들갑이다. 마녀는 정말로 말을 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있는 건 아닐까. 태어나 한번도 말을 해보지 못한 나는 말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마녀의 지금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마녀는 얼음을 입에 물고 소파에 눕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마녀는 마치 지휘자라도 되는 양 한쪽 팔을 허공에 휘젓는다. 이 연주가 끝나고 나면 마녀는 또 나를 붙들고 무슨 말이든 하려 들 것이다. 칠십 년 넘게 살아온 마녀에겐 칠십 년만큼의 얘깃거리가 있다. 아, 세상엔 왜 말이라는 게 생겨난 걸까.

*

길 건너 앞집 지붕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피아노 연습 중이던 나는 창가로 다가가 얼굴을 내민다. 앞집에는 철학 교수가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저 고양이를 철학자의 고양이라고 부른다. 철학자의 고양이는 집에서 양육됐지만 하는 짓은 꼭 들고양이 같았다. 집에 충분한 먹거리가 있음에도 저 고양이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지금처럼 지붕에 앉아 있거나 밤마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배회하기도 했다. 도둑고양이처럼 지붕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혼내주기 위해 철학자는 매일 밖으로 나와 돌멩이를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장 내려오지 못해! 망할 놈의 고양이. 넌 들고양이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가 순순히 지붕에서 내려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양이는 상관하지 말라는 듯 철학자를 향해 앙칼지게 야옹댔다. 철학자와 철학자 고양이와의 신경전은 그래서 늘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철학자가 집에서 나온다. 철학자는 들고 나온 두꺼운 책으로 챙을 만들어 햇빛을 가린다. 키가 작은 철학자는 까치발을 들고 지붕을 올려다본다.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철학자는 지루하게 두꺼운 책만 읽는다. 철학자의 고양이는, 수많은 관념들로 들어차 있을 것 같은 저 두꺼운 책에 머리를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철학자가 돌멩이를 주워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향해 던진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썩을 놈의 고양이 앞으로 밥을 주나 봐라.” “다신 집에 못 들어오게 할 거야.” “너 같은 놈은 벼락 한번 맞아 봐야 해.” “그럴 바엔 아예 집에서 나가버려.” 고양이에게 그렇게 많은 독설을 퍼부어대던 철학자가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다. 고작 한숨만 짓고 말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집 아침 식탁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옆집 마녀 집에 다녀온 뒤라 적어도 마녀에 대해 물어봤을 식구들이 하나같이 조용했다. 모두들 말하는 데 지쳤다는 표정으로 나처럼 조용히 식사를 끝냈다. 처음엔 식구들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십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혼자 말없이 밥을 먹어야 하는 나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식사 예절이 뭔지 알게 된 것 같아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조용한 식탁은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설마 그렇다고 그 조용한 분위기가 오늘 저녁 식탁에까지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십 년 넘게 이어온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었다.

돌멩이에 맞은 철학자의 고양이가 털을 곧추세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양이는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반대편 지붕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때서야 철학자가 입을 벌린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목을 부여잡고 소리를 내지르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은데도 소용이 없다. 이 삼복더위에 목감기라도 걸린 걸까? 왜 그러시냐고 물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철학자가 날 쳐다봐 준다고 해도 나는 철학자와 대화를 할 수 없다. 우리 집 식구들 말고는 이 동네에서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말이 나오지 않는 철학자의 모습은 무척 답답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도 저렇게 답답해 보이겠지?

*

불길한 징조처럼 보였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식탁이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과 이 집에 있는 널따란 식탁에 매일같이 모이는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었다. 나 보란 듯 예의 없이 떠들어대며 식사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한 걸까. 나한테 시위라도 하는 걸까. 조용한 식탁이 얼마나 숨막히고 음식 맛을 떨어뜨리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시끄러워서 밥을 못 먹겠다는 내 마음속 푸념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걸까. 이때 다행스럽게도 누나가 말을 한다. “요즘 내 혀가 좀 이상해. 혀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야.” 마녀가 했던 말을 누나가 똑같이 한다. “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런데.” 덩달아 어머니가 맞장구를 친다. 이어서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모두 맞장구를 친다. “설마 이 젊은 나이에 혀에 암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누나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진다. “아무리 재수대가리 없는 집안이라도 온 식구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리기야 하겠니?” 아버지가 누나의 방정맞은 생각을 잠재운다. 아버지를 거들어 나는 수저를 놓고 누나에게 수화로 말한다. ‘옆집 마녀도 그러던 걸? 자기 혀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누나처럼 혀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그랬어.’ 내가 먼저 마녀 얘기를 꺼내자 식구들은 그제서야 마녀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식구들의 혀가 다시 활기를 찾은 것 같아 불길한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

나는 마녀 집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조목조목 얘기한다. 손을 움직이며 얘기해야 하는 터라 밥은 먹을 수가 없다. “정말 재수 없는 여자구나.” “고고한 척하기는.” “별로 친구하고 싶지 않은 할망구야.” “날카로운 목소리일 것 같더라니까.” “저 마녀 때문에 우리 혀가 이상한지도 몰라. 봐, 내가 왠지 불길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말을 하는 식구들의 이마에서 일제히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에어컨디셔너는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식구들에게 왜들 그렇게 땀을 흘리는 거냐고 묻는다. “모르겠어. 말하는 게 힘들어. 할아버지도 그러세요?” “좀 그렇구나.” “혹시 이 동네에 이상한 전염병 같은 게 도는 건 아닐까? 성대나 혀에 침투되는 바이러스 같은 거 말이야.” 형이 힘겹게 말을 한다. “저 마녀가 원흉이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꾸나. 솔직히 우린 밥 먹을 때 너무 말이 많았잖니.”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식탁은 다시 조용해진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식탁에서의 나는 외롭지 않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올라간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는다. 고요한 세계로 막 빠져들려는 순간 누나 방에서 비명소리가 난다. 이어 엄, 엄마!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각자 제 방에서 달려나온 식구들이 누나 방으로 올라온다.

누나가 거울 앞에 머리를 움켜쥐고 서 있다. “내 혀가 없어졌어! 내 혀가 안 보인다구!” 어머니가 누나가 벌린 입속을 들여다본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데.” “아니야 없어.” 누나가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본다. “어? 이상하다. 분명 혀가 사라지고 없었는데.” “강박증 때문일 거야. 혀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망상까지 하게 되는 거라구.” “정말 혀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현석이처럼 말을 못하게 되겠지?” 누나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떠는 누나를 위해 말을 못해도 불행한 건 하나도 없다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혀가 사라졌으면 온 식구들이 몰려올 정도로 누나가 비명을 지를 수 있었겠어? 엄마, 라고 외칠 수나 있었겠냐구.’ 내 말에 누나가 진정하는 눈치다. 식구들은 누나의 엉뚱한 환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고요한 밤이다. 식구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귀뚜라미와 매미 울음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온다.

*

마녀의 집에서 두 시간째 피아노를 치고 있는 중이다. 컨디션이 안 좋은 마녀는 연주를 더 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마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 마녀의 입을 가리키며 좀 어떠냐는 제스처를 내보였다. 마녀는 더 심해졌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식구들도 그렇고 마녀도 그렇고 철학자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옆집 밤무대 가수의 노랫소리를 들어본 지도 오래된 것 같았다.

내리 두 시간째 소파에 누워 있던 마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녀가 힘겹게 말을 한다. “학생, 저기 좀 봐.” 마녀가 손으로 바깥을 가리킨다. 공중에 이상한 것들이 떠다닌다. 그럴 리는 없지만 붉은색 타원형을 한 그것들은 마치 혀처럼 보인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마녀는 예수가 내려보낸 성령이라며 놀라워한다. 마녀는 즉시 맨발로 뛰쳐나가더니 잔디밭에 엎드려 절을 한다. 마녀 뒤를 쫓아 나도 연주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다. 마녀 말대로 진짜 성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오싹해진다. 이때 한 차례 절을 하고 일어선 마녀의 입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그러더니 그것 또한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역시 붉은색 타원형이다. 방금 마녀 입에서 빠져나간 것을 마녀도 봤을까? 다급한 마음에 바지 뒷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든다. 수첩과 펜은 수화를 알아먹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늘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다. 나는 수첩에 방금 저거랑 똑같이 생긴 게 입에서 빠져나갔는데 보셨어요? 라고 쓴다. 마녀는 약간 겁에 질린 듯 양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마녀의 입에서 붉은색 타원형이 빠져나간 즉시 마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한다. 나는 마녀에게 내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 보인다. 내 제스처를 알아먹은 마녀가 입을 크게 벌린다. 나는 마녀의 입속을 들여다본다. 짐작대로 마녀의 혀가 사라지고 없다. 손과 발 다음으로 활동적이고 자유로운 기관인 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제 누나가 본 게 환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혀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난 마녀는 망연자실해 있다. 이때 공중에서 마녀의 것과 닮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것은 방금 전에 빠져나간 마녀의 혀가 분명했다. 마녀가 내게 했던 말들, 마녀 혼자 중얼거렸던 말들,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했었을 마녀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어 다른 혀에서도 낯선 목소리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목소리는 섞이고 섞여 웅성거림으로 변한다. 마치 군중 속에 묻혀 있는 듯한 기분이다.

마녀는 자신의 말이 쏟아져 나오는 혀를 낚아채려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뛴다. 늙은 몸에 달린 검버섯투성이의 팔을 힘껏 뻗어보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그나저나 공중에 떠다니는 저것들은 혀가 분명한 걸까. 나는 귀를 틀어막고 집으로 돌아간다.

*

공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혀와 말들이 떠돌아다닌다. 혀의 개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공중에 떠다니는 혀들이 많아질수록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말 못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오히려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아진 혀들이 메뚜기 떼처럼 항시 몰려다니기 때문이었다. 밤낮없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귀를 따갑도록 괴롭혔다. 혀들이 잠시 다른 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나마 동네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철학자 고양이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자동차 소리, 혹은 내 피아노 소리만이 적요한 동네를 떠돌아다녔다. 이제 그런 소리들은 소음 축에도 끼지 않는, 잔잔한 소리처럼 들렸다.

이제 식구들도 나처럼 말을 못하게 됐다. 처음에 식구들은 공중에 떠다니는 것들이 혀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저건 뭐지?” “글쎄, 새는 아닌 것 같은데 뭐죠?” 내가 혀라고 말했지만 모두들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어넘기기만 했다. ‘마녀 입에서 빠져나간 혀를 내가 직접 봤다니까요. 지금 마녀 혀는 사라지고 없다구요. 그때 누나가 본 게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구요.’ 명백한 내 주장은 보기 좋게 묵살당했다. 하지만 식구들도 곧 혀가 사라져 말을 못하게 됐고 주변 사람들까지 말을 못하게 되자 식구들은 내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현석이 말이 맞았어. 저건 분명 혀야. 생김새도 비슷하잖아. 저게 혀가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 혀는 어디에 있겠어? 게다가 말 못하는 사람이 늘수록 저것들도 늘어나고 있다구.’ 아버지가 수화로 말했다. ‘그럼 저 혀들 중에 우리 것도 있겠네요?’ ‘그렇지.’ 아버지는 나를 제외한 식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년간 써온 내 수화 덕에 그나마 우리 가족들은 손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를 위해 가족들이 일부러 수화를 배운 건 아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내게서 익힌 수화가 쌓이고 쌓여 자연스레 손으로 대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동시통역사가 꿈이었던 누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옆집 밤무대 가수 또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개강을 앞둔 철학자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을 못하게 된 것을 모두 마녀 탓으로 돌렸다. 마녀가 이 동네로 이사오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급기야 어제는 마녀를 쫓아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네 사람들은 화이트보드에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말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열다 보니 진행 상황은 더디고 답답하기만 했다. 의견은 분분했다. 마녀 짓이라는 사람과 아니라는 사람, 또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저 어르신 때문이라면 어르신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혀도 있어야 하구요.’ 누군가가 반박했다. ‘단순하기는. 자기가 한 짓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자기도 뛰어든 거죠.’ 동네 사람들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서로 자신들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동네 사람들은 마녀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나는 한창 피아노 연주 중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마녀의 현관문에 돌을 던졌고 울타리를 발로 마구 걷어찼다. 느닷없는 난동 소리에 마녀와 나는 밖으로 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들고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당신이 이사온 이후로 사람들이 말을 못하게 됐다. 어서 이 동네를 떠나라!’라고 쓰여 있었다. 마녀의 혀가 공중으로 빠져나간 걸 직접 목격한 나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썼다. ‘혹시 이 할머니가 말하는 거 보셨나요? 가까이에서 지켜본 저도 외마디 소리 한번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며칠 전에 이 할머니 입에서 혀가 빠져나가는 걸 직접 봤습니다. 물론 그때 할머니도 무척 놀랐죠.’ 동네 사람들은 오리지널 벙어리인 저 청년이 거짓말할 리는 없어, 라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평소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말 못하는 착한 청년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으레 그래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입을 벌려 보세요.’ 좌장이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글자를 썼다. 마녀가 동네 사람들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려서 보여주었다. 마녀의 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난 동네 사람들은 겸연쩍게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마녀가 입을 다무는 동시에 한 아주머니가 좌중 앞으로 나왔다. 아주머니는 보드에 빠르면서도 또박또박하게 글자를 써나갔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 할머니 때문은 아닌 것 같네요.’ 사람들은 이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몇 시간 동안 보이지 않던 혀들이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혀의 수는 어제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차츰차츰 동네 사람들 가까이 다가온 혀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사위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머리 위로 몰려든 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귀를 틀어막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흩어져 사라진 뒤에도 마녀와 나는 혀들을 쳐다봤다. 마녀는 자신의 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가끔은 저렇게 혀들이 몰려와 있어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건 왜 그럴까요?’ 나는 수첩에 글자를 적어 마녀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혀에서 쏟아져 나온 말을 목격한 바 있는 마녀는 말했다. ‘저 혀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혀의 주인이 했던 말들을 쏟아내고 있어. 말수가 적은 건 아마 혀의 주인이 잠들었던 새벽녘이기 때문일 거야.’ 마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혀들이 왠지 조용하다 싶을 때면 코 고는 소리가 유독 많이 들려왔다. 취객들의 혀 꼬부라진 소리나 싸우는 소리는 분명 밤의 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름 모를 남자와 여자들의 성교 시 질러대는 신음 소리는 얼굴을 붉힐 정도로 본능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공중에서는 혀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사적인 대화나 혼잣말이 무방비로 방출되고 있는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거대한 불법 도청과도 같은 일이었다. 나는, 머지않아 지금까지 감춰졌던 추악한 비밀이나 사건들이 누설되고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동네 한복판에서 조용한 싸움이 벌어진다. 장씨 부인과 최씨 부인이 각자 화이트보드를 들고 서 있다.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그들은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이유인즉, 오밤중에 혀 하나가 장씨 집에 머물다 간 모양이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혀들 중엔 개인 행동을 일삼는 녀석들이 있었다. 며칠 전 우리 집에도 그런 혀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진 적이 있었다. 술집 사장으로 짐작되는 목소리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물을 적당히 타야지 안 그러면 뽀록난다구. 저놈들 표정 봐라 표정. 쇠고랑을 차도 내가 찰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 이건 다 손님들을 위한 배려라구. 독한 술 마셔서 좋을 거 뭐 있냐? 위에 빵구나 나고 간이나 굳지. 안 그래? 우린 국민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애국자야.” 형은 그 혀를 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워낙 민첩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잡을 수는 없었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조용한 싸움판으로 달려간다. ‘당신 목소리를 닮은 수상한 혀가 우리 집에서 한참 지껄이다 갔다구!’ 장씨 부인은 어젯밤 자기 집에 머물다 간 그 혀의 목소리가 최씨 부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대해 최씨 부인은, 저렇게 많은 혀들 중에 나 같은 목소리가 나 하나뿐이겠냐며 반박한다. ‘당신이 우리 남편 엉덩이에 사마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남의 얘기를 그렇게 하고 다니면 안 되지.’ 장씨 부인이 최씨 부인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어디다 대고 삿대질이야 삿대질은.’ ‘말해봐. 당신 우리 남편이랑 붙어먹었지!’ ‘당신 남편한테 물어보면 알 거 아냐. 그리고 엉덩이에 사마귀 있는 사람이 세상에 당신 남자 하나뿐이겠어!’ ‘하나라면 어쩔 건데?’ ‘난 몸에 사마귀 있는 남잔 딱 질색이야. 근데 징그럽게 그런 사람하고 어떻게 그 짓을 해.’ ‘뭐가 어째! 징그러워?’ 동네 여자들의 싸움은 좀체 흥이 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글자 쓰는 데 바빠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길 여력도 없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온 말을 즉시 맞받아치는 흥미진진한 설전은 아쉽게도 펼쳐지지 않는다. 싸움은 음이 소거된 슬로 모션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어쩌면 어젯밤 장씨 부인 집에 머물다 간 그 혀는 최씨 부인과 닮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최씨 부인 말대로 엉덩이에 사마귀가 있는 남자는 세상에 적어도 둘은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책을 읽는다. 아무 말도 못하는 집 안은 조용하다. 간간이 들리는 건 내 피아노 소리뿐이었다. 식사 시간엔 오직 식사만 했다. 음식물을 골고루 섞어 주던 혀가 없어서 밥을 먹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게다가 혀와 함께 달아난 미각세포 때문에 맛을 느낄 수도 없었다. 음식 먹는 일은 굶어죽지 않기 위한,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귀찮은 일이 돼버렸다. 요즘은 텔레비전도 꿀 먹은 벙어리였다. 가끔 배경음악만이 흘러나올 뿐 앵커나 엠시나 연기자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위성에서 재방영되는 프로그램에서만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규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에는 말 대신 자막이 떴다.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기 때문에 텔레비전 보는 일은 아주 귀찮아졌다. 라디오에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일 음악만 내보냈다. 디제이와 게스트들 간의 잡다한 얘기가 듣기 싫어 라디오를 멀리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라디오만 찾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누나였다. 누나는 요즘 공중에 떠다니는 혀를 보며 세계 공용어는 수화가 될지도 몰라, 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누나는 한 차례 혀들이 몰려오면 긴 밀걸레 자루를 들고 나갔다. 누나는 혀를 향해 자루를 마구 휘두르며, 어렵게 들어간 국제통역학과였는데 너희들이 다 망쳐놨다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원래 벙어리였던 나만이 잃은 거 하나 없이 그대로인 것 같았다.

혀 떼가 몰려온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갖가지 말들이 들린다. 듣지 말아야 할 말도, 비밀스런 말도, 친절한 말도, 악의에 찬 말도 들린다. 그래서 정치나 경제계 권력자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진 대화 내용이 혹시 새나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나 관음증의 소유자들은 은근히 혀 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쪽은 혀 떼로 열광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 때문에 두려움과 근심에 휩싸였다.

*

옆집 밤무대 가수가 죽었다.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가수는 생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동네 사람들은 자살한 게 분명하다고 수군덕댔다. ‘마흔 살을 넘기고도 결혼 한번 못했는데 거기다 입에 거미줄까지 치게 생겼으니 살고 싶었겠어.’ 사람들은 일제히 혀를 차고 싶었지만 혀가 없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런 말들은 모두 화이트보드에 나열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수첩과 펜을 휴대하고 다니듯이 화이트보드와 보드마커를 갖고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간단한 대화 시에는 휴대폰이 아주 용이했다. 몇 년간 휴대폰을 소지하고도 문자 기능에 대해 관심 없어 하던 나이 든 사람들까지도 문자 연습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통화가 불가능하니 문자 기능 말고는 휴대폰이 딱히 쓰일 만한 데도 없었다.

백차와 구급차가 요란한 경광등 소리를 내며 가수의 집 앞에 선다. 밤무대 가수의 죽음을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앞집에 사는 철학자였다. 철학자는 밤무대 가수의 집 지붕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잡으러 갔다가 사건 현장을 목격했다고 했다. 학자다운 품위를 가진, 점잖은 철학자가 남의 집 울타리를 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철학자의 진술은 필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자살은 아니란 얘기죠?’ ‘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노래도 불렀어요. 분명 고미숙 씨 노랫소리였습니다.’ 철학자는 혀 하나가 가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 혀는 고미숙 씨 혀가 분명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혀가 무슨 말을 했나요?’ ‘라이브도 안 되는 너희 같은 것들은 죽어야 해! 너같이 노래도 못하는 게 이런 데서 밥 벌어먹고 살겠어? 내가 최고야. 나 말고 모든 가수들은 목소리를 잃어버려야 해! 돈만 두둑하면 알몸으로도 노랠 부른다며? 너 같은 싸구려들이 이쪽 물을 다 흐려 놓는 거야! 뭐 대충 이런 말들이었습니다.’ ‘근데 그 목소리가 정말 고미숙 씨 본인 목소리였단 말이죠?’ ‘그렇다니까요.’ 그러다 밤무대 가수는 혀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른 혀들이 몰려왔죠.’ 가수의 혀를 비롯한 스무 개가량의 혀들이 가수를 괴롭혔고, 혀들의 공격을 피하려다 그만 가수는 뒤로 넘어졌다고 한다. 밤무대 가수는 커피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고, 철학자가 집으로 달려 들어갔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철학자의 진술대로라면 범인은 혀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밤무대 가수 본인의 혀였다.

사건 현장이 카메라에 찍히고 밤무대 가수가 들것에 실려 나온다. 흰 천에 가려 가수의 마지막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시 목소리를 찾게 되더라도 앞으로 저 밤무대 가수의 노랫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혀가 살인을 일삼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글쎄, 혀가 사람을 죽였대. 혀가 하는 말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도 있어.’ 벙어리가 돼버린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문은 발 없이 잘도 돌아다녔다. 밤무대 가수의 사인을 실족사로 처리한다 해도 엄연히 혀라는 피의자가 있었다. 그래서 혀는 잠재적 살인범으로 지목되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그것들은 이제 단순한 혀가 아니었다. 혀가 하는 말 또한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이제 혀 떼는 사람들의 목숨을 해칠 수도 있는 칼이나 독약과도 같은 것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앞으로 단단히 귀를 막고 다녀야겠다고 했다. 내가 밤마다 귀를 틀어막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암흑의 세계를 상상하듯이, 사람들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세계, 온갖 소음이 사라진 태초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듯 보였다.

*

혀 떼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밤무대 가수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혀가 저지른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이 어떤 말을 했었는지 하나씩 반추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애써 태연한 척 생각했다. ‘그래, 내 혀는 나를 죽일 만큼 그렇게 잔인하진 않았어. 흥! 얼마든지 올 테면 와보라지.’ ‘이래 봬도 난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해본 사람이라구. 난 꿀릴 거 하나 없어!’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혀가 집 안으로 들어올까 봐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혀 떼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런다고 해서 들어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최대한 혀 떼의 소리를 외면하려 했다.

자기 앞에 자신의 혀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못한 일부 사람들은 혀를 죽여버리자고 제안했다. ‘총으로 쏴서 죽여버리자구요.’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는 않았다. 혀를 죽임으로써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혀의 복수가 일어난다면 큰일이었다. 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생각보다 지능적이고 잔인한 녀석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

마녀가 마당 잔디밭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긴 대나무도 보인다. 대나무 끄트머리엔 큼지막한 모기장이 달려 있다. 잠자리채였다. 내 의아한 표정을 보더니 마녀가 수첩에 글자를 쓴다. ‘저 혀를 잡아야겠어. 잡아 삼키면 나도 다시 말을 하게 될지 모르잖아.’ 마녀도 그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어떤 남자가 우연찮게 혀를 잡아 먹었는데 다시 말을 하게 됐다는 소문이 밤무대 가수의 사망 사건 이후 떠돌아 다녔다. 근데 공교롭게도 그 남자는 본래 자기 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혀를 삼켰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혀를 갖게 된 그 남자는 가끔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수상한 말을 지껄이고 다닌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말투와 억양과 말본새를 갖게 된 남자. 다른 사람 혀의 지배를 받게 된 남자는 점점 다른 사람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급하게 저질러진, 생각 없는 행동이 결국 화를 부른 셈이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에요.’ 나는 마녀에게 충고한다. ‘혹시 다른 사람 걸 먹게 되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구요.’ 그래서 마녀는 꼭 자기 혀를 찾을 거라고 한다. 저렇게 많은 혀 중에서 어떻게 자기 걸 찾겠다는 건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게, 아니 우주에서 먼지 하나를 찾는 게 더 쉬워 보였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찾아내실 건데요?’ ‘이 잠자리채로 혀를 잡은 다음 귀에 갖다 대보는 거야. 자기가 한 말이나 목소리는 자기가 더 잘 아는 법이거든.’ 마녀는 다 만들어진 잠자리채를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두른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전의를 다지는 사병처럼 의지가 굳어 보인다.

혀를 삼킨 남자의 얘기가 떠돌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혀가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위기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반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제는 자기 앞에 자기 혀가 나타나기만을 은근히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말을 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은 아무거나 잡아 먹을 심산이었다. 소문대로 다른 사람의 혀가 자기를 지배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거였다. 그들은 인간을 지배하는 건 머릿속 뇌지 그깟 혀가 아니라며, 혀 또한 뇌의 지배를 받는다는 상식을 굳게 믿으려 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그게 누구 혀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어.’ 확고한 자기 암시를 거친 사람들은 혀를 잡아 먹기만 하면 다시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굳이 말을 찾겠다는 신념 하나로 혀 잡기에 나선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중엔 제대로 된 키스를 하고 싶다거나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골고루 씹어 먹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누구 혀든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혀떼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제자리에 서서 있는 힘껏 몸을 띄워 잠자리채를 휘두른다. 기동성이 뛰어난 혀라지만 잠자리채를 피해 가진 못한다. 한 젊은 사내가 잠자리채에 잡힌 혀를 꺼낸다. 혀는 어망에 걸린 싱싱한 물고기처럼 팔딱댄다. 사내가 혀를 삼킨다. 사내 입에서 사내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여자 목소리가 나온다. 한 노파의 입에서는 남자아이 목소리가 나오고, 젊은 처녀의 입에서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외국어가 튀어나온다. 한 중년 남자는 연신 응애응애, 하고 울어댄다. 그 틈에서 마녀는 신중히 자신의 혀를 찾고 있다. 수많은 혀가 마녀의 귀를 스쳐 지나간다. 정말 요원해 보이는 일을 마녀는 차분히 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혀를 잡아 먹는 게 좋은 건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

마녀는 아직도 자신의 혀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몇몇 사람들은 자기만의 목소리와 말을 가졌다. 하지만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빈번하게 자신의 신분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언어가 뒤죽박죽 섞여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수상한 얘기가 튀어나오자 직접 경찰서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범죄를 모의하는 듯한 말이었는데, 경찰은 그것을 토대로 미제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야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은 혼돈의 일부일 뿐이었다.

소문대로 혀를 잡아먹은 사람들은 혀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정부는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해결책을 내놓았다. 당분간 혀를 잡아 먹지 말라는 게 그것이었다. 막무가내로 저질러지는 이기적인 행동에 모두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심어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자신들이지 타인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아직 혀를 잡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 식탁은 여전히 조용했다. 식구들도 마녀처럼 원래 자기 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뜻이 전달되어 정부는 가칭 ‘혀 찾아주기 운동본부’라는 기구를 창설할 계획이었다. 다른 나라와 연합해 범세계적인 기구로 확장해 나갈 구상이라고도 했다. 우선은 혀가 진짜 주인에게 돌아가 언어가 섞이고 사적인 말이 노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게 정부의 뜻이었다. 무엇보다 정부로서는 비리 덩어리 인사들의 혀가 무슨 무슨 연대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잡아 먹히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혀가 저지르고 다니는 범죄 행위도 더 이상 묵과해 둘 순 없다고 했다. 그 이면엔 국내 정치나 외교에 미칠 파장을 염두에 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일명 ‘소리수집가’라는 작자들의 협박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거래목적용으로 제작된 테이프에는 비밀스런 말들이 담겨 있었다. 물론 혀 떼가 쏟아낸 말을 채록한 테이프였다. 중구난방 격으로 쏟아지는 말이라도 한 목소리만 집중해 따라가다 보면 내용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디지털화되고 첨단화된 녹음기기와 편집기술도 이에 한몫 거들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호기로 만들려는 사람들 때문에 정·관계는 물론 경제·언론계까지 그 파장은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마녀의 집으로 간다. 피아노를 쳐주러 가는 게 아니라 마녀의 혀를 찾아주기 위해서다. 자신의 혀를 찾아주면 마녀는 더 많은 보수를 내게 주겠다고 했다. 이미 다른 사람이 마녀의 혀를 먹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앞으로 마녀를 위해 혀를 찾아야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정부가 혀를 찾아줄지 모른다는 내 말도 마녀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내 말하고 목소리는 내가 더 잘 알아. 게다가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이 늙은이 목숨이야.’ ‘그래도 너무 불가능해 보여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어. 자, 가지.’ 마녀가 앞장선다. 나는 마녀가 손수 만들어준 잠자리채를 높이 쳐들고 마녀 뒤를 따른다. 마녀는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한 게 잡히면 일단 자기에게 건네라고 했다.

밖에는 여전히 혀를 잡아 먹겠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력에 확신을 갖고 있거나 혀의 다른 기능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일 것이다. 아니면 마녀처럼 자신의 진짜 혀를 찾으려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나와 마녀는 혀 떼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혀 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와 마녀 앞으로 철학자의 고양이가 유유히 걸어간다. 잠시 걸음을 멈춘 고양이가 꼬리를 곧추세우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당장 내려오지 못해! 망할 놈의 고양이. 넌 들고양이가 아니란 말이야!” “썩을 놈의 고양이 앞으로 밥을 주나 봐라.” “다신 집에 못 들어오게 할 거야.” “너 같은 놈은 벼락 한번 맞아 봐야 해.” “그럴 바엔 아예 집에서 나가버려.” 나는 주위를 둘러본 다음 새끼손가락으로 내 귓속을 후벼 판다. 그럴 리가 없다. 고양이 입에서 철학자의 말과 목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 나는 마녀에게 저 고양이가 말하는 거 들었냐고 묻는다. 마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양이가 자기 주인인 철학자의 혀를 삼켜버리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 모양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럼 앞으로 철학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혀를 잡아 먹더라도 다른 사람의 혀를 먹어야 하나? 저러다 철학자가 지붕 위에 앉아 있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철학자의 고양이는 그 수많은 혀 중에서 어떻게 철학자의 혀를 잡아 먹게 된 걸까.

혀 떼가 몰려온다. 마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수첩에 뭐라고 끼적인다. ‘학생, 저런 하찮은 동물도 말을 갖게 됐잖아. 그러니까 학생도 저 무리 중에 아무거나 잡아 먹어. 혹시 알아? 학생도 말을 하게 될지.’ 정말 나도 저 혀를 잡아 먹으면 철학자의 고양이처럼 말을 하게 될까. 나도 식탁에서 식구들과 잡다한 수다를 떨면서 식사할 수 있을까. 혀의 저주 같은 말, 말, 말을 하게 될까. 때마침 혀 떼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간다. 나는 마녀와 함께 잠자리채를 들고 혀를 잡는다. 말을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을 위해 혀를 잡는다.

잠자리채에 혀 몇 개가 걸려든다. 아주 싱싱해 보이는 혀 하나를 꺼낸다. 나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그 혀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만다. 내 손에서 벗어난 혀는 다시 허공을 맴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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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세계06)

대한민국 신춘문예/문학평론 2008/11/09 00:23

작품명 : 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
 성 명 : 이선영
 
 
 
문학평론가·숙명여대 독문과 교수 김주연

"인성과 신성을 융합시키는 패기 넘쳐"
액추얼리티(Actuality)는 비평의 생명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지금 이곳에서 유효하지 못한 글이라면, 그것은 한갓 시체공시장에 진열된 자료나 다름 없는 서지(書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지 6, 7년도 채 되지 않은 작가나 시인들에 관한 리포트는 액추얼리티는 있을지 몰라도 다소 위험하다. 따라서 문학평론가로 데뷔하고자 하는 이의 첫 번째 선택은 텍스트 선정의 적절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년에 비해 엄청난 양적 증가를 보인 응모작들은 그 절반쯤 이런 점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자기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신인에 대한 글이 많았다는 뜻이다. 프로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프로에 대한 깊은 탐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재미있고 신선한 발상, 화려한 수사(修辭)와는 달리 많은 글들이 문장의 기본구조나 논리 전개에 있어서 비약, 생략, 애매모호, 불명료 혹은 구문의 취약성이나 하자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대학의 문예창작과가 급증하면서 문학에 대한 선호와 관심이 증대하고 있는데, 그 관심의 증폭만큼 기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급한 멋내기에 앞서 차분한 독서와 글쓰기를 권고하고 싶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응모작들의 전체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김종삼으로부터 정이현에 이르는 평론 대상의 폭도 넓고 다양하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당선작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각종 신춘문예 심사를 십수 년 해오는 가운데 아마도 가장 힘든 경우로 기억될 정도다. 최종 순간에 서너 편으로 압축되는 상례와는 달리 10여 편의 작품이 우열경쟁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작품의 완성도와 가능성이 아울러 저울질된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된 ‘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이선영)은 어려운 고통의 산물로서, 대단한 역작이다. 문학평론이 갖추어야 할 분석, 비판, 지향점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문장에도 힘이 있고 인성과 신성을 융합시키는 패기 있는 문제의식도 돋보인다. 훌륭한 평론가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웃음의 사회학’(조재룡), ‘다시 읽는 난·쏘·공’(석영진), ‘환상을 가로질러 진실에 이르는 여정’(이경재), ‘유다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신희진), ‘상처받기 위한 여행’(김영주), ‘아주 작은 소리의 큰 울림’(황효일), ‘무숙자의 노래’(황설욱) 등도 당선작에 못지않았음을 적어둔다.
 
 
작품명 : 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
 성 명 : 이선영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 생겨 기쁘다"

삶의 본질을 꿰뚫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나, 내 삶을 텍스트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소설은 미욱하기 그지없었다. 삶이 허랑하니 소설도 처량할밖에. 그래도 여전히 나를 감동시키는 소설들이 있어 나는 아직 행복하다. 내가 쓴 소설들이 아니어서 가슴은 쓰리지만, 내가 쓰지 못한 소설들이어서 나는 더욱 탐닉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그 탐닉의 소산이다.
내 삶을 텍스트로 다루지만 않으면 나도 가끔은 명철해지는 모양이지만, 모든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이 평론 역시 나 혼자 쓴 글은 아니다. ‘에리직톤의 초상’의 작가 이승우님과 선행 연구자들, 특히 서영채·진형준님이 있어 이 글은 가능했다. 논문을 지도해주신 이동하 교수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이승하 교수님, 신춘문예에 글을 투고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 박철화 교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이분들이 없었으면 오늘 이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부족한 글을 과감히 수상작으로 선택해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드린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쁘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지만, 부끄럽지 않은 이름이 되겠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 이 자리를 빌려 지인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해야겠다. 내 반성의 잣대인 철민 오라범, 그 존재만으로도 나를 추스르는 힘이 되는 미정, 오래오래 내 살뿌리를 뒤흔들었던 소심나르시스, 나를 용서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성일, 나를 용서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윤희, 나로 인해 많이 힘들었을 루지, 논문을 쓰는 내내 내 지랄을 받아준 야루. 미안하고 고맙다. 그리고, 내 적나라한 일상을 살뜰히 사랑해주는 귀염둥이 남편 창훈과 누구보다 간절히 이 소식을 기다리셨을 엄마, 아빠, 언니, 동생! 사랑한다. 기쁨을 나눌 가족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인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내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식상하지만, 식상한 순서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신이 없는 시대에, 나는 그분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1976년 부산 생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중앙대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졸업(2005년)

 
 
작품명 : 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
 성 명 : 이선영
 
 
 
-'사람의 아들'과 '에리직톤의 초상'을 중심으로 -

1. 신이 없는 세상에서 신을 이야기하기

‘소설은 神에게서 버림당한 세계의 서사시’라는 루카치의 정의에서 우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소설의 두 가지 속성을 유추해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속성과 신성성이다.

근대는 과학의 발달과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되었으며, 소설은 이러한 근대성의 산물이므로 세속성은 소설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세속화가 곧 소설의 무종교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루카치는 소설을 ‘선험적 고향 상실성의 표현’이라고도 했거니와, 상실감은 욕망의 가장 강한 동력이며 신에 대한 물음은 인간 존재의 한계상황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세속성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듯한 소설의 이면에 신성성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이 부재하는 세계 속에서는 인간 스스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종교적 확신이 옅어지면 옅어질수록 신에 대한 인간의 물음은 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과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1981)은 소설이 제기해야 하는 이러한 물음을 파고든 작품이다. 애초에는 중편이었던 이 두 작품은 80년대를 관통하며 모두 장편으로 거듭나는데, 이로써 ‘사람의 아들’(1987)과 ‘에리직톤의 초상’(1990)은 신에 대한 물음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보기 드문 작품으로 한국 소설사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주목할 것은, 신성에 대한 이들의 탐구가 사회학적 상상력이 압도적 주류를 이루었던 1980년대에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작가들이 역사 속의 인간을 고민하고 있을 때, 이들은 왜 신에게로 관심을 돌렸을까. 이는 비단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소설이 초월적 지평을 이야기하는 것을 격동의 한국사가 너무 오랫동안 막아왔기 때문에,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새삼스레 신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지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당시 한국적 상황이 그만큼 우리를 절망에 빠뜨렸기 때문이 아닐까. 더 이상 인간과, 인간이 만든 사회에 희망을 걸 수 없다는 비극적 인식이, 인간의 시선을 그들 스스로가 오래전에 폐기해버린 신에게로 돌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면, 신에게서도 전망을 얻을 수 없다. 신이야말로 인간을 부조리하게 창조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잘못은 신에게 있는가. 신에게 죄를 묻고 신을 죽이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시도되었고, 지상낙원의 신화는 그 앙상한 실체를 벌써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신에게 무조건 회귀할 수도 없다. 이 세계에서 신은 언제나 침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실존적 딜레마로부터 ‘사람의 아들’과 ‘에리직톤의 초상’은 출발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아들’은 새로운 신을 창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에 착수하게 되고, 그 절망의 끝에서 ‘에리직톤의 초상’은 다시 신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의 창조란 어떠한 의미로든지 낡은 것의 파괴를 전제하며, 화해 역시 과거로의 단순한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의 아들’과 ‘에리직톤의 초상’의 선결 과제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해체할 것이 신성 그 자체가 아니라 ‘신화화’된 그것이라는 점이다. 신화화된 신성이라는 말 속에는 그것이 거짓 신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니와 신화란 언제나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들이 왜 하필 80년대에 신화의 해체를 시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사람의 아들’, 신화를 죽이고 신화가 되기

신이되 또한 인간이었던 예수라는 존재의 특수성은 소설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종교가 예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은 부활한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 죽어간 예수에 관심을 갖는다. 의심과 회의야말로 소설의 정신이며,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소설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화적 충동이 예수의 인성을 제거하는 동안 소설적 충동은 예수에게서 신의 면모를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왔다.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 등이 그러한 충동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이들과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예수에게서 신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성을 제거한다. 그 결과 예수는 소설적 인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다. ‘사람의 아들’에 그려진 예수에게서 우리가 어떠한 감동도 느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독선적인 야훼의 대리인일 뿐이므로 그에게는 그 어떤 인간적인 회의도, 불안도 없다. 당연히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도 없다. 말없이 대심문관의 비판을 듣고 있다가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어주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예수와 달리 ‘사람의 아들’의 예수는 아하스 페르츠의 비판에 조목조목 반박한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대심문관까지도 불쌍히 여기지만 ‘사람의 아들’의 예수는, 아하스 페르츠의 비판으로부터 육체를 가진 인간의 고통을 읽어내기는커녕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하스 페르츠를 사탄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신을 신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예수에게서 인성을 제거했을 뿐이지만 그로 인해 더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예수의 신성이다. 물론 그에게는 이미 인성도 없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소설들은 신을 포기하는 대신 예수라는 인간을 얻었지만 ‘사람의 아들’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도, 신으로서의 예수도 설득력 없이 그림으로써 예수라는 존재 자체를 폐기해버린다.

‘사람의 아들’이 이렇게 예수를 부정한 이유는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그 실존 여부조차 베일에 싸인 그야말로 신화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가 소설적 인물로 그를 불러낸 까닭은 그의 신화가 신태혁이 말하는 이른바 ‘실패한 자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설에 의하면 아하스 페르츠는 이스라엘의 구두장이였는데,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도중에 그의 집 문 앞에서 쓰러져 잠깐 쉬게 해 달라고 청하자,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예수 재림 때까지 죽지 못하고 방황해야만 하는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소설의 정신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소설은 신화에서 분리된 장르일 뿐 아니라,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에 복무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아들’은, 기존의 신화는 악의에 찬 기독교도들이 터무니없이 왜곡해 만든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예수보다 훨씬 인간적이며 설득력 있는 인물로 재창조하고 있다. 신태혁이 궁극에 이르러 에리직톤과 예수의 구분을 무화시켜 버렸듯이 민요섭은 아하스 페르츠라는 악마적 인물을 ‘사람의 아들’로 부활시킨 것이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예수를 뜻하는 관습적 용어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의 전복적 상상력은 덕지덕지 들러붙은 상투적 사고의 때를 벗기고 언어의 말랑말랑한 시원을 회복시킨다.

그렇다면 예수가 아닌 아하스 페르츠가 ‘사람의 아들’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인간성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가 하찮게 여긴 기적과 권세와 빵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신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뿐인가. ‘지상의 권세와 쾌락은 순간이지만 천상의 권능과 복락은 영원하다’는 예수의 말에 반박해 그는 ‘모든 것은 순간이고 영원한 행복은 영원한 불행처럼 존재하지 않는다’며 땅 위의 영화와 쾌락을 긍정한다. ‘육욕의 화신’에 가까운 사라와 문장로 부인이 추잡하거나 불결하게 묘사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 의하면, 비열한 것은 오히려 사랑만으로 아내를 지킬 자신이 없어 간음죄를 고안해낸 남자들이며,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한 율법이다.

그럼에도,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민요섭과 조동팔의 주장에 독자들이 얼른 수긍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게 기적을 행할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다.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준거라는 것은 처음부터 동의한 바가 아닌가. 문제는 그의 인간성 옹호가 불구의 것이라는 데 있다. 민중을 위한 권력 창출을 외치면서도 그는 정작 민중의 권력 창출을 도모하지는 않는다. 민중 대신 신의 아들 예수에게 권력 획득의 역할을 맡기려고 하다가, 그게 안 되자 그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는 데 힘을 쏟는 것이다. 논리로 보면 그는 당시 열심당원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오히려 그는 종교가들과 결탁한다. 유대교에 대한 비판으로 하나님을 떠났던 그가 유대교를 비판하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유대교 제관들과 결탁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에서는 예수가 당시의 부패한 종교와 권력을 비판하는 모습은 생략하고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모순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의 독선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고 있지만, ‘위대한 영’의 부름까지 받은 그가 한 일이라고는 결국 예수를 비판한 일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아하스 페르츠가 철저하게 관념적이고 비실천적인 지성이라는 것은 그가 현실의 비참을 목도하고 난 뒤에도 민요섭이나 조동팔처럼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새로운 신을 찾아 방랑을 떠났다는 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10여년에 걸친 그의 방황은 산고(産苦)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는 마침내 위대한 영을 만나고 오랜 의심과 회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대한 영을 만나기 전이나 만나고 난 뒤나 아하스 페르츠의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쿠아란타리아서를 창작한 인물이 아하스 페르츠의 분신에 다름 아닌 민요섭과 조동팔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이중의 액자소설적 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액자와 그림이 대화적 관계를 취하지 않고 상호 모방만 함으로써 이야기는 이렇게 단순화되고 인물은 단일화된다. 결국 아하스 페르츠가 모방하고 있는 위대한 영이란 아하스 페르츠의 비판적 지성이 낳은 또 하나의 관념에 불과했던 것, 맴을 돌고 돌아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의 정신만이 있을 뿐 새로운 긍정의 전망이 없다. 위대한 영은 혼자서는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야훼의 반쪽으로만 그려질 뿐이고 그를 대리하는 아하스 페르츠 역시 예수의 대립항으로만 기능한다. 그들은 자율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부정’으로만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철저히 종속적인 존재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신성에 대한 도전에 집착함으로써 아하스 페르츠는 오히려 인간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수를 제거하기 원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세속의 권력자였던 것이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권력에 힘을 실어준다. 신에 대한 도전을 ‘이 시대의 삶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수단’(이남호, ‘신의 은총과 인간의 정의’, 이문열, ‘사람의 아들’, 민음사, 1990, 285쪽)으로 읽으려던 독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신이란 권력의 다른 이름이고 신에 대한 저항은 민중에 대한 사랑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에리직톤의 초상’처럼 신화를 권력의 산물로 읽고 있는 듯하면서도 궁극에 이르러 현실 권력과 신을 분리, 그 비난의 화살을 권력이 아니라 신에게 쏘고 있다. 아하스 페르츠에 비해 조동팔과 민요섭은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70∼80년대의 한국 사회와 제도화된 기독교 모두에 실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신화 뒤에는 언제나 부패한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이 세계의 잘못을 모두 신의 탓으로 밀어놓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생략함으로써 ‘사람의 아들’은 육체적 쾌락의 긍정이 갖는 의의도 상실하고 만다.

“먼저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하고 이 땅의 왕홀(王笏)과 권세부터 손에 넣읍시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 다음이라도 늦지 않소. 아니, 그래야만 당신은 보다 쉽고 힘있게 하늘에 계신 그분의 말씀을 저들에게 전할 수 있고 또 보다 확실하게 그 실천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오. 거기다가 어디 그뿐이겠소 당신이 타고난 사람의 몸은 이 세상의 영화를 흠뻑 누릴 수 있을 것이며, 그 마음도 남을 다스리고 부리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을 것이오.”(1: 194)

아하스 페르츠의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이상주의에 반발한 현실주의로서 분명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검(劍)이 없었던 판관의 시대보다는 검을 가졌던 열왕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말씀에 충실하였으며, 영화와 쾌락은 육신을 가진 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그의 주장은 부정한 권력을 옹호하는 논리로도 사용될 수 있는 소지가 농후하다. 뿐만 아니라 ‘남을 다스리고 부리는 즐거움’의 반대편에는 남에게 다스림과 부림을 받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하스 페르츠는 간과하고 있다. 육체의 쾌락이 긍정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소수 지배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다수 민중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지배와 복종의 신화’를 낳을 뿐이다.

‘사람의 아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아하스 페르츠 이야기가 궁극에 이르러 또 하나의 신화로 전락하고 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훼와 예수에 대한 부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고민은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아하스 페르츠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영원히’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기로 한다. 아하스 페르츠가 위대한 영을 만나면서부터 ‘사람의 아들’에서는 이미 신과 인간 사이의 ‘소설적 대결’은 사라지고 두 신의 아들이 벌이는 ‘신화적 대결’만이 남게 되지만(서영채, ‘소설의 열림, 이야기의 닫힘’, 류철균 編, ‘이문열론’, 살림, 1993, 184쪽 참고), 그가 육체의 한계에서마저 자유로워지면서 ‘사람의 아들’은 결국 신성의 ‘영원한 대립’이라는 비극적 전망만을 우리에게 남겨놓는 것이다.

이렇듯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서로를 거울처럼 모방하거나 적대적으로 배척할 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모하지 않는다. 단일한 ‘욕망의 삼각형’에 갇혀버렸기 때문일까, 소설의 인물들은 너무 단성적이다. 시공간의 거리에 짓눌렸기 때문일까, 액자와 그림은 반복될 뿐 변증법적 교차를 꾀하며 이야기를 상승시키지 않는다. 소설의 구조적 결함은 결말을 파국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민요섭의 허무한 회귀와 조동팔의 비극적인 자살은, 그러므로 예정된 것이었다. 신화를 해체한 자리에 소설이 탄생하지 못하고 또 다른 신화가 들어섰듯이 신을 죽인 그곳에서 이제 인간의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3. ‘에리직톤의 초상’1, ‘안정과 질서의 신화’와 에리직톤의 죽음

모든 죽음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폭력이 수반된다. 물론 탄생에도 폭력이 따른다. 탄생이야말로 죽음을 그 자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에리직톤의 초상’의 형석에 따르면 구원 역시 폭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이지만 이 희생 역시 스스로에게 행사한 폭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과 구별되지 않는 희생. 형석은 이 논리를 확장하여 자신의 교황 암살 시도도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죽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의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목적하는 구원이란 자기 자신의 구원일 뿐이다. 그것에만 전 존재를 다 걸어도 끝내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그때까지 그의 삶은 함부로 짓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형석은 성년이 된 후에도 그 기억을 떨쳐낼 수 없는 암울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말한다.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라 스스로를 “사육되는 한 마리의 가축”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손목을 칼로 긋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견 자살 시도로 비칠 수 있는 이 사건에 대해 그는 다른 설명을 달아놓고 있다. 그가 손목을 그은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도 인간의 생명을 보장해주는 신성한 피가 흐르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 자학적인 몸짓이 실상은 생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그의 증언은 그의, 이후의 모든 행동에 대한 유효한 해석의 틀이 된다.

자신의 내부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인간됨을 믿을 수 있었던 처절한 유년의 기억은, 형석과 세계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을 형성한다. 생의 본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세계와 화해할 수 없다. 피를 통해 자기 역시 남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자의식을 확립한 후 그가 느낀 것은 희열이 아니라 분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선언한다고 해서 세계가 돌연 그를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도 엄연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세계의 질서가 잘못된 것인가. 그러나 왜소한 한 개인이 이 거대한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돌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성년이 된 후에도 여전히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세계와 대립한다. 모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의 유학 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고 급기야 그는 약혼자인 혜령과도 결별한다. 그녀가 자신의 선생이었다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에 존재하는 수직적 질서에도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가 수직적 질서의 정점에 서 있는 신을 신앙할 수는 없는 법.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던 형석은 ‘사람의 아들’에서 조동팔이 민요섭을 만나 생의 경로를 완전히 변경하듯이, 델브뤼케를 만나 혼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수직적 질서의 파괴를 드디어 시도하게 된다.

민요섭과 조동팔이 수평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수직 지향적인 것과는 달리, 델브뤼케와 형석은 철저하게 수평 지향적이다. 신을 떠난 자의 허무에 갇혀버렸다는 점에서 그들은 현대인의 초상이지만, 이 세계가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초월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쯤은 눈치 채고 있다. 종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종교는 신이 떠난 자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신의 대리자를 내세우고, 대리자는 신이 아니면서 신의 이름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 존재의 허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발아래 엎드린다. 그러나 수직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일 때뿐이다. 아니, 오히려 진짜 신은 인간이 되어 내려왔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응당 수평적이어야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가족 안에서마저 수직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수평적이어야 하는 관계가 부당하게 수직을 강요할 때, 인간은 굴욕감을 느낀다. 신도 아닌 인간이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다면, 그 자신은 인간보다 낮은 짐승이나 벌레의 위치에 서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형석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실존의 위기를 겪는 것도 이런 부당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수직 관계를 해체해야만 한다. 자신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가, 아니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든가. 추크슈피체 등반 후 전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형석은 델브뤼케의 유혹에 이끌려 후자를 택한다. 델브뤼케가 교황을 구체적인 표적으로 제시하고 형석이 그 표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활력을 맛본다.

“표적이, 있었다. 내가 쓰러뜨려야 할 표적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나의 삶은 델브뤼케 못지않게 활기에 넘쳤고, 방아쇠를 당기는 나의 손끝은 늘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표적은, 하여 내가 쓰러뜨려야 할 목표물이면서 동시에 나를 지탱해 주는 자극이었다. 내가 쓰러뜨려야 할 표적만이 나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필시 하나의 역설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만이 진리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나에게는 표적이 필요하다. 그 표적은 막강할수록, 권위적일수록, 도달이 불가능할수록, 그리고 상징적일수록, 즉 비현실적일수록 효과적이다.”


표적이 “막강할수록, 권위적일수록, 도달이 불가능할수록, 그리고 상징적일수록, 즉 비현실적일수록” 효과적인 이유는, 그래야만 그것이 삶의 활력을 더 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유지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달성될 표적에 대해서는 욕망도 강하게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달성하고 난 뒤 또다시 다른 표적을 찾아 헤매야 된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표적이 너무 막강해도 문제는 있다. 영원히 그 표적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럴 때 주체는 또 극심한 열패감에 빠져 자신의 존재의의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암살에 실패하고 난 뒤 형석이 다시 무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삶의 의미를 외부의 표적에 의지해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필연적으로 이러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르네 지라르는 영원히 반복되는 이 폭력의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폭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더 큰 폭력, 더 큰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르네 지라르, 김진식·박무호 역,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1997. 참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의 자기희생이야말로 다른 모든 폭력을 잠재울 수 있는 ‘초월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교황도 이런 신의 자리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신은 유일자이지만 교황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델브뤼케와 형석이 비록 교황 그 자체가 아니라 교황이라는 권위에 도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폭력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교황 한 명을 죽인다고 해서 교황이나 가톨릭 교회 체제가 붕괴되지는 않는 것이다.

신화화된 종교가 하나의 폭력이라면 델브뤼케와 형석의 교황 암살 시도 역시 폭력이다. 그러나 그들이 휘두른 폭력은 종교의 권위에 비해 너무 왜소한 것이었다. 그들이 두 번째로 로마로 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 풍경들, 교황의 행렬, 그 행렬을 보고 형석이 느끼는 감정 등이 모두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은, 이미 한 번의 교황 암살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의 구조가 전혀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요한 바로오 2세를 저격했던 아그자와 마찬가지로 델브뤼케 역시 교황 저격에 실패함으로써 이러한 구조는 더욱 공고해진다. 결국 ‘인간사의 수직적 파괴’는 실패하고, 그를 통해 이루려던 ‘개인적 구원’ 역시 좌절당한다. 중개자를 상실한 자가 대상을 욕망할 수는 없는 법, ‘사람의 아들’에서 민요섭의 회심 앞에 조동팔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듯이, 델브뤼케의 실패를 목격한 형석 역시 자기 파괴를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몇몇 평자들은 최형석의 이런 죽음을 ‘악령’의 키릴로프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인간의 ‘신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의 인물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처음부터 인간의 존재 의의가 신으로부터 부여된다는 식의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외부의 힘이―그것이 은총의 형태로든 신탁의 양식으로든, 아니면 계시의 길을 통해서이든―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을, 그리하여 인간이 그 지배하에 놓인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까지 밝혀놓고 있다. 그에게는 이미 부정할 신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교황 암살은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그는 세계 내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발견하기 원했을 뿐이며 이를 위해 종교로 대표되는 인간 사회의 수직적 질서에 도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그러한 도전이 실패한 데 따른 절망의 몸짓이며, 신에게서도 인간에게서도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한 자의 비극적인 자기파괴일 뿐인 것이다.

이로써 ‘에리직톤의 초상’은, ‘삶은 총을 똑바로 쏘는 것이다’라고 외치면서도, 그들 모두가 실제로는 표적을 제대로 겨누지 못했음을, 그리고 그 표적이 적절하지도 않았음을, 나아가 개인이 도전해서 무너뜨리기에는 현실의 지배구조가 너무 공고하다는 것을 암울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지배구조가 이토록 공고한 까닭은, 이들의 신화가 깨어지기를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신이 사라진 이 시대야말로 보다 강력한 신화가 간절히 요구되는 때일 것이므로.


4. ‘에리직톤의 초상’2, ‘자유와 해방의 신화’와 예수의 부활

신에 대한 도전과 신의 응징이라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리직톤 신화는 아하스 페르츠 신화와 동일선상에 있다. 에리직톤은 신들을 멸시하는 불경한 사람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그는 시어리어즈 여신이 사랑하는 신성한 나무를 도끼질해 쓰러뜨리고, 여신은 그 형벌로 에리직톤에게 영원한 굶주림을 내린다. 온 재산을 다 팔아 음식을 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자, 그는 결국 딸까지 팔아먹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의 팔다리마저 뜯어먹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정상훈은 이 신화를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폭력’으로 읽는다. 신에 대항한 인간의 폭력과 그러한 인간을 응징하는 신의 폭력. 인간이 낙원을 상실하고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도 이러한 수직적 폭력의 결과다. 따라서 그는 수평적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직적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을 거론하지 않는 모든 휴머니즘은 허무주의라는 기형의 자식밖에 낳지 못할 것이며, 절망이라는 기항지가 그들의 종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민요섭과 조동팔의 행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태혁은 에리직톤의 도전을 신성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신성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에리직톤의 폭력은 정당하다. 그것은 더 ‘큰 악’에 저항하는 ‘작은 악’일 뿐이다. 그러나 실패한 자들의 이야기는 안정과 질서의 신화가 되어 권력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는 법, 도전에 실패한 에리직톤은 ‘불경’한 자로만 그려진다. 반면 똑같이 권력에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파라오의 신화를 해체하고 자유와 해방의 신화를 창조한다. 에리직톤과 달리 그는 도전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여 태혁은, 문제는 성공의 여부지 도전의 여부가 아니라 판단하고, 최후의 모세가 되기 위해 우선은 기꺼이 에리직톤의 운명을 감수하기로 한다.

그러나 과연 모세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신화이기만 할 것인가. 혁명이란 결국 과거의 신성에 대한 불경을 오히려 신성화하는 것. 신화가 그 본질상 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 모세가 파라오에게 승리하는 순간 그의 자유와 해방의 신화는 곧 안정과 질서의 신화로 화하지 않겠는가. 이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를 받아 내려왔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확인된다. 아무리 좋은 계명이라 하더라도 율법이란 본질적으로 질서를 위한 것이며, 궁극에 이르면 지배와 복종을 강요하는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세는 신성을 입은 인물이다. 그가 유대민족을 출애굽 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지, 그 자신의 힘과 지혜로 계획하고 행동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신성에 도전한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오히려 파라오이다. 파라오에게 내려졌던 온갖 재앙들을 생각해보라. 성경 자체를 하나의 신화로 읽고 비신화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모세 뒤에 서려 있는 신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모세를 대리인으로 세운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승리한 자를 위해 나중에 덧붙여진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권력의 신화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자유와 해방의 신화도 그것이 권력과 함께하는 순간 안정과 질서의 신화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하나는 신성화된 권력에의 도전은 결국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한 번도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권력이 인간의 오랜 욕망이라면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번째 결론, 즉 권력이 스스로를 신성화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그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권력 구조 그 자체의 해체 혹은 분산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태혁의 문제의식은 아직 여기에까지 이르고 있지 않다. 이 소설이 쓰인 80년대에는 아직 파라오의 신화를 해체시킬 수 있는 모세조차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가 자유와 해방의 삶을 줄지, 그 자신을 신성화할지는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누구든지 우선은 모세라도 되어야 했던 시대, 그것이 한국의 70∼80년대가 아니었을까.

‘사람의 아들’과 ‘에리직톤의 초상’이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은 그것이 소설의 본질에 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상황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의 부조리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과 함께 정의로운 원칙으로서의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유대·기독교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문제이지만, 불의(不義)가 세상을 지배하면 할수록 그 질문은 한층 더 실존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정말 선하고 전능한 신이 없기 때문인지, 신이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그 어떤 신정론(神正論)도 논리적인 결함 없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소설은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 의의가 있기도 하려니와, 신의 존재를 해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과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는 성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세계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응할 힘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神性)에 대한 탐구는 그런 의미에서 인성(人性)에 대한 탐구와 맞닿아 있다. 신성과 인성을 대립적인 것으로만 파악한 ‘사람의 아들’이 신을 죽이고 마침내 인간마저 죽일 수밖에 없었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은 다성적 인물들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수직과 수평이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형상화해냄으로써, 80년대에 활발하게 제기되었던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결코 종교적 인식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태혁은 형석이나 동팔처럼 수평 지향적 인물이지만, 형석처럼 개인의 실존적 고민에 갇혀 있지도 않고, 동팔처럼 신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제도화된 종교가 강요하는 권위적인 신은 신화화된 권력의 산물이지 신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 신태혁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하는 예언자 전통에 따르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안정이나 질서를 강조해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현상 유지의 지지자가 아니라, 개혁적인 해방자이다. 신태혁의 등장으로 ‘에리직톤의 초상’은 보다 풍성한 신의 초상을 얻는다. 신화화된 기독교의 신이 이제 신화를 거부하는 신으로 되살아나 “무소부재한 이 놈의 정치권력에 대응할 수 있는 힘”(2: 210)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신은 인간적이고, 인간은 신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자체를 자유와 해방의 종교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태혁은 현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단행하면서도 기독교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민요섭과 달리 ‘교회 안에서’ 교회와 싸우며, ‘믿음에 근거해’ 인간의 수평 질서를 방해하는 사회의 억압구조와 싸운다. 그러므로 그의 실패는 조동팔이나 최형석과 달리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사랑이라는 말은 관념어이지만, 사랑 자체는 관념이 아닌 바, ‘사람의 아들’의 다소 교조적 분위기는 ‘에리직톤의 초상’에 와서 삶의 구체성을 획득한다. K중공업 방화 사건을 선동한 혐의로 수배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도 그는 그 고통을, 함께 고통당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혜령이 태혁을 이해하게 된 것도 그의 그 뜨거운 인간애를 발견하庸?壙痼見? 그의 폭력이, 형석의 그것과 달리 구원을 가능케 하는 희생으로 읽힐 수 있는 것도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에리직톤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의 예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 신화의 해체와 새로운 소설의 탄생

종교적 언어로 치환되는 순간, 절절하게 다가오던 현실의 언어들이 돌연 퀴퀴한 곰팡내를 풍기는 경우가 있다.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이제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의 광고문구 같은 그 말에 더 이상 감읍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삶 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한, 신의 사랑이란 하나의 추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태혁을 만나기 전까지 정혜령의 사랑 또한 이 추상에 다름 아니었다. 형석은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의 선생이었다는 기억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의 사랑이 수직적 질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했던 것이 아니라, 희생하기 위해 사랑했던 혜령은 구체적인 인간의 추악함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런 정혜령이 신태혁의 실천적인 사랑을 지켜보면서 점차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시작한다. 태혁을 이해하고 그의 노동 운동에 동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변모가 중요한 까닭은 그녀가 그동안 수직적 질서를 강조하는 축에 서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를 매개로 정상훈과 김병욱 역시 신태혁이 상징하는 수평적 질서의 세계와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고, 이로써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변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각기 자신이 택한 길 안에서 꿈틀거리며 변모하고, 그 길 내에서 궁극을 지향하지 함부로 서로 뒤섞이거나 전향하지 않는다.”(진형준, ‘열린 다원적 인식’, 이승우, ‘에리직톤의 초상’, 살림, 1990) ‘내적으로 설득해오는 다른 말들과의 투쟁’(미하일 바흐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창작과비평사, 1988, 166쪽)을 통해 새로운 문맥 속에서 서로를 활성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아들’이 이항대립적 관념의 갈등만을 보여주는 단성적 관념소설에 머물고 있다면, ‘에리직톤의 초상’은 “다양한 관념의 갈등을 통해 존재의 대화적 의미를 탐색하고, 이러한 순환적 대화성으로써 이항대립적 관계를 붕괴시켜 정치적 구조의 허구적 토대를 해부하고자 하는 다성적 관념소설”(황순재, ‘한국 관념소설의 세계’, 태학사, 1996, 60∼64쪽 참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성성이야말로, ‘에리직톤의 초상’이 ‘사람의 아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화적 세계를 해체하고, 진정한 의미의 소설에 다가갈 수 있었던 동력이다. 인성과 신성의 세계가 단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 속에서 춤추고 대화하며 하나의 율동을 만들어내는 소설이 탄생하기를, 하여 우리의 소설적 지평이 보다 풍요로워지기를, 이제 꿈꾸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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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여인(세계06)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9 00:20

작품명 : 불가리아의 여인
 성 명: 이윤설
 
 
 
<심사평> 유종호 문학평론가·시인(왼쪽)·신경림 시인

"삶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빛나는 예지"…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의 시가 많은 것은 같은 세대가 같은 정서, 같은 생각에서 살고 있는 데 연유하는 바도 없지 않겠으나, 한편 시를 잘못 공부하고 있어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 잘 읽히지 않는 시도 많았지만, 삶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빛나는 시가 예년에 비해 더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윤설의 시들이 단연 빛난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령 ‘불가리아 여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창을 열고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이국 여인을 본다는 것이 시의 내용인데, 그를 불가리아 여인으로 상정한다든가 또 그의 위치에서 창 안의 나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설정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시가 전체적으로 지극히 발랄하고 싱싱하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또 ‘성난 여자’에서는 활기와 거침없는 서술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가 재미가 있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점도 미덕이다.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점에서는 황현진의 시도 뒤지지 않는다. ‘당신과의 드라이브’나 ‘당신에게 키스를’ 같은 시는 시라면 으레 심각하고 어렵다는 개념을 바꿔 놓는다. 한데 어딘가 한구석 덜 익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김종분의 시들은 조금 구투라는 느낌을 준다. ‘나는 불량 농민이다’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잘 읽히지만, ‘나는 구술 면접을 잘 볼 자신이 없다’ 같은 시는 지루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이만큼 형상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상상력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있어 그의 시들은 매우 값진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사람의 작품 중에서 이윤설의 ‘불가리아 여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쉽게 합의했다.

 
 
작품명 : 불가리아의 여인
 성 명: 이윤설
 
 
 
"오늘의 기적에서 신의 은유를 느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은유가 있다.
오래도록 어두운 창을 바라보는 날이었어도 잘 지냈다고 미소지을 때, 그 미소에는 그의 혼자인 촛불이 흔들리던 날들과 등을 기대고 허공에 그리던 얼굴 같은 것들이 모두 둥글게 감싸인 채 소유되는 것이다. 돌아서는 그의 어깨 뒤로 숲의 잎들이 가을을 받아적기 시작할 때, 그는 그 모든 날들을 자신의 힘겨운 육체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호젓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시인인 때는 제 뜨거운 아픔을 손에 꽉 쥐고도 놓지 않고 지니고 갈 때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자신이 될 때까지 버리지 못하고 울 때이다. 사람의 은유는 신에게서 배워 사람만이 읽을 수 있도록 주어진 것, 그래서 그는 신의 은유로써 살아가고 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신이 그를 버리지 못하고 울 때이다.

오늘 이 평범한 기적에서 나는 신의 은유를 느낀다.

나의 모든 아름다운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감태준·이승하 선생님과 문창과 선생님들, 강형철 선생님, 오정국 선배님, 차창룡 선배님 그리고 멀리서 마음의 손 잡아주시는 철학과 선생님들과 선후배들, 토지문화관의 봄에서 여름까지 뜨거운 예술가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나의 벗 기연. 그리고 엄마 아빠 가족들, 내가 그다지도 귀애하는 꽃과 새와 별의 지옥인 너에게. 기회를 주신 신경림 유종호 선생님께는 말로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1969년 경기도 이천 출생

▲명지대 철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5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

▲2005년 거창국제연극제 희곡 공모 대상

 
 
작품명 : 불가리아 여인
 성 명 : 이윤설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를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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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계단(세계06)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19

작품명 : 여자의 계단
 성 명 : 이준희
 
 
 
<심사평> 최원식 문학평론가(왼쪽), 서영은 소설가

"관계 단절·소통 부재 새 기법으로 형상화” 
다양한 소재, 새로운 기법을 모색하는 11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그 중에서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 신인다운 참신한 상상력, 나름의 진지한 사유와 형상력이 좀 더 나은 5편을 추렸다. 이 5편은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이 있어 쉽게 의견합일이 되지 않아 심사 자리에서 다시 독해한 끝에, 이준희의 ‘여자의 계단’을 당선작으로 뽑게 되었다.
 
 
한겨울의 막차라는 특수 상황에서 빚어지는 승객들의 이야기인 배명희의 ‘마지막 버스’는 폭력과 그를 묵인하는 집단, 그에 맞서다 오히려 더한 폭력을 당하고 길바닥에 버려지는 주인공이 자기모순을 깨달음으로써 용서에 이르는 과정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강인의 ‘아해, 질주의 끝’은 이상의 시 ‘오감도’를 밑그림으로, 출구 없는 존재의 본질을 진지한 사유로 성찰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사유의 스펙트럼만으로 구성돼 있어 이야기적 요소가 부족하다. 시신의 얼굴을 화장(化粧)해 주는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차노휘의 ‘얼굴’은 가벼운 스케치풍의 소품이다. 사실적 묘사와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딸을 잃고 자포자기한 주인공이, 장례식장의 동료인 K의 자살한 연인의 마지막 얼굴을 화장해 주면서 잃었던 삶의 의욕과 사랑을 회복하는 결말은 심리의 비약이 심해 공감이 덜하다. 강헌의 ‘그는 나를 모른다’는 시간의 퍼즐을 뒤바꿔 봄으로써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다. 한 샐러리맨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통해 삶의 감춰진 부분을 드러내고 존재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이 참신하다. 다만 관념을 이야기 속에 더 깊이 육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당선작인 이준희의 ‘여자의 계단’은 현대인의 관계의 단절, 소통의 부재를 새로운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옆자리 동료였던 ‘여자’의 거처를 계단으로 걸어서 힘들게 찾아가는 이야기는 은유를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다. 고립된 모든 개인을 상징하는 ‘여자’는 스스로 또는 타의에 의해 단절된 삶을 살지만 내면 깊숙이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 드디어 계단을 모두 올라 여자의 방문을 열고 오래된 나무와의 만남을 예감하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은 이 작품이 당선작에 값하는 충분한 이유로서 의견이 일치되었다.
 
 
작품명 : 여자의 계단
 성 명 : 이준희
 
 
 
"사람과 삶의 향기 묻어나는 소설 쓰겠다"

내가 참으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여섯 살 때입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병원 문 앞에서 부모님이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참으렴. 그게 꼭 그때만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내 몸 깊숙한 어딘가에 수첩 하나가 있습니다. 꼭 이루고 싶은 일들과 앞으로 겪게 될지 모를 일들을 적어 놓은 수첩입니다. 수첩은 성공과 실패, 기대와 좌절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을 때마다 목록에 새로운 내용이 한 줄씩 더해지거나 혹은 지워졌습니다.

어느 날 수첩을 보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과 실패가 아닌, 그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를 살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잘 참아라, 라고 말씀하신 부모님은, 어쩌면 그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소설쓰기가 바로 그 방법이었습니다. 이제 수첩에는 성공과 실패 같은 것들이 아닌 아주 평범한 어떤 이야기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내가 살아가고 또 잘 참아낼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조심스럽지만, 감히 그렇게 말해 봅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꾸준히,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이동하 선생님과 신상웅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소설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라는 것을 선생님들께 배웠습니다. 또한 소설이 사람과 삶에서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늘 힘이 되는 말을 힘껏 해주신 박청호, 이재웅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희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 밖에 강의실에서 술집에서 함께해준 이름을 다 밝힐 수 없는 친구 동기 선배 후배, 모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따뜻하게 감싸주고 보살펴 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1981년 충북 옥천 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2004년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중

▲1998년 대산청소년문학상 소설부문 동상 입상

▲2001년 부키즌인터넷문학상 소설 당선

 
 
작품명 : 여자의 계단
 성 명 : 이준희
 
 
 
남자가 계단을 오른다. 한발씩 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혼자뿐인 듯 통로가 조용하다. 하나 둘 셋…… 남자는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센다. 건물 계단이 몇 개인지는 밖에서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단 숫자를 세기 위해 남자는 직접 계단을 올라야 했다. 평소 남자는 건물의 계단에 대해, 더욱이 계단 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주로 이용했고, 간혹 계단을 이용할 때도 몇 칸씩 성큼성큼 건너뛰곤 했다. 계단 수를 세는 것은 남자의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남자가 숫자를 세며 계단을 오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숨소리가 점차 흐트러진다. 남자는 난간을 잡고 계단참에 쪼그려 앉는다. 쪼그려 앉자 종아리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다. 종이에 숫자와 그림이 적혀 있다. 247. 남자는 종이 위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써 본다. 문득 여자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건물이야. 잘 알아둬, 247. 남자는 소리 내 숫자를 말해 본다. 남자의 목소리가 텅 빈 계단실에 울렸다 사라진다.
남자는 일 층부터 옥상까지 계단이 247개인 건물을 찾고 있다. 남자의 사무실을 둘러싼 건물은 네 개였다. 남자는 이미 그 중 세 개의 건물을 오르며 계단 수를 알아봤다. 그것들은 남자가 찾는 건물이 아니었다. 너무 높거나 낮았다. 지금 남자가 오르는 건물만이, 남자가 찾는 건물일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러나 계단은 240개였다. 몇 번을 올라봐도 계단 수는 변함이 없었다. 계단은 십육 층에서 끝이 났다. 남자의 머릿속으로 의심이 파고들었다. 여자가 잘못 센 것은 아닐까. 그때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벽을 올려다본다. ‘8F’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남자는 고개를 길게 빼 난간 틈새로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딛고 올라온 계단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여자는 언제 이 많은 계단을 올라 다녔을까. 불현듯 남자의 눈앞에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자의 두 배쯤 되는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을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자는 손으로 난간 손잡이를 잡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릎을 짚었을 수도 있다. 도중에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소리 내어 숫자를 셌을지도 모른다.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훕, 하고 남자의 입에서 웃음이 새나온다. 웃음은 힘이 없다.

남자는 여자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 남자의 첫 직장에서다. 처음 출근하던 날, 직장 상사이기도 한 남자의 대학 선배가 자리를 알려 주겠다며 앞장섰다. 남자는 조금 들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발 딛는 사회였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써봤다. 디자인학과를 나와 할 수 있는 일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공을 살리고 싶었다. 어느 날 동문회에서 만난 선배가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해라. 캐릭터를 만들고 삽화를 그리는 회사다.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기분이었다. 정식 절차를 거쳐 뽑은 걸로 할 테니 서류나 잘 만들어 와. 선배는 남자에게 당부했다. 여기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선배가 한 공간을 손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선배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사무실 귀퉁이, 파티션으로 가린 세 평의 공간이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세 개가 한 걸음 정도씩 떨어져 있었다. 물감, 파스텔, 에나멜 물감들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반대편에 그림들을 편집하는 컴퓨터가 몇 대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책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몸을 잔뜩 구부린 채였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경악했는지도 몰랐다. 구부린 상체가 책상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고, 의자에 앉은 건지 끼인 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마치 어린이 책상에 어른이 앉아 있는 듯했다. 여기 신입. 선배의 말에 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의자를 뒤로 밀더니 회전의자 위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남자는 자칫 실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완전히 몸을 돌리기 전, 남자는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자의 반응이 없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여자를 제대로 쳐다봤다. 여자는 몸집에 비해 작다 싶은 안경을 쓰고, 샐러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 여자가 남자를 넘겨다봤다. 말없이 코를 계속 실룩이고 있었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남자 뒤쪽 책상을 가리켰다. 거기가 남자 자리였다.

회사의 주력 분야는 캐릭터와 삽화 제작이었다. ‘이미지는 내용에 앞서 전달된다.’ 의뢰자들은 일러스트나 삽화가 사람들 의식에 끼치는 영향력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의뢰가 들어오면 기획팀에서 회의를 했고, 그것이 디자인팀으로 넘어왔다. 클라이언트가 직접 디자인 초안을 넘기기도 했다. 남자는 디자인팀에 속해, 기획팀과 디자인팀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기획팀 사람들이 제시한 초안을 보며 의견을 조율하고, 여자가 그린 그림을 시안 형태로 만들었다. 전임자도 했던 일이었다. 여자가 기획팀과 접촉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여자는 사무실 내 누구와도 사적인 교류가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늘 혼자였고, 세 평 남짓한 원화 디자인실에 주로 머물렀다. 어쩌다 자리를 비우곤 했는데, 돌아올 때면 뭔가를 품속에 숨겨 왔다. 그게 뭐예요? 의례적인 말 반, 궁금함 반으로 물어봐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컴퓨터를 만지는 대신 붓이나 파스텔을 손에 쥐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림 대부분을 직접 그려 컴퓨터에 입력해야 했지만, 요즘에는 작업 대부분이 컴퓨터 드로잉 프로그램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종이에 직접 그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채화의 붓자국처럼 재료의 질감을 살리고 싶을 때다. 컴퓨터로도 재료의 특성을 살린 그림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린 것과는 차이가 났다. 그것들 대부분을 여자가 맡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준 것은 캐릭터 디자인 초안이었다. 여자가 그림을 넘기면 남자는 그 자리에서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기획의도와 맞아떨어지는지 검토한다. 그동안 여자는 가만히 앉은 채로 남자를 쳐다봤다. 패널에 걸어둔 컵에 야채주스를 따라 마시거나, 샐러드를 먹으면서. 가끔은 빈 종이에 스케치를 하는 듯했지만, 눈치를 보듯 남자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남자가 의견을 말할 때 여자는 수긍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견이 있을 때는 손에 쥔 컵 밑바닥을 문질렀다. 남자는 의견을 말할 때마다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근심이었다. 하하. 이번 그림은 너무 약한 거 아닌가요? 그쪽에선 파스텔이 식상하다고 그러던데.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던 종이를 받아 그림을 살폈다. 캐릭터는 강해야 하지 않나요? 보는 사람을 한번에 잡아먹는 거죠. 남자는 여자에게 말하며 그녀의 표정을 관찰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돌아서는데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지가 푹 파였던데, 펜을 많이 잡는 편인가 봐. 남자가 돌아봤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적인 말을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선배가 여자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성격이 보통이 아닐 거야. 딱 보면 알잖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구. 남자는 문득, 여자가 선배의 말처럼 꼬인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 수는 생각했던 것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다. 이대로라면 이번에도 240개의 계단을 오를 것이다. 남자는 오른발이 닿을 때마다 다리에 힘을 준다. 오른발, 왼발, 다시 오른발. 남자의 몸이 리듬을 탄다. 몇 번씩 계단을 오르내리며 건물 전체를 상상하곤 했다. 남자는 지금 오르는 건물의 모습을 떠올린다. 일층 현관으로 들어가 로비 뒤쪽으로 돌아가면 계단실이 나온다. 계단실은 금연이고 공기정화조가 설치되어 있는 대신 창문이 없다. 계단은 층마다 16개씩 있다. 여덟 개의 계단을 올라 계단참에서 시계 방향으로 모서리를 돌면 또 여덟 개의 계단이 나온다. 굴절형 구조다. 남자는 여러 건물들을 오르면서 같은 굴절형 구조라 해도 건물마다 굴절 방향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입문의 위치나 건물의 평면 형태에 따라 시계 방향으로 굴절되기도 하고 반시계 방향으로 굴절되기도 했다. 그것은 관심을 갖고 보거나 직접 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지금 오르는 건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진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이 건물은 특이한 구조를 가졌거나 누군가 살고 있거나 혹은 어떤 상점이 있는 곳이지 않을까. 남자는 문득 계단을 오르는 일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일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건물을 오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건물과 자신이 비밀을 하나씩 공유하는 것 같았다. 사귀게 된 이후에 서로를 한 걸음씩 알아가는 것. 남자는 남자가 사는 곳이나 자주 가는 건물의 계단 수가 몇 개인지 알지 못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 사는 건물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어쩌면 여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 많은 계단을 세며 올랐던 걸까. 남자는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여전히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날, 창밖에선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남자가 일하는 세 평 공간에도 따스한 열기가 가득 찼다. 남자가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도, 여자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 해요? 남자가 묻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 뒤쪽으로 햇빛이 하얗게 빛나고 있어 그녀의 실루엣밖에는 볼 수 없었다. 책상에 잔뜩 구부린 여자의 상체 너머 긴 붓꼬리가 흔들렸다. 남자는 의자를 끌어 여자 옆에 앉았다. 남자는 페인터나 포토샵 같은 드로잉 프로그램은 능숙하게 다루었지만 직접 그리는 데는 약했다. 남자는 일러스트를 하고 싶어 대학에 들어갔지만, 디자인학과에서는 말 그대로 디자인만 가르쳤다. 남자가 뭔가를 직접 그린 경험은 입시 미술을 공부했던 게 다였다. 그 이후에는 잡지나 만화를 모사하며 기본적인 감각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여러 재료를 이용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데 일종의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직접 그린 그림에는 편집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그리는 것은 날아간 씨앗들이었다. 여자는 동화용 삽화를 그리고 있었다. 동물들의 횡포를 피해 꽃들이 날린 씨앗들의 이야기였다. 남자는 턱을 괴고 그림을 지켜봤다. 씨앗들은 바람이 불면 어디로든 날아갔다. 날아가 사람들의 어깨에도 앉고 지붕에도 앉았으며 담벼락에도 앉았다.

그건 잠시였다. 또다시 바람이 불면 어딘가로 날아가야 했다. 그래도 씨앗들은 행복했다. 지겹게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고, 동물에게 밟혀 죽을 염려도 없었다. 씨앗들은 바람을 통해 자유로웠고, 날아간 곳에는 항상 누군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자의 손끝에서 생겨났다.여자는 스케치한 종이 위에 파스텔을 칠했다. 씨앗에 엷고 노란 바탕 선이 그려졌다. 여자는 씨앗의 배경에 하늘색 파스텔을 칠하고, 그 위에 밝은 수채화 물감을 덧칠해 파스텔을 얇게 폈다. 여자의 손이 크게 움직였다. 그러자 파란 하늘이 종이에 가득 찼다. 여자는 압지로 남아 있는 습기를 제거하더니, 이번에는 딱딱한 파스텔을 이용해 씨앗을 그렸다. 여자의 손이 세밀하게 움직이자 씨앗 표면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생기고 표정이 그려졌다. 여자는 또 다른 파스텔로 씨앗의 표면을 색칠하고 바람의 결을 만들었다. 일정한 리듬을 만들며 여자의 손이 빠르게, 때로는 섬세하게 움직였다. 종이 위에 바람이 불었고, 씨앗들이 바람에 실려 하늘을 날았다. 강한 선이든 얇은 선이든, 또 움직이는 것이든 멈춰 있는 것이든, 여자의 손이 움직이면 생생해졌다. 지켜보던 남자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붓이 만들어낸 교묘한 리듬감 때문인지 약간의 나른함을 느꼈다. 미세한 전율이 남자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남자는 순간 낯선 감정을 느꼈다. 남자와 여자가 앉은 세 평의 공간이 일상에서 툭 떨어져 나온 듯했다. 여자의 그림을 보는 것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여자가 붓을 놓았을 때 남자는 턱을 괸 채 물었다. 매번 일찍 나오고 늦게 퇴근하는 것 같던데…… 이 근처 살아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돌연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 몸을 감싸던 나른함이 그 표정에 확 달아났다. 세 평 공간도 평소와 다름없이 현실적으로 돌아온 듯했다. 주제넘은 짓이었나, 남자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남자는 무안해져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여자는 빈 종이를 꺼내더니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남자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과 그 건물을 둘러싼 세 건물이었다. 뭐예요? 내가 사는 곳. 여자가 숫자를 썼다. 247번지? 남자가 묻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종이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자는 한참 동안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건물. 여자가 말했다. 그 건물 207번째 계단이 있는 층, 열일곱 번째 집.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찾아가려면 계단을 다 올라야겠네요.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남자가 말하자 여자가 대답했다. 그 정도 노력 없이 남에 대해 알려고 했어? 남자는 그때만 해도 여자의 말을 좇아 계단을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십일 층임을 알리는 표지가 벽면에 붙어 있다.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옥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눈으로 표지를 훑고 지나고, 입은 여전히 숫자를 중얼거린다. ……백오십육, 백오십칠, 백오십…… 그때 누군가 계단 문을 벌컥 연다. 남자는 ‘팔’을 내뱉지 못하고 입속에 숨긴다. 누군가 계단으로 들어온다. 사내다. 남자가 서 있는 곳에서 두 층 정도 아래다. 남자는 소리 죽여 계단에 앉는다.

쿵,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벽을 치는 소리다. 벽을 치는 사내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상사나 동료, 헤어진 연인이거나 자신에게 하는 말일 거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는지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점점 커진다. 남자는 미동도 않다가 눈을 감는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남자는 그런 때 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나는 울창한 대나무숲을 찾아가 하고 싶은 말을 외치는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박두장이처럼. 또 다른 하나는 오래된 나무에 구멍을 내어 그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써넣은 뒤 구멍을 메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가 오래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방법이다. 어느 나라 부족이 써먹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무를 태우는 거였다.

남자는 자신의 오래된 나무를 떠올린다. 항상 뭔가를 넣어두기만 했지 그것들을 다시 꺼내본 적은 없다. 아마 지나간 시간들이거나 그때에 바랐던 소망일 거다. 그것들이 어두운 구멍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뒤섞여 있을지 남자는 문득 궁금하다. 그러나 꺼내 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말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누구나 대나무숲이나 오래된 나무 하나씩은 갖고 있을 테지만 오래된 나무가 대나무숲이 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부족 사람들은 나무를 태우는지도 모른다. 아마 사내는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사내의 오래된 나무는 남자로 인해 대나무숲이 될 수도 있다. 철컥,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사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계단실은 다시 텅 빈 듯 고요하다.

십오 층, 십오 층 반, …… , 십육 층. 천장이 점점 낮아지더니, 더 이상 계단이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마지막에 내뱉은 수는 240이다. 남자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벽에 붙은 ‘16F’ 표지가 더 올라갈 수 없다는 경고문처럼 버티고 있다. 남자는 표지와 끊어진 계단을 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하다. 며칠 동안 계단을 오르던 모습이 남자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계단을 오르며 남자는 이건 비현실적이야, 라고 되뇌었다. 여자의 말만 듣고 여자를 찾아 계단을 오른 것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함정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247개의 계단이 있는 건물을 올라 207번째 발 디딘 곳에 닿은 층, 여자가 사는 곳. 남자는 여자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가 그것을 엿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종이를 내밀었을 때, 남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여자가 건넨 종이에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연습 삼아 그려본 거야. 여자는 코를 실룩거렸다. 여자가 건네주는 게 남자의 초상화인데도 그녀는 누군가 의뢰한 그림을 넘겨주는 표정이었다. 여자가 코를 움직일 때는 부끄러울 때인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언제 그린 걸까. 남자는 자신의 눈치를 보다 고개 돌리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영락없이 그림쟁이인가 봐. 사람들이 나를 외모로 판단하는 건 싫어하면서 나는 겉모습을 그리고 있으니.

이후로 남자는 여자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자주 지켜봤다. 여자가 든 붓이 하얀 백지에 닿으면 어떤 것이라도 생생해졌다. 붓의 터치와 색의 조화가 남자를 매료시켰다. 여자는 무표정했지만 그림을 지켜보는 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붓을 쥐어 주기도 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조금씩 그린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희열을 느꼈다. 그런 시간이 늘어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에게 직접 회화를 공부한 사람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건 몰랐다는 듯 여자가 말했다. 그래도 회화 한 사람보다 디자인 감각은 뛰어날 것 아냐. 제각기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 지금 나한테 배우니까 디자인 감각에 회화 능력까지 갖추면 되겠네. 이렇게 여자가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말하는 것은 남자였다. 내용도 다양했다. 학교 다닐 때 일부터 입사까지. 여자는 남자가 말하면 가끔씩 답해줄 때도 있었고, 또 대답하는 대신 그림을 넘겨주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가 그림 그리는 것이 말하는 대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여자는 카니발을 소개하는 정보지 삽화를 그렸다. 남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 옆에 섰다. 여자는 여러 가지 색으로 화려한 카니발을 표현하고 있었다. 중세의 어떤 축제 광경을 풍자적으로 그려 놓은 그림. 도시에 벌어진 축제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그림을 들여다보다 남자는 놀랐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즐거운 듯 보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진짜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림 속 마을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고, 그들은 광대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사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돌아다녔고, 어떤 이는 집단 구타를 당해 다리뼈와 갈비뼈가 튀어나왔다. 마녀사냥의 광경도 펼쳐졌다. 광장에 높게 쌓은 단 위에서 한 여자가 화형당하는 모습이었다. 불에 타 죽는 사람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똑같은 가면을 쓴 것처럼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그림을 보던 남자는 몸서리쳤다. 남자는 오래전, 카니발을 재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학교 행사의 일환이었다. 카니발의 특성은 모두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그 점을 살리고 싶었다. 단순히 전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미술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이 여러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행사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바랐다. 마지막 행사에는 가면을 만들어 써오도록 했다. 축제는 예상 외로 성과를 거두었다. 학교를 찾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격려했다. 지금을 즐겨. 학교 졸업하면 아무것도 없어. 사람 관계라는 게 아주 더럽다는 걸 느낄걸. 밖에 나가면 어찌나 권력 횡포가 심한지. 남자를 비롯한 후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행사였기에 남자에게 그 카니발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자의 그림은 다르다. 하나도 유쾌하지 않다. 여자의 축제는 이런 것이었나, 남자는 생각했다. 그때 그림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그리다 만 흔적이었다.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집 안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여기는…… 남자의 말에 여자가 종이를 가져갔다. 응, 아크릴로 덮을 거야. 여자가 말했다. 고생해 그린 걸 왜 그냥 덮습니까. 여자는 남자를 힐긋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카니발은 분명 모두가 즐거운 날이었겠지. 그날만 고대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데 그게 다일까? 여자는 미완인 부분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시간에 누군가는 무엇인가가 두려워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지는 않았을까. 남자는 여자를 쳐다봤다. 어쩌면 마녀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그런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들에게 방법은 두 가지야. 그들과 같은 가면을 쓰고 광장으로 나가든가, 아니면 광장에는 얼씬도 않고 어딘가에 숨는 거. 순간 남자는 여자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물을 많이 탄 물감처럼 희미했지만, 남자가 처음 본 여자의 표정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계를 본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다. 남자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갈 심산으로 옥상 문을 찾는다. 십육 층은 계단이 끊긴 자리여서인지 문 달린 위치가 다른 층과는 다르다. 남자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젖힌다. 바깥 공기를 맡을 거라 예상한 남자의 눈앞에 두 개의 문이 떡 버티고 서 있다. 남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머릿속에 예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남자는 문을 하나씩 연다. 남자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첫 번째 문을 열자 다른 층처럼 복도가 나온다. 복도 저쪽으로 기계실과 설비보관소가 차례로 이어진다. 남자는 문을 닫고 복도를 빠져나온다. 남자가 또 다른 문 앞에 선다. 문 중간쯤에 자물쇠가 걸려 있다. 남자는 자물쇠를 건드려 본다. 잠겨 있지는 않고 걸려만 있다. 남자는 자물쇠를 빼고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 남자 앞에 직선 계단실 하나가 나타난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남자는 조마조마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일곱. 계단은 일곱 개다. 일 층부터 옥상에 이르는 계단이 247개인 건물을 찾은 거다. 첫 관문을 통과했으니 207번째 계단이 있는 층을 찾는 두 번째 관문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문을 힘겹게 당긴다. 이음매 부분이 녹이 슬었는지 뻑뻑하다. 문이 열리고 바깥바람이 얼굴로 달려든다. 남자는 옥상 난간 앞에 선다. 눈앞에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회색빛 대기 속에 빌딩들이 서 있다. 그 빌딩에는 제각각 서로 다른 형태와 숫자의 계단들이 있을 테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거다. 남자는 왔던 길로 몸을 돌린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지금이라면 여자가 수수께끼를 내듯 알려준 여자의 방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남자는 올랐던 계단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시 일 층에서부터 207개의 계단을 올라야 할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의 계단 수가 몇 개라는 것을 알아두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남자는 궁금해진다. 열 명 중 여덟 명? 아니면 나머지 두 명? 여자는 답을 알고 있을까.

한 달에 한 번인 회식은 언제나 남자의 선배가 일장 연설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건 시작을 알리는 선언 같았다. 연설을 끝내면 선배가 직원들에게 일일이 맥주를 부어주고 격려했다. 그럴 때면 모두들 긴장했다. 마지막으로 남자 이름이 불려졌다. 선배는 별 말은 하지 않았으나 뭔가 남자의 목덜미를 누르는 듯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가 끌었으니 더 잘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오래전 축제 때 학교에 찾아와 학교 밖 세계의 고통을 토로하던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회사에서 본 선배는 그때 그런 표정은 지어본 적이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술자리가 이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여자 이야기가 테이블에 오갔다. 남자는 여자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옆 사람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안 와. 채식주의자거든. 그는 낄낄거렸다. 남자의 앞사람도, 앞사람의 옆 사람도. 애인이 떠나고 많이 먹어서 살이 쪘대. 에이, 그게 아냐, 원래 뚱뚱했는데 애인이 살 좀 빼라고 그랬다. 그래서 지금 샐러드만 먹고 고기는 안 먹는 거 아냐? 하긴 회식 자리에 나와서 물만 먹고 있으면, 옆 사람이 눈치 보여서 어디. 그 체격 어떻게 유지하나 몰라. 남자는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사회성이라고는 없잖아. 혼자 처박혀서 뭐하는지. 가끔 나가기는 하잖아. 참, 내가 봤는데 나갔다 들어오면 품속에 뭘 숨기고 들어와. 우리 앞에서 내숭 떨고 간식이라도 먹나 보지? 다들 웃었다. 남자는 맥주만 마셨다. 그런데 그거 다 근거 있는 얘기예요? 돌연 남자가 물었다. 옆 사람이 남자를 쳐다봤다. 앞사람과, 그 옆 사람도. 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이봐, 신입! 선배가 남자를 불렀다. 사람들이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선배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남자의 눈엔 다들 ‘8’이라는 가면을 쓰고 앉아 있는 듯했다. 남자만 ‘2’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문득 여자가 그린 카니발 그림이 생각났다. 남자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여자가 어딘가 어두운 집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일 층부터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잠시 앉았던 112번째 계단을 지나 곧 사내가 떠들던 158번째 계단을 지날 것이다. 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댄다. 남자는 층간 계단 수를 알고 있다. 207번째 계단이 몇 층인지는 계산을 해봐도 알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계단을 하나하나 직접 밟고 오르자고 생각한다. 직접 계단을 오르지 않았더라면 건물에 247개의 계단이 있는 줄 몰랐을 거다. 여자가 남자에게 계단 수를 알려준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여자의 말이 부쩍 늘게 된 것은 사람들이 남자의 초상화를 보면서부터다. 남자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남자는 그들에게 여자가 그려줬다고 말했다. 누구든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쳐지는지 궁금한가 보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여자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그들의 말투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그들 중에는 캐리커처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 평 남짓한 화실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림을 부탁하거나 여자와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여자에게 사교적이지 않다거나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당신이 꼭 그런 것 같아요, 라고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그림을 그려주며 그림에 사용된 재료의 특성이나, 누군가를 그릴 때의 일화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줄곧 여자에 대해 말하기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제 여자에게 이야기를 듣는 처지로 바뀌었다.

여자는 처음 특기를 발견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집중력은 대단했다. 사람들이 여자를 찾고, 여자가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는 이제 그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들에 대한 것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여자는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모두 하려는 사람처럼 항상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여자가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잦아졌다. 남자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여자는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며 알아가는 중이었다. 여자에게는 특별한 변화였을 것이다. 여자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씨앗처럼 행복해 보였다. 남자는 그 표정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선배가 남자에게 전화를 한 건 늦은 밤이었다. 너 도대체 사내자식이 입이 왜 그래? 선배는 다짜고짜 거친 말을 내뱉었다. 남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 내가 끌어왔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느냔 말이야. 남자가 전화를 받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지나갔다. 사무실에서는 알게 모르게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 때문에 패가 나뉘거나 다시 합쳐졌다. 사무실 사람들은 그 중심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느냐고 나서서 여자에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고, 사람들은 여자가 없을 때면 여자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점점 여자에게서 멀어졌다. 여자도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남자는 훗날 생각했다.

이백오, 이백육, 이백칠…… 남자는 난감해진다. 208번째 계단을 밟아야 십사 층이다. 207번째 계단은 아직 중간일 뿐이다. 혹시 잘못 센 것은 아닌지 남자는 초조해진다. 여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남자는 눈을 감는다. 남자는 남자가 경험하고 미리 알고 있던 사실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본다. 남자의 경험을 지우는 대신 남자는 여자가 된다. 잠시지만 여자처럼 생각해 보려 한다. 남자는 눈을 뜨고 208번째 계단을 밟는다. 그리고 복도로 이어진 철체 문을 당긴다. 문을 열자 복도 바닥을 밟기 전, 아래로 디딤판이 하나 있다. 남자는 디딤판을 밟고 복도에 내려선다. 남자는 207번째 계단이 있는 층에 선 셈이다. 아니, 여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의 사고방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여느 때처럼 둘째 주 금요일에 회식이 있었다. 불판에 붉은 생고기가 올라갔고 지글거리며 기름이 들끓었다. 단합을 도모하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술잔을 돌리며 결속력을 다졌다. 지난 일은 다 잊자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선배가 남자를 불렀다. 신입이라는 말 대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회식 전에, 선배는 이왕 소문이 난 것 괜히 약점 잡히지 말자며 남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게 숨기지 말고 대놓고 말하자는 뜻인지 남자는 그때 알았다. 저놈이 학교 다닐 때부터 노래 하난 끝내줬거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끝에서 숟가락을 꽂은 술병이 넘어왔다. 남자가 그것을 받으려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니 식당 출입문에서부터 여자가 신발을 벗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태연하게 테이블로 다가왔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이쪽으로 와. 누군가 마뜩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잔이 돌며 술자리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누군가 여자에게 술을 따랐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한번에 마셨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여자에게 술을 따랐다. 초상화 고마워요. 누군가 여자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이었다. 저쪽 어디서 여자에게 말했다. 술만 먹지 말고, 안주도 좀 먹어. 그래, 고기를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지. 설마 진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 자리 곳곳에서 한마디씩 끓는 기름처럼 튀어나왔다. 남자는 문득 여자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자는 눈앞의 잔을 들어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는데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남자는 술잔을 입에 댄 채 여자 쪽을 힐끔 쳐다봤다. 순간 남자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여자가 잔뜩 기름기가 묻은 고기를 입에 집어넣어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남자의 목구멍까지 그만하라는 말이 나왔다 들어갔다. 입이 가득 찼는데도 여자는 계속 고기를 우겨넣었다. 붉은 여자의 입술이 흉하게 번졌고 입 주위에 기름이 잔뜩 묻었다. 접시만 보며 고기를 우겨넣던 여자가 한순간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눈을 돌려 버렸다. 가슴이 뛰었고, 다른 한편으론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을 느꼈다.


여자의 눈이 젖어 있던가, 조금 전의 일인데 남자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여자를 외면한 건 남자만이 아니었다. 다들 여자를 보지 않고 말없이 술만 마셨다. 여자가 입을 틀어막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들어온 문을 향해 뛰어갔다. 다들 그 모습을 넋 놓고 쳐다봤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음식점 골목 뒤편에서 방금 먹은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자 여자가 남자를 뿌리쳤다. 남자는 여자가 다 토해내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여자는 사라졌다.

여자는 며칠이 지나도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가 보이지 않자 ‘실종’이라고도 했고 ‘도망’이라고도 했다. 남자처럼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는 정말로 여자가 사라진 것 같았다. 여자가 항상 앉았던 공간에 주인 없는 붓과 물감만 남아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 선배는 여자의 짐을 치우라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선배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날 모두가 퇴근한 후, 남자는 여자의 책상 앞에 앉았다. 짐이라고는 여자가 야채주스를 마시던 머그잔과 물감을 만질 때 둘렀던 앞치마밖에는 없었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남자는 그것들을 꺼내 작은 상자에 넣었다. 돌려줘야 했지만 남자가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연락망에 기재된 전화번호밖에 없었다. 남자는 자꾸만 여자가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가 복도를 걸어간다. 지날 때마다 조명이 켜졌다 꺼진다. 남자는 열일곱 번째 집을 찾고 있다. 여자가 있는 곳이다. 남자는 복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발걸음으로 걷는다. 복도 제일 끝에 이르러 남자는 문에 적힌 호수를 확인한다. 남자는 낙심하고 만다. 복도의 집은 열여섯 번째가 끝이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서성인다. 건물을 잘못 찾은 건가, 하는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지난다.

그때 남자의 눈에, 복도 제일 끝 집의 옆에 난 문 하나가 보인다. 다른 집들과는 색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남자는 그 문 앞으로 걸어간다. 문 앞 센서가 고장 났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남자는 문 손잡이를 잡는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 남자가 힘을 주자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며 문이 열린다.

문을 열자 집안에 차 있던 물감 냄새가 휙 끼쳐온다. 공중에 오랫동안 부유하고 있던 냄새다. 남자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선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창문은 블라인드에 가려져 있다. 복도 조명마저 들지 않아 실내가 어두컴컴하다. 남자가 천천히 집 안을 걷는다. 집 안은 완전히 비어 있다. 오랫동안 누구도 살지 않은 듯하다. 남자는 창가로 가 내려져 있는 블라인드를 걷어낸다. 밝은 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남자는 눈이 부시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남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 남자의 눈을 끄는 것이 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집안 벽 전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도시 속 건물과 건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벽에 그려진 그들의 모습은 매우 희극적이어서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하다. 남자는 손으로 그림을 훑는다. 그린 지 오래되었는지 그림 위에 앉았던 먼지가 남자의 손에 묻는다. 그림들은 밝거나 화려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남자는 시선을 옆으로 옮긴다. 다른 그림들과는 다르게 어두운 방 하나가 그려져 있다. 남자는 그 방을 자세히 살펴본다. 그리고 곧 그곳이 어딘지 깨닫는다. 207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면 그 층 복도 끝에 있는 방. 방 안에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웅크려 앉아 망원경을 들고 건너편 건물의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뛰쳐나온 여자를 따라 남자는 담벼락에 앉았다. 지나는 사람이 없어 조용했다. 조금 떨어진 번화가로부터 소음이 간혹 들려올 뿐이었다. 여자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망원경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어. 여자는 누군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망원경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 건물이 여자가 사는 곳이었다. 여자는 집으로 들어와 사무실에서 들고 온 망원경에 눈을 가져갔다. 망원경 렌즈로 사무실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망원경은 사람들을 여자에게로 가까이 끌어왔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늘 있었지만 여자에게는 그들이 건물 밖에서 지켜보는 것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망원경 렌즈에 눈을 가져갔다. 사람들 모르게 그들 모습을 지켜보며 여자는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내밀한 부분까지 보게 되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을 때면 다른 사람의 책상을 뒤지던 기획팀 직원을 보았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상사의 책상을 발로 차는 사람을 보았다. 늦은 저녁에 사무실에 단둘이 남아 연애를 즐기는 직원들도 보았다. 여자만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여자는 가슴속에 감춰 둬야 했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그림을 부탁하면서 말을 걸어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하며 그들끼리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가면이었다. 나도 가면 하나가 필요했는지도 몰라. 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여자의 서랍에서 가져온 망원경을 꺼낸다. 남자는 망원경을 눈으로 가져간다. 망원경 렌즈 속으로 사물이 가깝게 다가온다. 남자는 사무실 쪽으로 망원경을 돌린다. 남자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렌즈 안에 가득 찬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업무에 열중하는 평범한 모습이다. 렌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삽화 같다.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행동밖에는 없다. 사람들의 행동에 소리와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었을 거다. 사람들 사이에 파티션으로 가린 세 평의 공간이 보인다. 항상 저곳에 있었으면서도 사람들과의 거리가 이 망원경으로 보는 거리보다 멀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문다.


남자는 붓을 든다. 책상 위에는 하얀 종이가 있고, 기획팀에서 넘어온 서류도 펼쳐져 있다. 남자는 약간의 숨을 머금고 붓을 들어 종이에 갖다 댄다. 이번에 개업한 꽃집에서 쓸 캐릭터를 그려 달라고 했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선들이 생겨나고 갖가지 색이 입혀진다. 여기 신입. 선배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든다. 포트폴리오 봤는데 페인터 다루는 실력이 끝내줘. 선배가 물러가고 신입사원과 남자 둘만 남는다. 남자는 아무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뒤쪽 책상을 가리킨다. 그게 신입의 자리다. 돌아서는 신입을 붙잡고 남자는 문제를 낸다. 자네가 있는 이 층까지 오르는 데 몇 개의 계단이 있는지 혹시 알아? 신입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다.

남자는 계단을 오른다. 하나 둘 셋……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숫자를 센다. 남자가 오르는 건물은 벌써 몇 번째 오르는 계단이다. 남자는 208번째 계단을 밟고 통로에 난 문을 연다. 디딤판을 밟고 복도에 내려선다. 207번째 계단을 밟은 셈이다. 남자는 복도를 따라 걷는다. 저 끝에 열일곱 번째 집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다. 남자는 그 집 현관 앞에 선다. 문을 열기 전에 항상 기대를 했다. 혹시 여자가 웅크리고 있지는 않을까. 남자가 문을 열자 물감 냄새가 풍긴다.

남자는 가져온 가방을 내려놓고 벽 앞에 쪼그려 앉는다. 가방을 열자 물감과 붓이 가득 차 있다. 얼마 전 남자는 벽에 그려진 그림 위에 흙색으로 덧칠했다. 여자가 눈에 망원경을 대고 있는 부분이다. 남자는 덧칠한 부분을 만져본다. 물감이 아주 잘 말랐다. 남자는 붓을 들어 그 위에 선을 긋는다. 서툴지만 조심스럽다. 점점 남자의 손이 빨라진다. 남자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선이 그어지고, 또 겹쳐진다. 남자는 가끔 창문 틈으로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본다. 어디선가 여자가 보고 있지 않을까. 두 눈에 망원경을 대고 남자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붓을 내려놓고 남자가 일어선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점점 남자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 자리에서 빛이 잠시 흔들린다. 거기에 씨앗 하나가 있다.

남자는 일어나 붓과 물감을 가방에 넣는다. 가방을 든 남자가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간다. 그러다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이 그린 씨앗을 바라본다. 황토빛 대지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다. 씨앗은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고, 또 누군가와 항상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자라면서 동물에게 짓밟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씨앗은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단단하게 지탱하며 점차 자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도 아름다운 그것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것이다. 남자는 씨앗을 보며 훗날의 모습을 눈으로 그려본다. 그것은…… 꽃이다. 아주 붉고 생명력 넘치는 싱싱한 꽃이다.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오래된 나무의 구멍을 메우듯 조용히 문을 닫는다. 여자의 오래된 나무는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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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의 경향-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세계04)

대한민국 신춘문예/문학평론 2008/11/09 00:16

작품명 :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의 
 경향 -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
 성 명 : 최성민
 
 
 
<심사평> 이재선 문학평론가 
입체적 시각 돋보인 평론

19편의 응모 평론을 대하면서 맨 먼저 감지한 것은 오늘의 우리 비평의 글쓰기 양상이 해설비평의 경향을 주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평의 존재 기능과 역할이 작품(작가)과 독자와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중개와 밀접된다는 점에서 당연한 현상인지로 모른다. 그러면서도 매우 정감적인 언어로 이루어지는 해설비평이 지닌 대상의 단일화, 해석의 평면화 현상을 넘어서서 한 시대의 문학적 성향의 기상도를 종합적으로 해독하는 감식안, 문제의식의 제기, 다중적 시각 등에 의한 입체적이고 확산적인 비평의 양상도 함께 공존해야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최종적인 고선의 대상이 된 작품은 ‘몸의 언어로 시쓰기―채호기론’(이승환)와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 경향―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최성민)이다.


전자는 매우 세련된 언어와 문체로 채호기 시 세계의 몸의 시학, 즉 현상학적인 해석으로 몸의 지각과 시적 형상화를 투시한 글이다.


반면 후자는 이 시대에 있어서의 소설의 특유한 서사방법 내지 글쓰기 행위의 현저한 한 국면을 서사 주제학의 관점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는 글이다.


응축적 시선과 확산적 시선의 대비라고나 할까. 다같이 독자적 가치와 잠재력을 지닌 두 글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고뇌로운 저울질 끝에 해설적 시각보다는 다소 입체적이고 확산적 시각을 지향하려는 후자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밖에 ‘원형상징의 정원―박라연론’(배상현), ‘주술적 언어로 펼쳐내는 그로테스크한 죽음 이미지의 난장’(정순영), ‘외출, 신(新) 여성의 탄생―권지혜론’(김윤선), ‘숲 안에서 숲 밖을 보기, 그 역설적 인식을 통한 자기 구원의 이야기―이청준론’(이호), ‘기억과 고백, 혹은 유보된 성장의 기획―신경숙론’(허병익), ‘천국이 아닌, 그러나 천국보다 아름다운 곳―이성복론’(채영) 등에도 분발을 바라면서, 당선자에는 좋은 비평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작품명 :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의 
 경향 -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
 성 명 : 최성민
 
 
 
문학, 두렵지만 가야할 길
말을 하고 싶었다.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변화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하려 하면 할수록 나의 입을 거쳐 나오는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메아리는 미숙하고 초라한 것이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짧은 공부는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를 깨닫는 과정이었나 보다. 당선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감정은 역시 두려움이었다. 당선 소감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게는 너무나 과분한 결과가 아닐지 조심스럽다. 그저 아득할 뿐이다.

아득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나의 앞길에는 여전히 문학이 놓여 있다. 앞으로 진행할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문학의 위기를 운운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문학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산업과 자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더욱이 김훈과 김영하의 소설처럼 과거, 혹은 과거의 이야기들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직은 세상과 나 자신의 구석구석을 보듬어야 할 곳이 많아서 부담스럽지만, 문학을 통해 나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큰 선물을 받게 되어 기쁜 마음도 감출 수 없다.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려야 할 분이 너무나 많다. 먼저 어려운 고심 끝에 부족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멀리서 격려를 아끼지 않아주시는 김병욱 교수님, 게으르고 나태함을 일깨워 주신 우찬제, 김경수 교수님, 그리고 외롭고 어려운 길을 함께 가고 있지만 늘 서로에게 자극과 위로가 되는 선후배 동학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못난 아들을 믿고 견뎌주신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감사한 마음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약력>

▲1975년 서울 출생

▲2003년 서강대 대학원(국문학) 박사과정 수료

 
 
작품명 :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로서의 역사소설의 
 경향 -소설의 전유(專有)와 향유(享有)
 성 명 : 최성민
 
 
 
1. 글쓰기의 한계와 복제의 글쓰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욕망이다. 소설은 하나의 허구적 세계에 대한 욕망을 언어로 담고 있다. 소설의 언어는 그 욕망을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드러내는 도구이자 장치이다. 언어는 현실을 재료 삼아 재단된 가상적 기호이며, 그러한 언어를 통하여 소설은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이미 현실로부터 이중적(二重的)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21세기. 구조주의를 넘어서, 또 정신분석학을 넘어서, 수많은 담론들이 높바람처럼 불어대는 바로 지금은 언어의 허구성이 모조리 폭로된 시대다. 소설의 운명을 자각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또다시 새로운 허구의 세계, 우리의 소설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이미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날 다시 끄집어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들이 있다. 과거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이다. 말하자면, 현실이 아니라 ‘이미 이야기인 것’을 원재료로 삼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패러디한다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언어의 허구성이 모조리 드러나 있고, 모든 텍스트는 상호 참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경향의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또 다른 복제일 수밖에 없으며, 소설은 ‘자기 복제’를 통해서만 쓰여진다는 자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텍스트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다’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이미 쓰여진 텍스트 속에서 일어났던, ‘약호화(encoding) 과정’과 ‘글쓰기 행위’를 다시금 되짚어가면서 해호화(decoding)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글쓰기 행위 자체를 주목하는 것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이 아닌 ‘텍스트’를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저자의 권위에 의한 저술이 아니라 스크립터에 의한 전사(轉寫)를 언급하는 것은, 백색의 창조라는 허위를 벗겨내고 ‘다시 쓰기’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결과이다. 바로 지금, 글쓰기의 한계와 서사의 한계를 깨달음으로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소설들이 있다. ‘글쓰기의 복제’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 글쓰기가 있다. 그것은 텍스트 주변 언저리보다는 텍스트 자체와 소설의 위상을 비추어보는 ‘자기 반영적’이고 ‘패러디’적이며, ‘나르시스적 서사’이다. 어쩌면, 진실과 실체에 사로잡혀 있는 형이상학적 사고는 이미 처음부터 그 자체로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김탁환과 황석영의 근작을 비롯한 역사소설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글쓰기 흐름과 무관하지 않으며, 여기 특별히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편의 장편소설을 주목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1)와 김영하의 ‘아랑은 왜’(문학과지성사, 2001)가 그것이다.


2. 삶과 죽음 사이를 갈라내는 ‘칼날’의 텍스트


김훈의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물들을 밑바탕으로 하여 허구적으로 다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실존인물을 서술자로 삼고 있다는 점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소설이 출항을 앞두고 거두어들여야 할 닻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의 역사적 크기,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습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 사건과 그 인물과 관련된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기존의 이야기들. 그것들을 넘어서서, 다시 무언가를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그 전쟁터에 목숨을 내걸고 있는 한 장군의 입과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지 않아도, 이야기의 끝이 곧 죽음과 맞닿아 있다고 한다면, 이미 있는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가는 과정은 죽음으로부터의 연기(延期)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칼의 노래’는 한 인물의 죽음보다 훨씬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야기의 끝을 유보하고는 있지만, 끝내 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야기는 다시 끝이 날 운명인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장에서의 이순신의 삶은 ‘난중일기’와 함께 시작하여 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에 대한 ‘다시 쓰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칼의 노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위에서만 존재하는 ‘외줄타기’의 텍스트이다. 이 외줄타기가 이어지는 한, 외줄 위의 이순신의 생명은 유지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생명이 유지되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으며, 이야기도 끝나지 않고 소설은 지속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마치 이순신의 ‘장계(狀啓)’와 같은 텍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장계는 이순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줄 것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할 것이지만, 결국은 그 장계는 이순신의 목을 겨냥하는 칼날이 되며,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미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1권 58∼59쪽)


‘칼의 노래’가 충무공에 대한 수많은 기존의 텍스트들을 새롭게 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 바꾸어 말하자면 완전한 허무와 무의미에 저항하여 발버둥치는 한 인물의 실존적 문제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더욱 극단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위악적 태도도 피할 길이 없다. 죽음이란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히 홀로되어 감당해야하는 사건이며,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1권 124쪽)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로운 싸움이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죽음에 직면한 충무공의 고통은 부하들이 굶어 죽는 가운데, 그야말로 ‘먹고 살아가는 사치’를 누리는 스스로에 대한 고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 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 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2권 53쪽)


이순신은 ‘수군 통제사’였기 때문에 살아야 했고, 소설 속의 ‘나’는 소설을 통제하는 서술자이기에 살아남아야 한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면서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나 다시 쓰는 이야기는 이미 그 죽음의 결말을 알고 있으며,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죽음을 유보시키면서 이어지지만, 어쩌면 죽음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더욱이 그 죽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다시 쓰기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죽음은 다시 쓰는 이야기의 출발이면서 결말이고, 이야기는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 이러한 역설적 문제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순신의 숙사 방안에 걸어놓은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免死帖)이다. 이순신은 수군 진영을 옮겨가면서도 이것들을 계속 자신의 방안에 걸어두고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내 운명의 지표인 것 같”(1권 168쪽)다고 말한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1권 129쪽)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 충동 사이를 갈라낸 자리에서 이순신이 겪어내고 있는 전쟁의 상황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국가와 그 국가를 쳐들어온 적들 사이의 대결이다. 이순신은 그 외적들과 맞서 싸운 민족사의 영웅이다. 그러나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대상은 외적뿐만 아니라 임금이기도 하다. ‘면사첩’을 보내온 것은 다름 아닌 임금이며, ‘면사첩’은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위협이다. 그리고 칼은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무기이면서, 적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 혹은 임금의 칼은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 수 있는, 죽음을 부르는 도구이다. 칼이 겨누는 곳은 어디라도 될 수 있고, 겨누는 곳이 달라질 때, 삶과 죽음은 경계를 넘나든다.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2권 21쪽)


면사첩과 두 개의 환도, 그들 사이 어딘가에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가 있고, 그 틈을 가로질러 베어낸 곳에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 출발이자 끝이 되며, 그 중간에 위치하는 이야기. 그것은 바로 ‘다시 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다시 쓰여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종결되는 지점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것이 다시 쓰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다시 쓰는 이야기는 또다시 종결을 향해 치닫는다. 따라서 죽음을 피하고 유보시키면서 텍스트는 탄생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죽음 충동을 통해 또 다른 종결을 향해 나아간다.


임금이 보내온 고기 덩어리를 보면서 “적의 칼에 베어지거나 임금의 칼에 베어질 때, 나의 베어진 단면”(1권 158쪽)을 떠올리면서도 스스로 적장 아베를 칼로 베어내며 그 목숨을 가로지르는 칼날에서 “뜨겁고 뭉클한 진동”(1권 176쪽)을 느끼는 것이나, 자신이 죽을 사지(死地)를 물색하며 찾아다니지만 “죽어야 할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답답함”(1권 151쪽)에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바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한 충동이라 할 수 있다. 죽음 충동은 이야기를 종결로 이끌어 나가는 힘,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며 에너지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장 원초적인 자기애의 감정일 것이며, 나르시시즘을 넘어선 곳에는 늘 타나토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끝나는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이 맞서고 있는 치열한 대립의 종결에, 죽음이 있고 이야기의 끝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칼의 노래’의 ‘나’ 이순신의 몸에는 “적과 임금이 동거”(1권 182쪽)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묘한 역설을 통해 ‘이미 있던 이야기’를 되살려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 ‘칼의 노래’란 텍스트의 본원적 욕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쓰러져 있던 육체를 부활시키거나 죽어있던 생명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던 시절로, ‘이미 있었던 진실들’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다. ‘이미 있었던 진실들’로써 허무와 무의미, 무내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소설 속의 언급처럼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1권 114쪽)는 것이건만, 그리고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1권 124쪽)고 말하건만, 완전한 허무, 즉 죽음은 무척이나 두려운 대상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마치 칼로 잘라낸 것처럼 그들 틈 사이에 있지만, 그 갈라진 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 소설 전체를 억누르고 있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실천이 바로 이 텍스트이다. 그런데 그 실천으로서의 ‘다시 쓰기’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근원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을 복원하려는 ‘근원적 사실’에 대한 욕망이다.


나는 김수철의 초안을 대폭 수정했다. 적병의 숫자를 모두 지웠고, 포격과 불화살로 깨뜨린 적선은 30척이며, 적의 수급(首級) 여덟을 얻었다고 고쳤다. 그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중략)…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5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1권 124∼125쪽)


김수철이 쓴 장계의 초안을 고치는 것은 ‘사실’이 ‘허위’로 인식될 때 죽음이 다가올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며,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의 역사와 진실된 근원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적 태도로 보인다. 소설 속의 ‘내’가 진실에 집착하며, 그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끼듯이, 이 소설 자체는 ‘진실’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고 있다.


근원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두 권으로 된 이 소설의 뒤에 ‘연보’와 ‘인물지’를 덧붙여 놓으면서 그것을 통해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길 바란다”고 말한, 작가의 일러두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과거의 역사가 모두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그 역사로 되돌아가 이순신의 ‘실존’과 진실을 탐구하기를 욕망한다. 이 소설에서의 ‘다시 쓰기’는 한 인물의 감춰진 진실의 내면을 밝혀내는 숭고한 탐색이며, 이데올로기로 착색된 ‘난중일기’를 그 내면의 근원적 기록으로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근원적 ‘진실’로 돌아가려는 시도이자, ‘이미 있었던 것’을 새로이 확고히 하는 것이면서, ‘이미 있었던 것’을 근원 회귀의 순환 고리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 쓰는 텍스트’를 통해 과거의 텍스트를 전유(專有)하려는 시도이다. ‘전유’란 본래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활용되는 개념으로, 식민지배 관계에서 상대의 것을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전적인 지배와 권한 하에 다시금 가져다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는 기존의 ‘역사’와 ‘과거’를 다시 쓰되, 본래 그것이 누리던 ‘진실’의 권한을 누리고자 하는 텍스트적 욕망이 담겨 있는 ‘전유의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그 소설적 욕망은 마치 ‘칼날’처럼 텍스트를 자신의 의도대로 저며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소설은 역사와 과거를 전유하는 텍스트가 된다.


3. 텍스트 판본들의 향기 속을 헤매는 ‘나비’의 텍스트


김영하의 장편 ‘아랑은 왜’는 그야말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즉 메타적 이야기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무엇을 얘기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의 측면을 극단적으로 집중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본래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나’(‘동서문학’ 98년 여름호)라는 중편 소설이었는데, 본래의 중편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던 현재시점의 ‘영주’란 인물을 통해 그녀를 설화 속 ‘아랑’과 중첩되게 만듦으로써 장편소설 ‘아랑은 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논자들이 평했듯이 ‘아랑은 왜’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인 이야기 겹들을 가지고 있는 다층적 액자 소설이다. 첫 번째 이야기 겹은 원설화(原說話)라고 할 만한 ‘아랑설화’이다. 이 소설은 실전(實傳)하는 이 설화를 기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허구적으로 창조해낸 비본(秘本) ‘정옥낭자전’이 두 번째 이야기 겹을 이루며, 김억균이라는 인물에게 근대적 탐정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추리소설’이 세 번째 이야기 겹을 이룬다. 네 번째 이야기 겹은 현재를 사는 ‘박’과 ‘영주’의 이야기인데, 이들을 통해 ‘아랑’의 이야기는 무시간적, 혹은 초시간적 이야기가 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마지막 층위는 작가가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부분으로, 일종의 피란델로적 기법이 적용된 부분이다. 또한, 그 겹겹의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어딘가에는 본래의 중편소설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나’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듯 ‘아랑은 왜’는 다층적인 이야기 겹을 통하여, 이야기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메타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정옥낭자전’이라는 허구적 비본을 언급하는 형식은 사실, 우리 역사 소설에서 그리 흔한 방식은 아니지만,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보르헤스의 여러 소설들을 떠올려 본다면, 그렇게 낯설고 새로운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랑은 왜’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지점은 그 여러 겹의 이야기 층위들을 너무나도 가볍게 넘나들고 있는 소설 속 작가, 혹은 서술자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소설을 쓰는 방식’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자세라기보다는 그저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고 즐기는, 장난스러운 놀이의 모습이다.


소설 속 역할을 맡을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러 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부분이라든지, ‘박’과 ‘영주’라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부분이 대표적인 예이다.


소설에 등장해보겠노라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몇 명의 배우가 오디션을 통과했다. 먼저 소개할 인물은 어사 조윤 역을 맡을 배우다.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남자다. 어깨는 구부정하여 비굴하게 보이나 막상 눈을 보면 범상치 않은 광채가 난다.(50쪽)


혹시 ‘서두’라는 장에서 잠시 등장했던 영주라는 인물을 기억하시는지. 우리가 ‘박’이라 부르는 인물과 관계가 있는, 이미 죽어버린 여자. 어쩐지 아랑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암시를 던져주는 여자다. 그러나 그때는 그 여자가 몇 살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따위의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97∼98쪽)


소설 속의 인물은 그 인물이 전형적 인물이든, 개성적 인물이든 간에 소설 속의 사건을 통해 드러나야만 인물의 행동이나 성격에 필연성이 생기고, 핍진한 이야기 전개가 가능하다. 소설에서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유의해서 살펴본다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변화하고 발전해온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대개의 고전소설에서는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에 외양부터 성격까지 한꺼번에 설명하고 한정해주는 서술이 이루어지는 반면, 근대소설에서는 인물의 행동과 갈등을 통해 제시된 사항들로써 독자가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랑은 왜’의 인물은 모든 인물이 허구적으로 꾸며진 ‘허상’임을 강조하듯이 형상화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원설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든,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든, 그 인물의 ‘인위적’ 형상화 과정 자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관습을 따르는 독자들은 이렇게 창조된 인물들이더라도 언젠가는, 잘 짜여진 이야기 흐름, 즉 플롯 위에서 움직이게 될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랑은 왜’에서의 인물들은 짜여진 플롯 위에서 활동하고, 갈등할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한다. 완성된 플롯이 끝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독살에 사용된 반묘를 찾아내고 그 용법을 김령에게 물어 알고 아랑의 실제 신분을 밝히기 위해 기생안(妓生案)을 압수할 것이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그런 장면을 얼마든지 넣어 작품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이 사건을 좀더 복잡하고 정교한 추리극으로 만드는 데 있어 이런 자료들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217쪽)


위의 경우처럼, 원설화인 ‘아랑설화’, 그리고 허구적 판본인 ‘정옥낭자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사건이나 장면을 개입시킴으로써 설득력과 핍진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노출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지고 변형된 이야기들의 조합은 제시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아랑은 왜’는 확정된 플롯에 따른 이야기 전개를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겹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존재하며, 서로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아랑은 왜’는 다양한 이야기 겹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야기(story)’다운 ‘이야기 겹’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겹들은 부실한 줄기에 매달린 꽃잎들처럼 불안하게 흔들린 채로 고정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결말 처리를 놓고서는 심지어 작가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는 상황이 제시되기도 하며, 등장인물이 내용 전개에 대해 극렬한 항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봐요. 박. 당신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제 생각을 말해도 된다면 저는 박이 아랑을 만나게 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중략)…


영주씨. 당신은 어때요? 저는 반대예요. 말하자면 소설 속의 영주는 어린 여자 밝히는 박이라는 남자에게 살해된 건데, 이건 그저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일 뿐, 여기다 무슨 다른 상징을 덧씌우는 건 반대합니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인 여성을 신비화하는 것은 남성 작가들의 전형적인 폭력입니다.(278쪽)


사실, 어떠한 소설이든, 심지어 기존의 이야기나 설화를 재구성하는 소설일지라도, 작가는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에 있어서 강력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롤랑 바르트나 미셀 푸코가 작가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독서를 위해서는 ‘작가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할 만큼 작가의 권위는 강력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출된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일 수 없다. 권력을 확립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노출된 이상, 그 권력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작가의 의도와 권위가 문제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작가가 글쓰기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모든 방면, 그러니까 인물을 형상화한다든지,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든지, 기존의 이야기를 변형시킨다든지, 시대적 배경을 설정한다든지 하는 모든 권력의 양상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글쓰기의 권력을 폭로하는 첩경이 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심지어 ‘아랑은 왜’라는 소설은 스스로 밑바탕으로 삼고 있는 원설화인 ‘아랑설화’조차 온통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아랑설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나 장소, 그리고 살인 장소를 비롯한 사건들의 핍진성 여부를 따지며, 그 다양한 판본들을 번갈아 의심한다. ‘역사’가 또 다른 판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 자체로 스스로 ‘역사’이길 부정하는 것이 되겠지만, ‘설화’는 생성의 과정부터 확정된 고정 판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랑은 왜’가 확정된 판본의 플롯을 제시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 겹들을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은 이야기의 근원을 ‘설화’에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텍스트적 욕망이 ‘근원의 부재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의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 쓰여지거나 이야기된 것 가운데 ‘날것’ 그대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며, ‘진실’과 ‘허구’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허구의 폭로, 혹은 허구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사실, 작가 김영하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던 부분들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찬 세상”(‘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라는 빈정거림이나,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흡혈귀’)는 경멸에 가까운 언급이 그러한 예이다. ‘아랑은 왜’는 이러한 허구성에 대한 폭로를 그야말로 소설 전면에 부각시킨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폭로의 결과는 무엇일까? ‘소설가’는 자신의 허구화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어떠한 ‘사실’에 대한, 어떤 ‘근원’에 대한 환상도 독자가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 특히 완성된 플롯을 끝내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소설가’는 자신의 권위와 권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방기(放棄)한다. 물론, ‘소설가’의 이러한 의도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이 텍스트 그 자체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실제 작가 ‘김영하’의 의도와 동일시된다는 점은 관습적 독서가 견지하는 ‘미메시스 환상’의 마지막 보루이다.


작가가 비워둔 그 자리에서 독자는 이야기의 빈틈들을 메워가면서 텅빈 ‘플롯’을 만들어 가야 한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이쪽저쪽의 이야기 겹들을 떠돌며, 어떠한 이야기들을 선택하고 연결할지를 고민하여 ‘놀’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분명해질 필요는 없다. 허구적 소설이든, 현실이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매우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부족한 정보들을 가지고 상상하고, 추측하고, 때로는 즐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이미 있던 이야기의 요소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작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16쪽)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오늘 우리집에 중국 음식을 배달하고 간 젊은이의 과거를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그는 그저 중국집 배달원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중략)…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기껏해야 단편적으로 알 뿐이라는 인식을 소설쓰기에 적용할 수도 있다. 이걸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읽는 사람들은 피곤해진다.(199∼200쪽).


‘아랑은 왜’의 복잡한 이야기 겹들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 겹 속의 인물은 그 안쪽 이야기 겹에 대한 독자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여러 이야기 겹들과 인물들, 작가들(혹은 서술자들)과 독자들을 넘나든다. ‘아랑은 왜’에서 텍스트란 작가에 의해서도, 원설화나 원이야기에 의해서도 확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는 원래의 이야기에 담긴 플롯과 인물 주위를 부유(浮遊)한다.


아랑의 전설에서 ‘아랑’이 왜 하필 나비가 되어 자신이 죽은 내막과 범인을 알렸는지 이유에 대해, 이 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혹은 추정된 ‘범죄의 서사’에 범죄 용의자를 포함시키기 위한 극적 장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인물과 사건, 그리고 ‘이미 있었던 이야기’들 사이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나비가 내려앉는 빈틈의 위치에 따라서 언제든지 새로운 서사는 만들어질 수 있다.


라캉에게 결여의 장소는 곧 ‘향유(jouissance)’의 장소였듯, 이야기의 빈틈들은 독자가 즐기고 놀 수 있는 ‘향유(享有)’의 장소이다. ‘아랑은 왜’는 ‘과거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화 속 이야기들과 그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노출된 권력’만을 지녔을 뿐인 ‘작가’로서의 한 인물과 한바탕 텍스트 위에서 즐기는 텍스트 공간이 된다. 그것은 텍스트를 향유하는 일종의 방식이며, 어떠한 근원도 없이 텍스트가 떠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사건을 만들어 나가게끔 하는, 텍스트 욕망의 놀이이다.


4. 소설의 ‘전유’와 ‘향유’


포스트 모던 시대란 언어의 허구성이 폭로된 세상이다. 그래도 허구적 이야기는 우리들 곁에 계속 머물고 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조그만 빈틈이 있는 한, 그리고 사람들이 현실에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는 한, 아마도 소설은 계속 쓰여질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욕망과 전략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소설은 허구적 글쓰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소설은 한 작가의 완전한 창조물도 아니며, 현실에 대한 완전한 반영물도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다양한 욕망을 해결해줄 ‘언어’로 된 꿈이며 ‘텍스트’로 된 환상이다.


오늘날 글쓰기 자체에 대한, 소설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과 고민으로부터 ‘소설’이란 서사 예술은 새롭게 변화되고 있으며,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소설’들이다. 흔히 ‘역사소설’이란 장르는 근대 소설의 탄생부터 유지되어온 장르이지만, 과거의 시간과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전복시켜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방식은 예전의 역사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시도일 것이다. 이제 그러한 시도, 그 다시 쓰기의 방식은 요컨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각각 ‘전유’로서의 글쓰기, ‘향유’로서의 글쓰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방식은 기존의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내면서도, 이야기의 근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혹은 이야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쓰여진다. 이 경우, 새로 쓰여진 이야기는 기존의 이야기의 근원을 탐색하거나, 그 근원을 새롭게 대체하는 ‘진실’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존의 이야기와 역사는 새로운 이야기에 의해 ‘전유’되는 셈이다.


후자의 방식은 기존의 이야기를 여러 겹의 층위로 해체해 놓고서, 그 파편들 위에서 사건들과 배경, 그리고 인물들, 심지어 작가까지 뛰어들어 놀 수 있는 공간을 차려 놓는 글쓰기이다. 이 경우, 원래의 이야기는 온데간데가 없으며,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다. 오직 이야기들끼리의 즐거운 ‘향유’가 펼쳐질 가능성만 제시될 뿐이다.


우리가 문학의 위기, 혹은 소설의 위기라는 풍문(風聞)을 뛰어넘어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두 소설, 혹은 두 소설의 방식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과정의 끄트머리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전망과 희망이 존재하리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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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길을 묻다(세계04)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15

작품명 : 정원에 길을 묻다
 성 명 : 김미월
 
 
 
<심사평> 김윤식 문학평론가(왼쪽)-오정희 소설가

"신인다운 재기와 패기 넘쳐"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은 모두 소설을 만드는 솜씨에 있어서 일정 수준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 중 ‘소리의 저편’ ‘붉은 썅차이’ ‘라이프 캐스팅’ ‘정원에 길을 묻다’에 주목하였다.

‘붉은 썅차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 땅에서 밀려나 떠도는 사람들,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문장과 구성력에 무리가 없으나 핵심이 없이 무난한 이야기에 그친 느낌이 있다.
 

 
‘라이프캐스팅’ 역시 이렇다 할 흠 없이 무난한 소설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몸을 석고로 뜨는 특이한 일을 하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기억의 물질화라는 주제를 이루고 있는데, 그 일을 하게 된 내적 동기가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리의 저편‘은 문장의 부림이나 소설을 만드는 솜씨가 여타의 소설에 비해 월등하다. 그러나 작가가 단정하고 깔끔한, 단편소설로서의 틀에 지나치게 매여 주제의 깊이에 가닿지 못하고 참신성이 떨어졌다.


‘정원에 길을 묻다’는 재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인터넷상의 해결사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으로 현실적 생활을 해결하는 주인공의 일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모호한 삶을 살면서 시멘트 옥상에 공중정원을 가꾸는 것으로 존재증명을 삼는다는 설정으로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정경을 펼쳐보이는 것은 자못 흥미롭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첫머리에 정체불명의 열쇠를 내보여 그것이 이 소설의 키워드가 될 것 같은 암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모모하게 처리한 것이 흠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소리의 저편’과 ‘정원에 길을 묻다’를 들고 토의 끝에 전자의 능숙함보다는 후자의 신인다운 패기와 밀고 나가는 힘을 귀히 여겨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작품명 : 정원에 길을 묻다
 성 명 : 김미월
 
 
 
"솔직히 운…열심히 노력하겠다"

응모마감일 저녁, 수위실 안에는 응모원고들이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왠지 주눅이 들어 자꾸만 입술을 깨물던 내게, 수위 아저씨는 말씀하셨다.

“원래 맨 위에 있는 작품이 당선이 돼요.”


내 원고를 다른 응모작들 사이에 끼워 넣어 달라는 청을 점잖게 물리치시던 그 분의 말투는, 참으로 따뜻하였다…….


만에 하나, 아니 조, 경, 해, 무량수에 하나라도 내 소설이 당선된다면 소감에 꼭 그 분의 이야기를 쓰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덜커덕 당선이 되자 소감을 쓰면서도 나는 망설이게 된다. 내가 진짜 당선됐나? 정말? 이 불안과 의구가, 내가 실력보다는 ‘운’에 더 크게 힘입어 당선되었으리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안다. 솔직히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러므로 그 운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부지런히 쓰겠노라는 다짐밖에는 할말이 없다. 또한, 더 할 말이 없으므로 소위 ‘당선소감’ 장르의 비공식적 공식에 따라 글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감사드린다. 사실 이 소설은 나 혼자 쓴 것이 아니다. 나를 믿어 주고 도와준 많은 사람들―늘 지켜봐 주시는 부모님, 내게 ‘소설’을 만나게 해 주신 서울예대의 스승님들, 곁에 있음으로 힘이 되는 문우들과 곁에 없어도 힘이 되는 지기들, 그리고 내 모든 소설의 첫 독자인 밝은 하늘, 그 모두와 한 자 한 자 함께 쓴 것이다. 고맙습니다, 라는 흔하고도 뻔한 말로 이 절절히 고마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참 아득하기만 하다.


덜 익은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약력>

▲1977년 강원도 강릉 출생

▲2000년 고려대 언어학과 졸업

▲2004년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예정

 
 
작품명 : 정원에 길을 묻다
 성 명 : 김미월
 
 
 
스크롤바를 화면 아래로 천천히 끌어내렸다.

나는 ‘미스 대전’으로 불린다. 그렇다고 내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대전 지역 예선에 출전할 만큼 미인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내가 이 당치 않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내 이름은 공사이. 042, 바로 대전의 전화 지역번호다. 이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종종 놀림을 받곤 하지만 그래도 난 내 이름에 만족한다. 엄마는 작부라는 직업상 내 아빠가 누군지 본인도 알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성인 ‘공’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을 게다. 또한, 일자무식이라 작명법 따윈 쥐뿔도 몰랐으므로 내 생일인 ‘4월 2일’을 줄여서 그냥 ‘사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생각해 보면 내가 4월 8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쨌든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는 나는 효녀다. 그러므로 엄마가 나의 효도를 미처 받아보기도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실소가 나왔다. 오랜만에 읽어 보니 너무 낯설어서 내가 언제 이런 맹랑한 글을 썼었나,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 글의 내용이 사실이냐고 묻다니 그 방문객 참 순진하기도 하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진짜 자기소개를 이 따위로 하겠는가? 우리 엄만 술집 여자요, 난 아비 없는 자식이오, 하고 자랑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공사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름인가. 읽다 말고 팽개쳐 둔 무협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주인공이 막 무림의 최고수인 원수의 집 담을 넘으려던 참이었다. 책장이 덮이는 바람에 담을 넘던 자세 그대로 공중에서 위태롭게 멈춰 있을 그를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프로필에 대해 궁금해하는 방문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게 그렇게 별스러워 보였나? 나는 그저 좀 튀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사이트를 찾는 이들에게는 대문의 문양이나 메뉴의 다양성, 링크의 안정성보다 운영자의 참신하고 명쾌한 프로필 몇 줄이 훨씬 더 효과적인 미끼가 된다. 나는 그냥 학력과 수상 경력, 문재(文才)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타 사이트들의 프로필과 차별화되는, 독특하면서도 도발적인 글을 쓰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먹구름이 달을 가린 밤, 그는 비호와 같이 날렵한 동작으로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방문객은 내게 메일을 보냈다. 그는 지금 괜한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않고 직접 메일을 보냈다는 건 진짜로 내게 일을 맡길 용의가 있다는 얘기다. 즉 그는 예비 고객으로서 일종의 탐색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답장을 써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뭐라고 쓰지? 무의식적으로 스크롤바를 끌어올렸다 끌어내리기를 반복했다. ‘공사이’라는 인물의 프로필이 위아래로 춤을 추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쓰자니 왜 프로필에 거짓 정보를 올렸냐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웠다. 사실이라고 쓰자니 스스로 에미애비도 없는 인간임을 광고한 꼴이 되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이거야말로 자가당착이군. 나는 메뉴바의 ‘답장’을 선뜻 클릭하지 못하고 마우스 왼쪽 버튼 위에 올려놓은 집게손가락만 까딱거린다.


나의 직업은 속칭 ‘해결사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남의 글을 대신 써 주는 게 나의 주 업무다. 사실 글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한, 대학생들이 청탁하는 그저 그런 리포트들이 일거리의 대부분이다. 그래도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해서 아무리 대수롭잖은 잡문 나부랭이라도 최선을 다해 쓴다. 다행히 문장력도 괜찮은 편이고 자료 수집에도 성실하기 때문에 내 글이 고객을 실망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일을 해 온 이 년간, 단 한 번도 환불 요청을 받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


욕실에서 새된 기계음이 들려왔다. 세탁 종료를 알리는 세탁기의 신호음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욕실까지의 거리는 내 보폭으로 딱 네 걸음이다. 열 번 울리도록 설정돼 있는 신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마구 엉켜 있는 빨래들을 한꺼번에 들어올렸다. 무언가가 세탁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라 세탁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열쇠였다. 허리를 구부리고 세탁조 안으로 팔을 뻗었다. 손끝에 딸려 나온 것은 5cm가량의 길이에 구릿빛을 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러나 내 것은 아니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둥글게 생긴 머리 부분에 음각으로 ‘I-LOCK’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을 뿐, 주인을 짐작해낼 만한 단서는 없었다.


희한한 일이네. 혼자 사용하는 세탁기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물건이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 건물에 세 든 이래 다른 누군가의 빨래를 해 주기는커녕,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다. 누군가 내 호주머니에 물건을 몰래 집어넣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나는 요 근래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 건물에 사는 다른 세입자들과 복도에서 몇 번 스친 일이 있을 뿐이다. 문득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쳤던 앞집 남자가 떠올랐다. 그와 나는 서로 얼굴은 알지만 목례조차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다. 남자는 열쇠공을 불러 현관문의 보조키를 새로 설치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열쇠를 잃어버렸나 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가 잃어버린 열쇠가 지금 내 세탁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눈인사도 오가지 않는데 열쇠가 오고갈 틈이 어디 있겠는가.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순간 등 뒤에서 살기를 느낀 무예의 고수처럼 날쌘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수건걸이에 걸려 있는 추레한 수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까짓것, 아무렴 어때.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는 건 따분한 일이다. 어차피 이 세상엔 이성이나 논리로, 혹은 경험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열쇠는 건망 증세가 있는 내가 어디선가 주워 온 것일지도 모른다.


컴퓨터 스피커에서 빠르고 경쾌한 전자음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곡이었다. 다시 네 걸음 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이디를 보니 발신인은 내게 프로필의 진위에 대해 물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아직 답장도 안 썼는데, 이 사람 꽤나 급했나 보다. 서둘러 메일을 열었다.


당신의 소개서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로 시작되는 그의 메일은 내게 글을 청탁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오호,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으니 내게 일을 맡기겠다? 나는 별안간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아비의 원수를 갚은 검객처럼 홀가분해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요구하는 글의 주제를 보자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내게 청하는 글은 다름 아닌 ‘자기소개서’였다. 이런저런 책이나 영화의 감상문에서부터 국악의 대중화, 남성성과 여성성, 실패한 혁명의 역사, 심지어는 물고기의 교미 방식에 이르기까지 갖은 주제의 글들을 청탁받아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기소개를 자기가 안 하면 도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의 소개를 내가 해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들어온 일감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메뉴의 ‘답장’을 클릭하지 못하고 나는 마우스만 일없이 만지작거렸다. 이거야 원, 이제는 죽은 줄 알았던 아비의 원수가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다.

 

오전 10시, 식물에게 물 주는 데 최적의 시간. 상온과 비슷한 온도로 맞춰 놓았던 물을 물뿌리개에 담았다. 발소리를 죽여 옥상까지 이어진 도합 다섯 층의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은 평소와 다름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머리는 앞을 향해 고정시킨 채 눈동자만 굴려 좌우를 살폈다. 사방이 고요했다. 주인집 한 호밖에 없는 오층은 주인 부부가 해외에 나가 있는 터라 통째로 비어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열쇠 꾸러미 쩔렁거리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층계 참의 적요를 깼다. 구멍과 아귀가 꼭 맞는 열쇠가 돌아가면서 찰칵,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리라 기대하자 흥분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놀랍게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일시에 곤두섰다. 누가 이걸 열었지? 누가 안에 들어왔던 걸까? 그러나 몇 달 동안 혼자 드나들었던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올 턱이 없었다. 어제 아침에 깜빡 잊고 잠그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지 않았는가. 나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었다.


뒤편에 심어 놓은 유카와 행운목, 파키라, 벤저민고무나무 등속의 키가 큰 관엽식물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정원을 향해 걸었다. 중간 키의 달리아와 백일홍, 작은 키의 베고니아와 천수국, 채송화 등 여름내 꽃을 피웠던 식물들이 꽃을 다 떨어뜨린 몸으로 햇빛 세례를 받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채 말라가는 꽃 냄새와 풀 냄새, 흙 냄새가 들큼하고 쌉쌀하게 뒤엉켜 콧속을 간지럽혔다. 몸속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정원 앞에 서는 이 순간의 희열이야말로 무협지를 읽는 순간의 기쁨에 비할 만한 유일한 것이리라고, 물뿌리개를 바투 잡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물이 잎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느긋한 동작으로 정원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높이가 2m에 달하는 인도고무나무의 넓적한 잎사귀 뒤에서 웬 남자가 성큼 걸어 나왔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약간의 과장을 보태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폭탄 파편을 찾는 중이었어요.”


폭탄이라니, 이 사람 사이코 아냐? 놀란 와중에도 호기심이 동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풍선을 놓친 아이처럼 서글픈 얼굴로 서 있는 그는, 앞집 남자였다.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여 주었다. 손바닥 위에 자잘한 색종이 조각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뭐죠?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좀더 자세히 봐요. 그도 눈으로 대답했다. 색종이 조각마다 색이 입혀지지 않은 뒷면에 깨알 같은 크기로 ‘무영’이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처연했다.


“제 이름입니다. 이무영입니다.”


이런.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이 내 이름을 밝혀야 하잖아. 입속으로 인사말을 되뇌어 보았다. 제 이름은 공도영이에요. 아냐아냐, 공혜랑이 좋겠다. 아니지, 공서희가 더 나을까? 긴장해서인지 목소리가 잠겨서 나왔다.


“전 공사이라고 해요.”


빌어먹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의 최대 약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도 모르게 솔직해진다는 거다. 다행히도 남자는 되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폭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진짜 폭탄은 아닙니다. 찰흙이랑 계란 껍데기랑 폭죽을 사용해서 만든 모형이죠. 조선 시대의 폭탄인 비격진천뢰를 흉내 낸 겁니다. 제 애인이 대안학교서 공작을 가르치는 교산데, 이거 만드는 법을 알려주더라구요. 그 사람은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내용을 색종이에 써서 폭탄 안에 넣고 터뜨린대요.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나요.”


남자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불안해 보였다. 이마 위로 몇 가닥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 터뜨릴 데도 없고… 옥상이 생각나서 올라와 봤죠. 웬 화단이 있길래 좀 놀랐습니다. 사이 씨가 가꾸는 건가 봐요? 파편이 화단에까지 흩어질 줄은 몰랐는데… 다 치울게요. 미안합니다.”


그럼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라는 게 바로 당신 자신이었단 말인가요? 라고, 나는 묻지 못했다.


“화단이라뇨? 이건 정원이에요, 공중 정원.”


머쓱해하는 남자를 등지고 물뿌리개를 들어올렸다. 과연 색종이 조각이며 찰흙덩어리들이 정원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내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정원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는 동안, 남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폭탄의 파편들을 수거했다. 내 물뿌리개 안이 텅 비워졌을 무렵 그의 손바닥 위는 색색의 ‘무영’들로 소복해져 있었다. 그게 왠지 안쓰러워서 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름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그 폭탄의 제조법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남자는 내가 폭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정원을 더럽힌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이란다. 그간 정원에 들였던 공력과 애정을 생각한다면 장난감 폭탄이 아니라 진짜 폭탄을 구해온대도 시원찮을 판국이었지만, 나는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 나에게라고 생기지 않겠는가. 폭탄을 터뜨린다고 정말 잊어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치한 방식으로 잊어버리는 척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기소개서를 청탁한 이는 여자였고 의외로 끈질긴 사람이었다. 원고료 입금도 이미 끝낸 상태였다.


저는 27세예요. 키는 160cm가 조금 넘구요, 몸무게는 50kg이 조금 안 돼요. 머리는 짧은 커트형이구요, 안경을 써요. 전 혼자 집에 있기를 좋아해요. 전 제 소개를 이렇게밖에 못해요. 독특한 자기소개서가 필요해요. 전 글재주가 없어요. 공사이 님께서 써 주시면 고맙겠어요.


이상이 그녀가 보내 준 정보의 전부였다. 기가 찼다. 이 여자는 정말 이까짓 숫자들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답장’ 버튼을 클릭했다. 다른 정보를 더 보내달라고 쓰려다가 주춤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숫자만큼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도 없는 것 같았다. ‘비가 올 것 같다’라는 말보다 ‘비 올 확률이 70%다’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신뢰감을 주지 않는가. 얼굴이 예쁘장하다거나 성격이 소심하다거나 장래에 뭐가 되고 싶다는 따위의 얘기들이야말로 불확실하고 가변적이고 애매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것들일까.


거울 앞에 섰다. 160cm 남짓한 키에 50kg이 안 되어 보이는 야윈 몸, 짧은 커트 머리에 안경을 쓴 27세의 여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오랜만이었다. 나는 거울을 거의 보지 않는다.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이 정말 나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저 유리판 뒷면에 수은을 칠하기만 하면,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나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믿을 수 없다. 보라, 나는 너무나 행복한데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저 여자는 내가 아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더 이상 필요한 정보도 없다.


알겠습니다. 한번 써 보겠습니다.


답장을 전송하고 나니 한숨이 나온다. 새삼스레 직업에 회의가 생긴다. 아니다.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원고지 1장당 평균 4000원을 받는 이 일은 나 혼자 살아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수입원이 돼 준다. 또한 남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은 즐겁다. 글 속에서 나는 긴 머리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순정파 청년이 되었다가 수채화를 즐겨 그리는 미대생이 되기도 하고, 박애 정신을 가진 사회복지사가 되는가 하면 교수님께 졸업 학점을 구걸하는 만년 복학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글재주가 없거나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글 밖으로 나오면 나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지만 ‘글재주와 글 쓸 시간은 있는’ 공사이가 된다. 글 밖에 있을 때보다 글 속에 있을 때 나는 더 행복하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디서든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글 밖에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잠자리와 밥과 옷이 있고,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와 무협지가 가득 꽂힌 책장이 있다. 게다가 나는 충분히 강하다. 무협지의 주인공들처럼.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지만 풍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나이들처럼. 고독한 삶이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다. 나는 결코 약하지 않다. 그뿐인가. 나에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 두 사람이 한 인물이므로 인간관계 때문에 피곤할 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나만의 정원이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독특한 자기소개서란 어떤 유형의 글을 일컫는 것일까. 공사이의 프로필을 보고 내게 글을 청탁할 생각을 했다면 그 비슷한 분위기의 글을 원하는 것일까. 글의 특성상 여러 개를 써서 고객에게 모두 보낸 후 그가 직접 선택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먼저 바탕화면에 ‘자기소개’ 폴더를 만들었다. 자판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을 부지런히 놀렸다.


이 글은 정말 재미없는 자기소개서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진실하다는 미덕은 지니고 있는 글입니다. 저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키는 160cm가 조금 넘고 몸무게는 50kg이 조금 안 되지요. 머리는 짧은 커트형이구요, 안경을 씁니다. 못 믿겠으면 우측 상단에 붙여 놓은 증명사진을 보십시오.


무의식적으로 모니터 화면의 우측 상단을 보았다. 증명사진이 있을 턱이 없었다. 헛웃음을 흘리는데 돌연 창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내다보니 웃옷을 뒷목 위로 끌어올려 머리에 뒤집어쓴 자세로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비 듣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소나기였다. 아침에 물을 적게 주길 잘했군. 빗속의 정원 풍경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밖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 제 소개는 잠시 밖에 나갔다 와서 마저 하겠습니다.


우산을 챙겨 들었다.


내가 이 건물의 옥상에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넉 달 전, 그러니까 7월부터였다. 당시 나는 직업상의 이유로 ‘바빌론의 공중 정원’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 고대의 불가사의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상태였다. 마침 주인 부부가 장기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던 날 밤, 나는 옥상에 올라갔다.


그저 그곳에 정원이 있다는 상상만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달빛이 홀로 점령하고 있는 옥상은 지나치리만큼 호젓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대며 나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아미티스를 생각했다. 어느 순간 주위가 환해지더니 사방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시멘트 바닥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숲이 우거져 그 한가운데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넓은 옥상을 가득 메웠다. 사막의 태양이 유프라테스 강물 위에 빛의 창날을 뻗치고 있었다.


이튿날, 다시 찾은 옥상은 대낮인데도 괴괴했다. 빗물에 젖었다 마르기를 수차례 되풀이한 듯 꼬들꼬들해 뵈는 담배꽁초 두어 개가 나뒹굴 뿐, 으레 있을 법한 빨랫줄도 하나 없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이윽고 열쇠공이 도착했다. 옥상은 곧 나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 정원이 되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우산을 곧추세웠다. 비를 맞고 있는 정원은 평소보다 더 푸르고 생기 있어 보인다. 모조리 내 손으로 했었다. 벽돌을 쌓아 정원의 경계를 만들고, 흙이 떠내려가 배수구를 막지 않도록 시멘트 바닥에 배수판을 깔고, 그 위에 다시 부직포를 깐 후 마지막으로 자갈을 깔았었다.


모래와 부엽토(腐葉土), 비토(肥土)를 섞어 이상적인 배합토를 만든 것도 나였다. 여러 종류의 식물을 키우면 서로 해를 더 보고 물을 더 품으려고 경쟁하느라 성장 속도도 빨라진다기에, 수종을 다양하게 고르는 데도 신경 썼었다. 여름 내내 양재동 꽃시장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꽃 도매상가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허공에 떠 있는, 오직 나만을 위한 공중 정원. 그 안에서 내 손으로 심은 나무들이 지금 모처럼의 단비에 몸을 씻고 있다. 옥상의 쇠 난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청량하다.

 

비격 어쩌구 하던 그 폭탄의 정확한 명칭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 천둥이나 우뢰처럼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적군에게 가 부딪치는 폭탄이라…… 근사한 이름이었다. 임진왜란 때 아군이 이 화기를 사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격목(檄木)이니 신관(信管)이니 빙철(憑鐵) 같은, 무협지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어휘들이 너무나 정겹고 친숙해서 나는 인터넷 백과사전의 설명을 꼼꼼하게 다 읽었다.

 

남자가 모형 비격진천뢰를 만들어 온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계란 껍데기 위에 찰흙을 발라 놓은 형태의 공작물로, 윗부분 끝에 완구용 폭죽의 심지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손 안에 쥐니 묵직했다. 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겁죠? 아, 찰흙 때문에 무거운 겁니다. 안에는 피리탄이랑 밀가루밖에 안 들어 있어요. 그는 친절하게도 색종이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고 했다. 나더러 잊고 싶은 일이 생기면 직접 적어서 오려 넣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꼭 효과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남자는 자꾸만 말끝을 길게 늘였다. 저도 그랬거든요. 어영부영 흐려지는 말끝이 떠나기 싫은 사람처럼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도 안 잊혀지더라구요. 말끝을 서둘러 맺는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근데 이 폭탄 어떻게 만드는 거라고 했었죠? 못 본 척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화면에는 쓰다 만 자기소개서가 명멸하는 커서 앞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제 이름은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왜냐구요? 도영이라는 이름에서는 복숭앗빛 뺨이 발그레하고 수줍게 웃는 얼굴이 일품인 아리따운 처녀가 연상됩니다. 혜랑이라는 이름에서는 유복한 집에서 금 가지에 옥 이파리처럼 사랑받고 자란 막내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서희라는 이름은 이지적이고 당찬 한편 겸손하고 사려 깊은 커리어우먼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름은 이렇듯 단순한 음절들의 조합에 불과하지만 결코 단순하게 넘길 수만은 없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억순이나 점례, 끝분이가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외모, 성격의 소유자들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모든 이름은 그 나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을 서두에 밝히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이름이 품게 하는 가짜 이미지가 제 실체에 앞서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남자가 폭탄 제조법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나는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글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먼저 달걀 한쪽 끝에 구멍을 뚫어서 내용물을 빼내는 겁니다. 그리고는 햇빛에 바싹 말리세요. 한나절이면 됩니다. 다 마른 달걀 껍데기 안에 밀가루를 집어넣고, 아, 밀가루는 그냥 터뜨릴 때 재밌으라고 넣는 겁니다. 음, 밀가루를 넣고 피리탄을 넣고. 참, 피리탄은 낱개로 사려면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가야 돼요. 그다음에 색종이를 오려 넣습니다. 사실 색종이도 터뜨릴 때 예쁘라고 넣는 건데, 뭐 잊고 싶은 걸 적어서 넣어도 상관없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찰흙을 달걀 표면에 덧바르는 겁니다. 이걸 안 하면 폭탄이 너무 가벼워서 폭탄 같지가 않아요. 터뜨릴 때도 파편이 너무 멀리 날아가서 치우기도 힘들어지구요. 어때요, 정말 쉽죠?


남자를 현관문 앞까지 배웅해 준 후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성격이지요. 그럼 먼저 제 성격부터 얘기해 볼까요?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무협지 읽기와 정원 가꾸는 것을 즐깁니다.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제 성격이 원만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과연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의할까요? 혹시 저를 괴팍하다거나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라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그런 사람도 있겠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럼 저는 저의 성격을 남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말해 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잖아요.


새로 쓴 글도 단번에 삭제해버렸다. 이렇게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넋두리로는 아무 것도 소개할 수 없다. 역시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년월일이나 신장, 체중과 같은 숫자들이나 피부색, 머리 모양 따위의 눈에 보이는 것들뿐일까.


저는…… 저는……입니다.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무협지의 글자들이 문맥을 이루지 못하고 눈 속에서 한자 한자 따로 놀았다. 주인공이 자신의 아비를 죽인 원수와 대적하는 대목에서도 감정이 이입되지 않았다. 피와 살을 가진 사람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흰 종이에 검게 인쇄된 주인공의 이름만 눈에 들어왔다. 무림을 평정한 후에 그는 행복해질까. 어머니 아버지도 모르고 자신의 출생의 배경도 모르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풍운에 몸을 맡긴 채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는 영웅 같은 건, 무협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책을 덮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댓잎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만 들려오던 대나무숲의 풍경은 사라지고 스탠드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안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놓은 비격진천뢰가 눈에 띄었다. 문을 나서던 남자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감은 눈에 밟혔다. 그는 무엇을 그리도 잊고 싶었던 것일까…… 잠을 청하면서 무협지 주인공들의 이름을 헤아려 보는 대신 잊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마냥 행복해서일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의식이 더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반대로 찾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어슴푸레 멀어지고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혼미해졌던 정신이 번쩍 든 것은 무시무시한 굉음이 뒤통수를 후려쳤을 때였다. 그 소리는 머리맡의 비격진천뢰가 폭발하면서 난 것이었다. 건물이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거세게 뒤흔들렸다. 내 정원! 속으로 부르짖었다. 심장이 지축을 따라 요동쳤다. 신도 꿰지 못하고 허둥지둥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정원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초목들 사이에 누워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죽어 있는 나의 얼굴은 거울 속 여자와 똑같이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나를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체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그들은 내 소지품을 뒤졌다. 남의 이름으로 씌어진 수많은 글들이 나왔다. 아직 쓰지도 않은 자기소개서도 있었다. 그들은 내 시신 근처에 흩어져 있던 색종이 조각들도 주웠다. 뒷면에 적혀 있는 것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 인칭 대명사였다. 나. 나. 나. 그들은 결국 내 신원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등줄기가 척척했다. 누운 자세에서 팔만 머리 위로 뻗어 보았다. 폭탄은 멀쩡했다. 창밖 어디선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헤집고 지나갔다. 목이 탔다. 혀끝에 닿은 입술이 까슬까슬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같은 꿈을 꾼 것이. 남자가 준 폭탄을 머리맡에 올려놓고 잔 이후로 삼일 연속 악몽을 꾼 것이었다.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를 죄다 뒤져 보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가 한 개 나왔다. 머리 부분에 ‘I-LOCK’이라고 새겨져 있는, 며칠 전에 세탁기 속에서 발견된 구릿빛 열쇠였다. 내 것이 아닌 그 열쇠를 쥐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도 남자는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 그의 제안으로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밤안개에 흠씬 젖어 있는 정원은 이승의 것 같지 않게 신비스럽고 영묘해 보였다. 남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자 그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그림자 위로 포개졌다. 남자는 경탄해 마지않는 얼굴로 구석구석을 둘러보더니 7대 불가사의 공중 정원이 그렇게 신기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바빌론의 공중 정원에 매료되었던 건 그것이 불가사의여서가 아니다. 거기서 키웠다는 식물들이 현대 과학으로도 열대에선 살릴 수 없는 것들이라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신기하진 않았다. 내가 탄복했던 건 산악 국가 출신인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사막 한가운데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올려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벌과 나비와 새들을 불러 모은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사실, 사랑이고 뭐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사막에 정원이라니. 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 화단, 아니 정원은 왜 만든 거예요?”


나도 그런 사랑을 받아 보고 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빠, 이름만 기억 나는 엄마는 내게 그런 사랑을 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나 또한 누구에게도 그런 사랑을 준 적이 없었다. 난 그 사랑을 베풀어 보고 싶었고 또 받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황량한 시멘트 바닥 위에 정원을 만들었다. 내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내가 나에게 사랑을 받고. 그 매개가 바로 이 정원이었다.


그러나 사실, 어쩌면 나 또한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의 흉내를 내 보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심심해서였거나, 혹은 너무 외로워서였는지도.


“그냥, 근사하잖아요. 옥상에 정원이 있다니.”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라 허공에서 흩어졌다. 남자는 허탈하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얼어 있던 안면 근육이 당겨지면서 턱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너무 오래되었다, 내 속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지 않은 지가. 사람이 오래 다니지 않은 산길이 곧 산에 묻혀 버리듯이 표현을 오래 아낀 내 진심도 가슴에 묻혀 버린 모양이었다. 남자에게 물어 보고 싶었다. 난 누구죠? 당신은 누구예요? 당신은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얇은 옷 안의 팔에 오르르 소름이 돋았다. 팔을 쓸어내리는 손이 시렸다. 양손을 오므려 입김을 불어넣었다. 열쇠를 쥐고 있던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혹시, 얼마 전에 열쇠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보조키를 바꾸는 것 같던데…….”


“애인이랑 헤어졌는데, 그 사람이 내 집 열쇠를 갖고 있었어요. 마음 정리하려고 바꿨습니다.”


옥상에서 남자와 마주쳤던 날 그의 폭탄 속에 들어 있던 색종이들이 떠올랐다, 뒷면에 그의 이름이 씌어 있던. 그는 애인을 떠나보낸 못난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할말이 몽땅 증발된 것 같았다. 그는 치아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마요. 이젠 괜찮으니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사람이 내게 선물한 비격진천뢰가 있었어요.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했던 건데, 헤어지고 나서 그냥 한번 터뜨려 봤죠. 잊고 싶어서,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안의 색종이에 내 이름이 적혀 있더라구요. 그 사람, 나 때문에 힘들었었나 봐요. 그렇게 오래 전부터 말이에요. 그걸 알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다 사라지더라구요.”


이제는 도리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 남자는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걸까.


“진짜 폭탄에는 색종이가 아니라 빙철인가 뭔가 하는 쇳조각이 들어 있었다면서요?”


맙소사, 이 주책.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에게는 그 색종이 조각들이 바로 날카로운 빙철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대요. 가슴에 꽂히면 즉사하기도 했다죠. 나는 정원으로 손을 뻗어 애꿎은 몬스테라 줄기만 쓰다듬었다. 그랬을 것이다. 색종이에 씌어진 자신의 이름이 가슴에 꽂히는 위력은 가히 대단했을 것이다. 달리아 꽃 위에 앉은 검불을 떼어내면서 남자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웃고 있는지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끔 저절로 알게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콧물을 훌쩍이지도 어깨를 들썩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내, 그가 실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다 큰 남자가 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그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해 봤죠. 하지만… 그 사람이 없으면 나도 없어요.”


그의 등을 토닥여 주려고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밤공기가 찼다. 사랑이 이 사람을 있게 했는가. 이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존재로 인해 그 스스로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오한이 났다. 그는 조금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나 혼자 추위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발부리에 걸리는 잔돌을 툭 찼다. 돌멩이는 살짝 찼는데도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래도, 그 사람이 있으면 당신도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늘 없는 걸요. 내가 누군지,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걸요. 싸늘해진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열쇠가 만져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으면,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나온 유일한 소지품인 이 열쇠로 내 신원을 추리할까요? 이것이 과연 ‘공사이’라는 한 인간의 내력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문득 그의 주머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호되게 앓고 난 후의 몸은 가볍고 연하고 파삭하다. 몸뚱이가 허깨비처럼 가벼워지고 연해지고 파삭해지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정원에 올라가지 못했다. 게시판에 올라온 광고 스팸 메일을 삭제하거나 작업에 관한 문의 메일에 답을 하지도 못했다. 일주일 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다 공황 상태였다. 남자와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밤에 지독한 감기 몸살을 얻었던 것이다.


백여 통의 스팸 메일들을 지우고 나자 딱 한 통의 문의 메일이 남았다.


자기소개서는 언제까지 보내주실 수 있나요? 당장 필요한 건 아닌데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요. 건방진 얘기지만 이번주 내로 어떻게 안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참으로 느긋한 성격에 지극히 공손한 고객이었다. 일을 의뢰한 지 열흘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이제껏 해명의 말 한 마디 없었던 무책임한 장사치에게 이런 애원조의 글을 보내다니. 바탕화면으로 이동했다. ‘자기소개’ 폴더에는 아무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도저히 쓰지 못하겠습니다. 입금하셨던 원고료는 곧 환급해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짧은 한 줄을 쓰기 위해 나는 몇 번이나 긴 심호흡을 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서너 걸음 비틀거렸다. 벽 모서리를 짚고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몰라보게 핼쑥해진 얼굴은 이전보다 한층 더 우울하고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여러 번 대면했던 기억 때문인지 이제는 제법 친숙하게 느껴졌다.


여자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음을 발견한 것은 파리한 안색이 안돼 보여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차가운 유리 표면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눈앞이 점차 부옇게 흐려졌다.


정원에는 눈에 확 뜨이는 변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큰 변화가 생기기에 일주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원에 물을 주면서 나는 차차 확인해 나갈 수 있었다. 상당수 식물들의 잎이 누렇게 변색되었고 줄기는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벌레에 파 먹히거나 오그라든 채 말라 있는 낙엽들이 수북했다. 변화가 아예 없기에 일주일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점퍼 주머니에서 신문지에 싸들고 온 것을 꺼냈다. 비격진천뢰는 표면의 찰흙이 꾸덕꾸덕 마르면서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조금 전에 종이를 오려 넣어서인지 한결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성냥갑을 열었다. 잊고 싶은 일과 결별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식의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성냥불이 심지에 옮겨 붙자 느닷없이 명치 끝이 뜨거워졌다. 불꽃이 심지 위로 화닥닥 번졌다. 가슴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제는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리라. 불꽃이 도화선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오른팔을 힘차게 위로 내뻗었다. 폭탄을 하늘 높이, 있는 힘껏 던졌다. 세차게 솟구쳐 오르던 비격진천뢰가 허공에서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터졌다. 무수한 파편들이 머리 위로 마구 쏟아졌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흰 종이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나풀거리며 정원으로 떨어져 내렸다.


난데없는 함박눈이 흩날리는 사막 한가운데 나의 공중 정원이 우뚝 솟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과 탐스러운 열매를 매단 나무들로 진을 친 숲은 울창하고 수려했다. 눈송이가 난분분 떨어져 내리는 강물 위에서는 오색의 꽃잎들이 맴을 돌며 떠다니고 벌과 나비들은 꽃에서 꽃으로 건너다니며 꿀의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원 안에 있어야 할 내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찾으러 가야 했다. 황금빛 모래에 덮여, 길 또한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헤매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폭탄의 파편이 정통으로 꽂힌 것처럼 가슴이 콱 막혀 왔다.


퍼뜩 눈을 떴다. 여기저기 흩어진 찰흙 덩어리와 종잇조각들로 정원은 몹시 지저분해져 있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 나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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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세계04)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9 00:13

작품명 : 작은 손
 성 명 : 문 신
 
 
 
<심사평> 유종호 문학평론가(왼쪽)-김광규 시인
삶의 슬픔 담담히 묘사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 19인의 작품들 가운데서 5분의 1이 본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나머지 작품들에 견주어 비슷하기보다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제 나름의 개성을 풍기는 것은 모든 예술작품의 첫 걸음이다.
 
 
예컨대, 모대가리금풍뎅이 한 쌍과 가시돌거미 새끼들의 삶과 죽음을 빌려서 ‘애벌레 같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린 어미’를 보여준 ‘잃어버린 길’(박여주), ‘탱탱한 가지 위에서/ 포슬포슬한 감자 위에서/ 아삭아삭한 오이 위에서/ 알싸한 쪽파 위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린 ‘세 시의 나비’(이승주), ‘열 아홉 평 진달래 아파트 가판대’에서 ‘오천원에 세 장’씩 싸구려로 팔리는 ‘30수 면사 런닝셔츠’ 같은 ‘이력서’, 서양문물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동양을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아시아 갈대’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가서 미국의 오대호 연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여정기’(김미안) 등이 그러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편의 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평가되기에는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아쉬웠다. 부분을 다루는 이들의 솜씨가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량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작은 손’(문신)은 오늘의 평범한 현실을 소재로 삼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오버랩시키면서, 죽은 친구의 영안실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쓸쓸함’, 조객들의 허황된 농담과 공허한 웃음, 피상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조문과 속내에 감추어진 삶의 슬픔이 저녁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잔잔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무런 내면적 교감도 없이 겉 모습만 스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숨겨진 우수를 평이한 일상어로 형상화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은유적 표현이 적어서 친근하게 읽히고, 산문의 어조에 시적 정취를 담았다. 구체적 부분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함께 투고한 ‘숲으로 가는 곰 인형’에서도 이 작품과 대등한 수준의 저력이 드러난다.


새 시인의 등단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작품명 : 작은 손
 성 명 : 문 신
 
 
 
詩만이 내 존재 이유다

미련퉁이처럼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연애도 취직도 하지 않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는 쓰지 못하고 어느 순간 나는 미련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진짜 미련퉁이가. 그 미련퉁이가 다시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연애도 해보고 취직도 해버린 미련퉁이가 염치없이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시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시를 읽었습니다. 때로는 행간에 발목이 빠져 마음이 시큰거리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시는 제 등을 토닥여주었습니다. ‘스스로 아파하지 마라. 너는 너 아닌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시는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미련퉁이는 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시가 뭔지를 보여주신 이 땅의 모든 시인들과 시집과 그리고 사람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기에 오늘 또 한 권의 시집을 샀습니다.


당선 소식에 가장 먼저 기뻐해 주신 이병천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련퉁이에게 시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늘 안타깝게 지켜봐주신 선생님의 젖은 눈빛이 문득 낮달처럼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눈빛이 언제 어디서라도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김승종 교수님, 시 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정도면 괜찮다고 다독여주신 이희중 교수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곁에서 저를 지켜봐준 부모님과 착한 이정민이 아니었으면 제가 시를 쓸 수나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마음사랑병원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딱 3일만 기뻐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련퉁이는 또 시를 써야겠습니다. 두 분 심사위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똑부러지는 시를 쓰겠습니다.

 

 

<약력>

▲1973년 전남 여수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학과 졸업

▲전북 마음사랑병원 근무

 
 
작품명 : 작은 손
 성 명 : 문 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3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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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띠(세계03)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11

작품명 : 숨은 띠
 성 명 : 염향
 
 
 
<심사평> 김윤식(왼쪽), 서영은

"베짜기 통해 여성심리 사실적 묘사" 
금년도 소설 응모작은 예년보다 많았을 뿐 아니라 수준도 대체로 고른 편이다. 그 중 우리의 관심을 끈 작품들은 '출항'(김주현) '손님'(이기수) '뼈'(하우영) '몸의 기억'(김윤) '숨은 띠'(염향) 등이었다. '출항'은 오늘의 시점에서 직업으로서의 어업이 갖고 있는 어려움을 매우 건강한 문체로 다룬 점이 소중하게 다가왔으나, 이른바 개성이랄까 끈기 같은 것의 모자람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노인과 며느리의 사이를 문제 삼은 '손님'은 노인형 소재를 다룬 점에서 이색적이며 우화성의 도입 역시 돋보였으나 뒤처리가 불투명해 보였다.
 
 
'뼈'의 경우는, 해체된 닭뼈를 정교하게 짜맞추는 고도의 전문 기술을 지닌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인물 창조에 이르긴 했고 따라서 개성적이긴 했으나, 도식적인 측면이 소설적 흥미를 저해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 작품에 비해 '몸의 기억'은 어떤 심리적 상처를 가진 한 여성의 결혼생활을 심도 있게 펼쳤으며 속도감도 돋보였으나 결말의 허리가 안이해 보였다. '숨은 띠'는 여성심리의 섬세함을 베짜기를 통해 보여준 점에서 무리수가 없었고, 문장력 역시 이를 감당하고 있어 보였다.
 
 
작품명 : 숨은 띠
 성 명 : 염향
 
 
 
글쓰는 일 어렵지만 즐거운 노동

오래 전 친구와 허름한 다방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키 작은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점쟁이였죠. 손금도 보고 생년월일도 물었던 것 같습니다. 점쟁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더러 심장이 약하다고 했습니다. 심장. 그날 들었던 다른 말들과 함께 그 말은 곧 잊혀졌습니다. 한참이 지난 어느 해부턴가 조바심이 일었습니다. 어디엘 가도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떨렸습니다. 문득 점쟁이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지요. 심장이 약한 탓일 게야….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떨림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다시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입니다.


째깍째깍, 머릿속에서 시계 바늘이 움직입니다. 날마다 허둥거립니다. 글을 핑계로 밀쳐둔 일상들에 미안함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나는 여기저기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살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재능이 부족한 내게 소설 쓰기는 어려운, 그러나 즐거운 노동입니다. 어두운 상자 속에 갇혀 있던 파일을 불러 꺼내봅니다. 화면 위로 기호 같은 글자들이 떠오릅니다. 떠 있는 글자들 안에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강물에 일렁이는 천 개의 달처럼 글자들마다 그들의 지문이 찍혀 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든든한 울타리였던 당신, 아버지의 산소 앞에 노란 국화 한 다발을 바치고 싶습니다. 나의 방에 틀어박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어머니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늘 혼자 놀아야하는 상연에게 정말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글 공부는 인생 공부라는 가르침을 주신 윤후명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미흡한 글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약력>

▲1964년 전남 벌교 출생

▲1987년 서울대 사대 윤리교육과 졸업

▲현재 서울 역삼중학교 교사
 
 
작품명 : 숨은 띠
 성 명 : 염향
 
 
 
날실 한 올이 툭 끊어진다. 허리를 구부리고 베틀 위로 고개를 들이민다. 끊어진 실 한쪽이 잉아 너머로 달아나 있다. 오른손을 뻗어 기둥에 매달린 솜을 뗀다. 끊긴 실 양 끝을 왼손 엄지와 검지에 쥔다. 버드나무 솜털만큼 뜯은 고치 솜을 왼손 엄지로 굴려 도르르 말아준다. 감쪽같이 실이 이어진다. 도투마리에서 풀려나온 실들은 잉아를 지나 바디까지 길게 펼쳐져 있다. 베틀에 걸려 있는 사백 올의 날은 끊어질 듯 당겨진 현 같다. 단조로운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팽팽한 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베틀을 밟는다. 씨실을 풀어내는 북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찰칵슥삭찰칵슥삭. 잉아에 걸린 날들이 어지럽게 출렁인다. 솟구쳐 올랐다 내려가는 날들에 지루한 눈길을 붙박는다. 벌써 아침이다. 도투마리에는 아직 실이 남아 있다. 자꾸만 끊어지는 실 때문에 베 짜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실들이 바싹 말라 있는 탓이다. 밤새 틀어놓은 가습기도 별 소용이 없다. 눅눅한 여름 습기가 덮치기 전까지 실은 여기저기서 툭툭 끊어질 것이다.


눈앞으로 휘휙 빛줄기가 지나간다. 뿌연 창 너머에서 쏟아진 빛이 베틀 위로 풀어지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먼지들이 느릿느릿 방안을 떠돈다. 삼십 년 된 낡은 베틀 다리는 눌어붙은 시간을 보여주듯 반질반질 닳아 있다. 북 줄을 끌어당기던 손을 나도 모르게 내린다. 오른쪽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관자놀이를 지나는 핏줄기의 떨림이 눈꺼풀로 옮겨온다. 순간 수십 마리 나방 떼가 어른거린다. 힘을 주어 눈을 뜬다. 열 필씩 타래를 지은 실이 선반에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다. 비스듬히 놓여 있는 물레와 씨실 뭉치를 담은 비닐이 보인다. 그 옆으로 쌓여 있는 도구들을 차근차근 눈으로 훑는다. 모서리에 구멍이 난 북, 촘촘한 살들이 비치는 바디, 먼지를 뒤집어쓴 도투마리……. 한쪽 구석이 허전하다. 베 상자를 두었던 자리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베 백 필을 담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누렇게 바랜 벽지에 떠오른 네모난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텅텅,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유리창이 파르르 떨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간다. 반투명 유리 너머로 시커먼 형체가 어른거린다. 누군지 묻는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온다. 등줄기로 땀이 솟는다. 손잡이를 잡는 손에 끈적한 거미줄이 감긴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열리는 문을 피하려는 듯 그림자가 뒤로 물러난다.


"붙잡혔대요?"


현관으로 들어서는 청년의 목소리는 들떠 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머쓱한 표정으로 청년은 머리를 쓸어올린다. 뻣뻣해 보이는 곱슬머리가 비죽비죽 치솟는다. 청년이 한 걸음 비켜서며 옆으로 몸을 돌린다.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붉어진 눈이 불안해 보인다. 형사는 유력한 용의자로 이층 청년을 지목했다. 근처에 좀도둑이 설쳐 날밤을 새고 있긴 한데…….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거니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있고.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형사가 말했다. 묵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방바닥엔 잘라낸 실 거스러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닥을 골라 딛던 형사는 북을 거꾸로 들고 아래 달린 도르래를 손바닥으로 굴렸다. 옛날 베틀과 다르네. 도둑을 잡는 일보다 개량된 베틀을 구경하는 데 형사는 더 흥미를 가진 듯했다. 꾸리 실을 담은 카누 모양의 북은 모서리가 닳아 조금 뭉툭해져 있었다. 어쨌든 아는 사람이 한 짓이오. 바짓단에 묻은 실오라기를 털면서 형사는 아는 사람이란 말에 힘을 실었다. 줄이 묻은 손바닥이 점점 끈끈해진다. 청년이 머리 위에 걸린 거미줄을 걷어내려 손을 뻗는다.


"내버려둬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른다. 움찔 놀란 청년이 쳐든 팔을 슬그머니 거둔다. 소매를 걷어올린 팔뚝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린다.


"불을…… 피우려구요."


팔짱을 끼면서 청년이 말한다. 어제 저녁 병원 가는 길에 청년은 할머니의 수의(壽衣)를 부탁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청년의 어머니가 아직 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문득 떠올렸다. 청년이 말없이 돌아선다. 갈색 셔츠 등 아래쪽으로 구김살이 가득하다.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긴 의자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떠가는 뗏목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던 밤색 의자들. 청년은 무수한 사람들이 뒤척였을 의자에 웅크리고 누워 새우잠을 잤을 것이다. 실을 날거나 맬 때마다 도움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할머니의 수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탓도 있다. 실을 날고 매는 일은 일당으로 계산된다. 청년이 숯을 만드는 일도 할머니의 일당에 포함된다. 매캐한 연기가 바깥에서 날아든다. 청년이 불을 피우기 시작한 모양이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늦어진 베 네 필 때문에 어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른쪽 이마를 꾹꾹 누르며 베틀 방으로 들어간다. 구석에 놓인 홍두깨를 집어들고 잠시 머뭇거린다. 베틀 다리 아래 두텁게 쌓여 있는 먼지가 보인다. 낯선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 먼지 위로 가벼운 바람이 일었을 테지. 베 도둑은 손전등으로 방 안을 비췄을지도 모른다. 베틀과 물레와 구석에 처박힌 도구들이 차례로 불빛 속에 떠올랐겠지. 베는 두 개의 상자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 두 필씩 끊어 단단하게 말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침입자는 허리를 구부린 채 베 상자들을 들고 살금살금 마루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 아무도 없는 걸 알고 좀더 대담하게 나갔을지도 모른다. 마루를 쿵쿵 밟으면서. 주문받은 백 필을 넘기고 나서 좀 쉴 계획이었다. 더 이상 베를 짠다면 몸이 너덜너덜 닳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필이라니. 반 년 동안 방에 처박혀 짠 것들이다.


꾸덕꾸덕 마른 베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삼베 끝자락을 홍두깨에 말아 단단하게 감기 시작한다. 구김이 가지 않게 양 끝을 잡아당긴다. 맞물린 날실과 씨실, 어느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장의사집 조 여사는 어그러진 베올을 귀신같이 잡아낸다. 까다롭고 말 많은 그녀에게 베를 넘길 땐 더 신경이 쓰인다. 스삭스삭 두툼하게 베가 감긴다. 방망이로 베를 두드린다. 베 뭉치는 포근한 느낌이 든다. 관 속에 누운 사람들은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베올이 굵고 거칠거나 가늘고 부드럽거나, 맞물린 짜임이 어그러지거나 고르거나……. 어차피 수의는 몸과 함께 썩어갈 테니. 탁탁, 방망이를 두드리는 오른쪽 어깨가 뻣뻣하다. 내리치는 팔의 감각이 조금씩 무뎌진다. 베 위에 광목을 덮어씌우고 올라서서 발로 꾹꾹 누른다. 거미 한 마리가 천장에서 내려온다. 긴 더듬이 같은 다리를 가진 집유령거미. 베틀 위로 줄을 내리곤 하던 놈이다. 베를 밟는 몸이 조금씩 기우뚱거리기 시작한다.


"바람을 잘 탄 거미는 멀리 날아가지."


"바람?"


나는 끈끈하게 얼굴에 감기는 거미줄을 닦아 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풀줄기나 나뭇가지에 오른 새끼 거미들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여덟 개의 다리를 쭉 뻗어 발돋움하면서 배 끝을 하늘로 치켜들지. 그 다음엔 실젖에서 수십 가닥의 거미줄을 공중으로 뽑아내어 흘리는 거야. 그리곤 바람에 실려 날아가지. 유사비행이라고 해."


포충망을 어깨에 둘러멘 채 안경알 너머로 흘긋 바라보는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그는 고개를 돌려 멀리 눈길을 보냈다. 햇빛에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풍선 같은 거미줄들이 무수히 펼쳐져 있었다. 나는 두어 걸음 떨어져 서서 빛을 반사하며 허공에 떠 있는 가느다란 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대로 한없이 작아져 우윳빛 새끼 거미가 된다면 멀리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떠나가라고? 머릿속이 온통 흰빛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다. 느닷없이 내리덮치는 흰빛을 나는 미리 상상한다. 무수히 날아 오르는 칼날들의 환영. 베를 밟던 발을 헛디딘다. 가까스로 두 손을 바닥에 짚는다. 넘어지는 순간 어김없이 흰빛이 지나간다. 들떠 있는 마룻바닥이 눈앞에 가까이 있다. 긁히고 흠이 가고 군데군데 벗겨진 나무 합판을 짚고 벌떡 일어선다. 거미줄은 아주 가늘면서도 매우 강하지. 강철보다 다섯 배나 더 강하다는 거 알고 있니?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자기 무게의 사천 배를 견딘다고 해. 사람들은 거미에서 누에처럼 실을 얻고 싶어하지만 거미는 사육이 불가능하대. 서로 잡아먹거든.


베를 밟으면서 허공에 멈춰 있는 집유령거미를 멀거니 바라본다. 강철보다 튼튼한 줄이 있다면 높이 날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먼 곳으로. 그래도 나는 다시 베를 짤 것이다.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처럼. 한올 한올 펼쳐진 실 끝엔 낯선 사람들과 집들, 가본 적이 없는 많은 길들이 있다. 그것들은 세상의 바깥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나 어렴풋하다. 실들이 내주는 길을 따라가면 언젠가는 새로운 집과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광목을 들추고 홍두깨를 뽑아낸다. 두들기고 밟은 베는 매끄럽게 윤이 난다. '맞춤 수의'라고 새겨진 흰 보자기에 삼베 네 필을 싼다.


현관을 나선다. 검은 연기가 담을 타고 밖으로 몰려 나간다. 함석통 옆에 서 있는 청년과 눈이 마주친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벌겋게 익은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청년에게 보퉁이를 들어 보이고 서둘러 대문을 나선다. 모래가 섞인 듯한 바람에 살갗이 따끔거린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얼굴이 바람에 쓸려 쓰라리다. 맞은편에서 갈색 파카를 입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온다. 양손에 든 비닐 가방이 터질 듯 팽팽하다. 쓰레기통 옆에서 걸음을 멈춘 노인이 버려진 운동화를 주워 올린다. 문득 커다란 갈색 파카 위로 누런 수의가 겹쳐진다. 가슬가슬한 수의를 입었을 때야 노인의 얼굴은 환하게 살아날지도 모른다. 비로소 고통이 끝나게 될 테니. 엉겨붙은 흰머리 위로 노란 종이비행기가 지나간다. 이층 미술학원 간판 아래 올망졸망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보인다. 종이비행기는 노인의 몸을 한 바퀴 돌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마른 대기를 후르르 휘젓는다. 노인이 비닐 가방을 내려놓고 올려다본다. 반쯤 벌어진 입안이 아득히 검게 보인다. 바닥에 놓인 비닐 가방에는 쑤셔박은 옷들과 낡은 탁상 시계, 꼭지 없는 법랑 주전자 따위가 비죽비죽 드러나 있다. 운동화와 비행기를 가방에 집어넣고 노인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큼직한 수의를 걸친 듯한 노인의 몸은 왼발을 뗄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운다.


천당 장의사. 노란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글자가 쓰인 간판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가게 문은 늘 닫혀 있다. 검게 선팅된 유리 탓에 내부는 보이지 않는다. 가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선다. 조금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삐걱이는 소리에 조 여사가 고개를 쳐든다. 마루에 둘러앉은 세 여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다. 그들은 내 손에 들린 보퉁이를 한번 흘긋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드르륵거리는 재봉틀에서 옷이 밀려 나온다. 요즘엔 수의를 짓는 데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다. 매듭짓지 않은 실로 한땀 한땀 정성껏 바느질한 수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관을 열었더니 날실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더라는 거야."


파마 머리의 여자가 눈살을 찌푸린다. 아무도 내게 앉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보퉁이를 내려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끔찍스러웠겠네."


"쥑일 놈들……."


세 사람 모두 쯧쯧 혀를 찬다. 조 여사가 보자기를 풀어 삼베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활짝 열린 대문 바깥을 내다본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힌다. 수의 베는 금세 썩을 삼실로 짜야 한다. 끊기지 않는 화학사를 날실로 베를 짜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화학사가 섞인 삼베라도 눈으로 보기에는 자연 삼베와 다르지 않다. 썩지 않고 남은 날실로 온몸이 친친 감겨 있는 시신을 상상해본다. 일 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살은 다 썩었을 테지.


"요즘엔 주문이 많지 않아."


조 여사는 만족스러움을 감춘 덤덤한 얼굴로 말을 던진다. 베 스무 필이 필요하다면서 봉투를 건네는 조 여사의 목소리에는 베푸는 자가 보이는 거만함이 묻어 있다. 스무 필이라면 세 명 또는 다섯 명의 수의를 만들 분량이다. 수의가 아니라면 침대 시트나 한복일 수도 있다. 어렵겠다는 내 말에, 짜둔 게 많지 않으냐고 조 여사는 눈을 크게 떠 보인다.


"다 없어졌어요."


없어졌다고 말을 뱉고 나자 눈앞으로 뭉쳐진 빛더미들이 휙 지나간다. 눈부신 빛그물이 얼굴을 덮치는 것 같다. 놀란 얼굴로 조 여사가 꼬치꼬치 묻는다. 백 필이면 그게 얼마치나 되느냐고 여자들이 수군거린다. 끈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어른대는 하얀 빛무리 사이로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갈까'라고 했던가 '갈게'라고 했던가. 대문을 닫으면서 히뜩 뒤돌아보는 순간 한꺼번에 쳐다보고 있는 그녀들의 시선과 부딪친다. 수다는 이제 베를 짜는 젊은 여자의 불행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멀리 날아가기에 좋은 밤이군. 새끼 거미들처럼 말야."


사흘 전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그가 대뜸 말했다. 근처에 있는 계곡에 왔다고 했다. 일 년 만이었다. 술을 마신 듯 그의 목소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올 거냐고 그가 물었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창문이 바람에 쉴새없이 덜컹거렸다. 오른쪽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바람을 맞으러 나무 위로, 바위 위로 기어오르는 새끼 거미들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갈까? 그가 물었던가. 안 돼.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 제기랄, 배터리가 다된 모양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가 조그맣게 들리다가 까마득히 멀어졌다. 나는 한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안 돼'라고 그에게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집으로 내려온 후에도 더러 그를 만났다. 근처에 들를 때면 그는 며칠 동안 집에서 묵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와 나는 술을 마셨다. 오래된 친구처럼.


미술 학원 앞 길바닥에 색종이들이 떨어져 있다. 창 너머로 새어나오는 노랫소리가 노인이 사라진 길 위로 퍼져 나간다. 아이들의 노래는 덧없이 짧게 남은 숨을 조롱하듯 가뿐하고 생기 있게 굽이친다. 길이 끝나는 멀리, 산 아래 있는 공사장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뾰족하게 솟은 철근들이 구불구불 휘어져 보인다. 집 앞에서 멈춰 선다. 칠이 벗겨진 녹색 대문과 우중충한 외벽으로 둘린 이층집. 담벼락 너머로 짙은 녹색 향나무 두 그루가 불꽃처럼 솟아 있다. 동네 사람들은 수의 베 짜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을 불길하게 여긴다. 언젠가는 담벼락에 '죽음의 집'이란 글자가 붉은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쓰여 있기도 했다. 검은 스프레이로 낙서를 지운 뒤부터 벽에는 사과 궤짝만한 크기의 무늬가 생겨나 있다. 마치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뚫린 작은 문처럼 보인다. 밖에서 안으로 또는 안에서 밖으로 가는 통로.


마을 어귀에는 어른 키보다 높게 대마들이 자랐다. 대마밭에 숨어들면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되면 대마를 잘라 대칼로 잎을 훑어냈고 물에 담갔다가 개울 옆에 내건 커다란 솥에 넣어 불을 지폈다. 온 마을이 술렁거렸고, 남자들은 모여 앉아 술을 마셨다. 대마의 겉대를 벗기고, 널고, 가리고, 빨고, 도패로 톺고, 또 널어 물에 적시고, 째고……. 베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백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마을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물에 잠겨버렸다. 댐 공사 때문이었다.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은 오래 살았던 땅을 미련 없이 떠났다. 집집마다 길쌈을 했던 마을 여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도시로 나오면서 베틀을 들고 왔다. 일 년 뒤 훌쭉한 남자가 집으로 왔다. 얼굴이 기억 나지 않는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게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없었다. 새아버지가 벌인 일들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베틀 소리만 아니면 집 안은 늘 조용했다. 가끔씩 잔뜩 술에 취한 새아버지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작은 도시를 빠져나올 때까지 베틀 소리는 밤낮으로 이어졌다. 찰칵슥삭찰칵슥삭.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새아버지와 낯선 양옥, 꿈속까지 파고드는 베틀 소리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했다. 다시 돌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공기가 마당에서 밀려 나온다. 철판 위에 발그스름한 숯들이 널려 있다. 청년은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현관 문을 열다가 문 모서리에 발이 부딪힌다. 베틀 방으로 들어가 노끈으로 새를 묶은 실타래를 꺼내든다. 씨실과 맞물리도록 날실의 새를 나누는 일은 베 짜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새를 놓치게 된다면 실은 엉클어진 뭉치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마루에 앉아 무릎 위에 바디를 올려놓는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 바디 살에 새를 지은 실 두 올씩을 끼워넣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청년에게 바디를 넘겨주고 주방으로 간다. 찬장을 열고 마시다 둔 소주병을 꺼낸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빈속을 훑고 지나간다. 일을 시작하기 전 술 몇 잔을 마시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다. 맑은 정신으로 자리에 앉는 건 왠지 불안하다. 들통에 담긴 풀을 들고 나온다. 치자를 우려낸 물을 섞은 탓에 풀은 카레 소스처럼 누렇다. 바디에 꿴 실을 묶고 있던 청년이 통을 내려두라 손짓한다.


마당으로 떨어지는 뜨거운 햇살에 눈이 아프다. 받침대에 도투마리를 걸친다. 실타래를 팔목에 걸고 담장을 따라 아래로 실을 풀어간다. 사백 올의 하얀 삼실들이 길게 펼쳐진다. 담벼락 아래 멈춰 서서 낡은 책상 위에 놓인 바구니에 실타래를 얹는다. 쭈그려 앉은 청년의 얼굴이 흐릿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흰 실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고즈넉하게 흐르는 강줄기 같기도 하다. 눈부신 흰빛. 느닷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줄기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저거야!"


고개를 돌린 그가 손가락으로 그물 한 부분을 가리켰다. 거미줄 왼편 위쪽으로 ×자 모양의 흰 줄이 보였다.

 

 

죽음에 이르게 할 눈부신 흰빛. 햇빛을 반사하는 띠 그물에 곤충들이 날아와 걸린다고 했다. 숨은 띠로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는 거라고. 그물은 아래쪽이 부서져 있었고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도 어른거리는 숨은 띠를 좇아 이리저리 헤매는 거겠지. 죽는 날까지.


'나의 숨은 띠는 너일까.' 거미줄에 점점이 걸려 있는 하루살이들을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심스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풀숲에 떨어진 이슬에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다른 그물을 찾아보자며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해는 나무들 위로 점점 높이 떠올랐다. 마이크로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들고 그가 풀숲으로 들어갔다. '자연 친화적 이미지'를 주제로 하는 광고 시리즈라고 했다. 숨은 띠에 회사 로고를 집어넣었다고. 천천히 걷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노란 얼룩 줄무늬가 뚜렷한 호랑거미가 그물 한가운데 바퀴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아침 이슬을 맞은 거미줄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밀면서 그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삼각대로 고정시킨 카메라로 들여다보자 위아래로 뻗은 숨은 띠와 둥근 모양의 거미줄과 호랑거미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숲 속을 뒤지며 그와 함께 본 그물들은 어느 한 군데가 조금씩은 부서져 있었다. 완벽한 거미줄은 컴퓨터 그래픽에나 있는 거라고 그가 말했다. 세상에 있는 건 오로지 얼룩무늬 호랑거미와 거미줄뿐이라는 듯 셔터를 눌러대는 그의 뒤통수를 나는 조금 서글픈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한줌 가득 풀을 떼어 실에 바른다. 하루가 지난 풀에서 쉬지근한 냄새가 난다. 거칠게 일어나 있는 거스러미들이 잘 달라붙도록 실을 쓰다듬는다. 실 매는 데 정성을 기울일수록 베 짜기는 쉬워진다. 청년이 뻣뻣한 솔을 집어든다. 덩이져 뭉친 풀이 고루 펴지도록 솔로 실을 훑어 내린다. 풀이 스며든 실이 레몬빛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묽게 치자물을 들인 베를 좋아한다.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바디를 움직인다. 서로 달라붙어 있던 실들이 한 올씩 떨어진다. 낭창거리는 실 아래로 숯이 널려 있는 철판을 들이민다. 온도를 낮추느라 재를 뿌려둔 숯이 발그무레하게 비친다. 실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청년은 벽돌에 엉덩이를 걸친다. 담배를 피워 문 그는 하얀 실이 끝나는 실타래에 눈길을 던진다.


"다 만들어지면…… 모셔 와야겠어요."


담배 연기를 날리며 혼잣말처럼 청년이 중얼거린다. 부는 바람에 길게 뻗어 있는 실 올들이 위아래로 휘청거린다. 쿡쿡 머리가 쑤신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는 빛이 머리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하다. 청년의 어머니는 두 달째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위로 들썩였다.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로 둘러싸인 건너편 침대 쪽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이어지는 기도 소리가 중환자실의 차갑고 건조한 소음 위로 물줄기처럼 흘렀다. 청년이 할머니의 다리를 말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선 채 나는 침대 옆 모니터에 그려지는 푸른 곡선을 보고 있었다. 청년이 허리를 굽혀 링거 바늘이 꽂힌 할머니의 팔을 들여다보다가 힘없이 늘어진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나직한 목소리로 청년이 그녀를 불렀다. 반쯤 벌어져 있던 그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나는 앞으로 조금 내밀고 있는 듯한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물수제비가 날아가듯 그 말은 통통거리며 가슴으로 떨어졌다. 잉아에 걸린 실들이 솟구쳐 오를 때나 슥삭 바디집을 끌어당길 때, 모서리에 찰칵이며 북이 부딪힐 때……. 이따금 그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바짝 풀이 마른다. 실을 감아야겠다고 청년에게 말한다.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쥔 청년의 오른손이 희미하게 떨린다.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는 지난겨울부터 보이지 않았다. 청년이 꽁초를 창고 쪽으로 튀긴다. 뻣뻣하게 마른 실이 도투마리에 감긴다. 한 움큼 풀을 떼 실에 바른다. 겨자빛이 도는 풀은 더 뻑뻑해진 느낌이다. 미처 풀리지 않은 덩이 안에서 밀가루가 터져 나온다. 청년이 솔로 실을 쓸어내린다.


"그래도 되겠죠?"


동의를 구하듯 청년이 크게 외친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 물음은 나보다는 다른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나 그의 어머니에게 또는 실을 감고 웅크리고 있는 도투마리에게 던진 것처럼 들린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숯을 덮고 있던 재가 날아 오른다. 불티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벌겋게 살아나는 숯불을 본다. 재가 들어갔는지 오른쪽 눈이 아리다. 옷소매로 닦아보지만 눈은 더 따가워진다. 수돗가로 달려가 손을 씻는다. 플라스틱 대야에 담긴 물이 뿌옇게 흐려진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청년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온다.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린다. 눈알이 움직일 때마다 깔끄러운 알갱이가 아프게 눈을 찌른다. 재가 아니라 모래가 들어간 것 같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며 현관으로 들어간다. 거울 앞에 서서 눈을 깜박거린다. 오른쪽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핏발 선 눈으로 오랫동안 거울 속의 나를 쏘아보던 때가 있었다. 그 무렵 저녁마다 눈물을 찔끔거렸던 것 같다. 아침이면 퉁퉁 부어오른 눈에 얼음을 올려놓아야 했다. 부기가 가라앉길 기다리느라 출근이 늦어지기도 했다.


그가 떠난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죽었다. 두 사람이 탄 낡은 지프는 중앙선을 넘어온 덤프트럭과 충돌했다. 실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십일 년. 떠나온 햇수를 헤아리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은행에서 날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빚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남게 되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피로했지만 불면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작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양옥이 꿈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지 끝에 매달린 채 바람을 기다리는 새끼 거미들처럼, 한때 나는 그곳을 벗어나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허전함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거리낄 게 없다는 후련함에 젖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옮겨가던 눈길은 벽에 걸린 패널에서 멈췄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거미줄과 바퀴통에 매달린 호랑거미, 목숨을 걸어야 할 숨은 띠……. 그가 찍은 사진들이 말을 걸었다. 너는 기껏 거미줄 위를 기어다니고 있을 뿐이야.


주방으로 가 소주병을 꺼낸다. 아침부터 마신 술은 병 아래쪽으로 손가락 두 마디쯤 남아 있다. 마당으로 난 쪽문을 밀어젖힌다. 푸른 이끼가 낀 뒷담이 나타난다. 두 그루의 향나무가 서 있는 사이로 낡은 철제 책상이 있고 실타래를 담은 바구니가 그 위에 얹혀져 있다. 청년이 도투마리를 감는지 조금씩 실이 풀린다. 두 잔을 채우지 못하고 술이 바닥난다.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담장 아래로 다가가 실이 잘 풀리도록 타래를 흔들어준다. 얼굴에 실 같은 거미줄이 닿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미들이 비행한 흔적일까. 거미줄을 손등으로 닦아낸다. 멀리 날지 못하고 마당으로 떨어진 새끼 거미들은 나뭇가지 뒤에 숨어 바깥을 엿보고 있겠지. 여덟 개의 홑눈에 맺히는 빛무리는 흐릿하게 어른거리겠지. 향나무 줄기 사이로 빛이 스친다. 나는 자리에서 멈칫한다. 망막에 갇혀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오르던 빛더미가 아니다. 짧게 번지는 노란빛. 걸음을 앞뒤로 옮기면서 나뭇가지들을 살핀다. 두리번거리며 막대기를 찾는다. 사침으로 쓰는 가느다란 대나무를 집어들고 가지들을 흔든다. 뭔가 툭 떨어진다. 청년의 반지다. 윤기를 잃어 흐릿한 반지를 호주머니에 넣는다.


눈물이 나올 만큼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누군가 청년을 업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불쌍해서……. 어찌야 쓰까. 할머니는 내게로 와 같은 소리만 되풀이했다. 새벽녘 잠에서 깬 듯한 그의 울음소리가 집 안을 뒤흔들었다. 나는 파랗게 질려 있는 청년의 어머니를 내 방으로 들어와 쉬게 했다. 고르게 잦아든 그녀의 숨결 사이로 이따금씩 우우우, 괴성이 들려왔다. 살얼음이 얼어 있는 철계단을 조심스레 밟았다. 활짝 열린 이층 현관 앞에서 나는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뭉그적거렸다. 고함을 지르다 지쳤는지 청년은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눈길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일어선 청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얼마 동안 머뭇거림의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청년은 덜덜 떨며 벌그름한 얼굴로 들어왔다. 청년이 반지를 뽑아들어 향나무 쪽 어둠 속으로 힘껏 내던졌을 순간, 지나간 시간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헛되게 애썼을 동안,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거미줄에 매달려 떠나라고 했던 그. 현기증처럼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쪽가위를 들어 실에 뭉쳐진 거스러미들을 하나씩 잘라낸다. 떨어진 실 가닥들이 생강나무 꽃처럼 누렇게 마당을 뒤덮고 있다. 어느새 해는 하늘 한가운데에 꽂혀 있다. 담장 너머로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놀이 기구 주변으로 들뜬 아이들이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청년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림자 길이가 뭉툭하게 짧아진 한낮, 그가 흥얼거리는 동요는 왠지 구슬프게 들린다. 호주머니에서 청년의 반지를 꺼낸다. 흘긋 쳐다보던 청년이 반지를 받아들어 풀을 먹인 날실들 위에 올려놓는다. 뜻밖에도 담담한 얼굴이다.


"잘살고 있겠죠."


활달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청년의 손에 들린 솔이 실 위를 쓱 지나간다. 숯 위로 반지가 떨어지는 순간 청년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떠나기 전부터 낌새가 이상했지요. 젠장, 모른 척 내버려뒀어요."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어머니의 반대는 핑계였죠. 부담스러웠어요. 세상을 너무 많이 아는 여자와 산다는 건 좀 끔찍스럽단 느낌이 들었죠. 그러나 차마 말을 꺼내진 못했어요. 쇼윈도 너머로 남자가 보일 때면 일부러 자릴 피해주기도 했죠. 그 여자, 빚이 많았어요. 그 돈으로도 부족했을 거예요. 잘된 일이죠. 그냥 보내긴 미안했는데."


타닥타닥, 비스듬히 놓인 숯 한 덩이가 천천히 쓰러진다.


청년의 머리 뒤 멀리 높이 솟은 대학병원 건물이 보인다. 산 중턱에 지어진 하얀 건물은 도시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띌 것이다. 호흡기를 뗀다면 그녀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개 같은 새끼. 어떻게 짠 건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저, 절대로 훔치지 못했을걸요."


느닷없이 흥분한 목소리로 청년이 내뱉는다.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 눈앞으로 휙휙 흰빛이 스쳐간다. 눈이 아프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개 같은 자식. 청년의 말을 마음속으로 따라 뱉는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숨은 띠를 향해 날아가는 꿀벌이나 하루살이들이 있다고.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맹렬한 비행의 속도가 있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성이다. 나는 목소리를 기억해내려 애쓴다.


벨이 울린다. 청년이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대요."


휴대폰을 귀에서 뗀 청년이 짧게 외친다. 얼굴이 치자꽃처럼 허옇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청년이 허둥거리며 뛰어나간다. 이번엔 마루에 놓인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형사의 목소리에서 덫에 걸린 짐승을 잡은 듯한 쾌감이 전해진다. 동네를 털던 좀도둑이 잡혔다고. 베는 벌써 서울로 넘겨졌다고 말한다. 타탁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린다. 베를 누구에게 건넸을까. 그 베로는 수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형사에게 말한다. 형사는 잠시 말을 끊는다. 연기를 내뿜는 듯한 긴 날숨 소리가 연거푸 들려온다. 수의를 만들거나 침대보를 만들거나 형사에겐 상관없는 일이겠지. 숯 위에서 바싹 마르고 있는 실을 초조한 마음으로 내다본다.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형사는 전화를 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에 누운 그림자들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바람은 더 이상 불지 않는다. 도투마리에 실이 모두 감긴다. 말코에 걸 실을 묶는다. 숯은 아직 열기를 내뿜고 있다. 묵직한 도투마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꾸리를 담은 종이 상자를 발로 밀쳐내고 도투마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상자를 들어본 형사는 무슨 일로 집을 비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바람을 쐬러 갔다고 했다. 바람? 미간을 찌푸리며 형사가 되물었다. 그날 밤 나는 바람을 맞으러 그가 머무르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수화기 너머로 멀어지던 그의 목소리가 뚝 끊기자 사방은 적막해졌다. 그는 어디론가 또 훌쩍 갈 것이고 한 달이나 두 달, 일 년이나 이 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곤 불쑥 나타날 때마다 내게 떠나라고 했다. 어디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더 이상 떠날 곳은 없었다. 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간다면 종착역엔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을 터였다. 어둠이 풀어지는 새벽 바다를 볼 수도 있겠지. 나는 종착역 대합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다시 집으로 왔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지 않았더라면 별일 아니라는 듯 언젠가 그와 함께 묵었던 산장으로 달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누굴까. 그의 전화일 리 없지만 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먼저 떠올린다. 뭔가를 더 캐물으려는 형사의 전화일 수도 있다. 열 번째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수화기를 든다.


"돌아가셨어요. 도착하기도 전에……."


청년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도 모르게 주저앉고 만다. 다리를 세워 한 손으로 무릎을 감싼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실 한 올이 툭 끊어지는 듯하다. 방으로 들어가 옷장 서랍을 연다. 하얀 보퉁이를 꺼낸다. 매듭을 풀어 수의를 쓰다듬어 본다. 처음 짰던 삼베로 만든 것이다. 설핏한 베 올. 거친 올들이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죽을 때 입으려고 만들어 둔 수의다. 잠들 때마다 머리맡에 수의 보퉁이를 놓았다. 깊이 잠들 수 있게. 꿈은 거의 꾸지 않았다. 아주 가끔 꾸는 꿈속에서 나는 먼지만큼 작아진 날벌레였다. 완전 둥근그물을 친 호랑거미가 거미줄 한가운데 바퀴통에 매달려 있었다. 눈을 뜰 수 없게 눈부신 빛줄기. 별똥별처럼 빠르게 숨은 띠로 날아가는 내가 보였다. 보자기로 수의를 싼다. 새로 짤 시간이 없으니 그녀에게 내줄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올들은 썩기 시작하겠지.


새로 술병을 꺼내 들고 방으로 온다. 낡은 베틀 다리에 잠시 등을 기댄다. 일하기 전 술을 마시는 건 습관이다. 허둥거릴 까닭은 없다. 내가 입을 수의를 다시 짜면 되는 일이다. 도투마리를 들어 베틀에 올린다. 새를 나눈 실을 잉아에 건다. 바디집에 바디를 걸고 실 끝을 말코에 묶는다. 이백 올씩 나누어진 날실은 씨실과 단단하게 맞물려 바탕을 이루게 된다. 유리창을 흔들며 바람이 지나간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온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베틀을 밟기 시작한다. 씨실을 풀어내는 북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누렇게 풀을 먹인 날실들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솟구쳐 올랐다 내려가는 날들에 눈길을 붙박는다. 올올이 당겨진 실들 위로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발을 까닥일 때마다 그들은 가까워지고 또 멀어진다. 춤추는 날들이 눈부시다. 옴짝달싹 못하고 숨은 띠에 달라붙은 날벌레가 된 기분이다. 머지않아 거미줄에 온몸이 친친 감기겠지. 멀리 떠나라구.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끼 거미가 될 수 있을까? 사백 올의 실 위로 바람을 기다리는 새끼 거미가 줄을 내린다. 실들이 노래한다. 엄마, 새끼 거미들은 어디로 날아가? 작고 연한 거미는 다리를 오그린 채 베틀의 노래를 듣는다. 찰칵슥삭찰칵슥삭. 여름이 올 때까지 실은 여기저기서 툭툭 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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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세계02)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9 00:08

작품명 :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성 명 : 심은희 
 
<심사평> 유종호 (문학평론가), 이시영 (시인)

"작품마다 결정적 새로움 부족…당선작 '젊음의 직핍' 돋보여"
예심자의 진지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본심에 넘어온 작품들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도 시의 말법을 익히지 못한 평균 이하의 시들이 섞여 있는가 하면 사적인 감정의 절제 없는 토로를 서정시로 착각한 작품들도 많았고, 지리한 자기 주장을 역시 반성 없는 지리한 산문 형식에 의탁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먼저 '공터는 만삭이었네'(전혁)는 노래의 유연성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시였다. 1연의 "공터는 어머니들/쉬었다 간/ 자리였네/ 젖먹이들 응석부림에/ 목이 늘어나/ 보유스름한 가슴/ 언덕 드러낸 메리야스"라거나 2연의 "풋풋한 공터의 아이들이/ 휘휘 휘파람 불며/ 어머니들 품으로 되돌아가고/ 만삭의 달이/ 뽀도독/ 힘찬 턱걸이를 시작하는 시간" 같은 구절은 이제는 사라져버렸지만 지난 한 시절의 가난의 탁발한 시적 형상화다. 단, 낡은 내용을 너무 낡은 형식에 수습하고 있어서 오늘의 젊은 시로서는 한계라는 점. 작품마다 뚜렷한 현대성을 성취한 백석의 경우를 고구(考究)해보기 바란다.


'마음의 위기'(김지연)와 '기념품'(박선영)은 각기 단아한 서정시들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잎은/ 시든 꽃잎을 위해" 내리는 비의 운행이 "계절과 계절 사이" 혹은 "벌어진 계절의 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족적 공간에 갇히고 마며, 후자는 전자에 비해 시상(詩想)의 전개도 활달하고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솜씨도 볼만하며 이제까지의 꽃과의 대화를 전복하여 '나' 스스로 씨앗인 기념품이 되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이동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즉 시에 기운이 생동하지 않는다.


'그 집 앞 능소화'(이현승)와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심은희)는 앞의 작품들에 비해 당선권에 훨씬 더 육박해 있으나 두 작품 공히 어떤 결정적인 새로움을 담보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그 집 앞 능소화'는 이른바 '마음'의 행방을 좇는 시여서 절제되어 있고 고즈넉하나 행간(行間)이 표현된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내장하고 있지 않으며 언어와 언어 사이의 긴장 또한 없다. 긴장이 없으니 시적 울림이 없고 울림이 없으니 좋은 예술품이 거느리기 마련인 소란 뒤의 고요의 그늘이 없다. 모호한대로 생활의 실감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인 듯 싶다.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로 시작되는 1연은 젊음 특유의 직핍하는 절규이며, 2-3연의 세부묘사는 죽음을 잊고 사는 오늘의 도시현실에 대한 통렬한 고발로도 읽힌다. 그리고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는 파격을 선사하고 있는 4연은 이제까지의 모든 현실을 다시 공(空)으로 돌리는 불교적 각성에 이르게 함으로써 이 시가 세속의 삶을 명상의 눈으로 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표현이 다소 모호하고(하기야 모호성도 현대시의 한 특장이다) 얼개가 좀 삐걱거리긴 해도 환멸과 도시적 삶의 권태까지를 포함하여 생활인의 구체적 실감에 기초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며, 이 작가의 앞날의 가능성에 선자들의 더 큰 기대를 걸기로 한다.
 
 
작품명 :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성 명 : 심은희
 
 
 
다시 '나'를 검열하자...그리고 세상을 돌아보자


기뻤다기보다는 얼떨떨했다. 첫 응모라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탓에 막상 당선 소식을 듣고는 덜컥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시를 쓴다, 쓴다 하면서도 쉽게 세상에 디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준비는 항상 부족했고 시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웠다. 그걸 참고 고칠 수 있을 때까지 몇년씩 묵혀두기도 하면서 아주 가끔씩 그렇게 시를 써왔다. 돌이켜 보면 어리석게도 시를 썼던 시간보다 시가 도리질치다 달아날까 봐 안절부절 못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다만 어렸을 적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시를 쓰겠노라고 우격다짐하던 기억은 있다. 지금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한 출발선에 있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위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까지도 나의 화두가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한 편의 시를 쓰거나 고칠 때 뿌듯한 적인 많았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적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행복한 책읽기가 가능하듯이 행복한 글쓰기도 가능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그럴 수록 철저한 자기 검열을 거쳐 나름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시금 시를 쓸 용기를 주신 두분 심사위원님과 항상 그리웠지만 제대로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한신대 국문과-문창과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함께 고민을 나누었던 내 오랜 벗들과 문창 선-후배님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과 언니, 동생에게 진한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영광인데, 시를 쓸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행운인 듯싶다.

【약력】

▲1974년 서울 출생

▲1993년 정의여고 졸업

▲1997년 한신대 국문과 졸업

▲1999년 경희대 대학원(현대시 전공) 졸업

 
 
작품명 :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성 명 : 심은희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
그만 살았으면 싶은 노인들의 푸념 또는 수작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진 가로수들이나
심하게 쳐진 할머니 입꼬리에 걸린 담배처럼 언제라도 툭
떨어질 듯이 과자 봉지를 들고 질주하는 어린 아이를 볼 때면
그것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기어이 아이의 과자는 축포처럼 공중분해되고
어디선가 날아든 비둘기들은 겁도 없는 상이군인처럼
버스전용차선으로 뛰어든다 순간 나는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어머니의 노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비틀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제 알겠다 콘크리트 벽에 일렬로 달라붙어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나이트 클럽 벽보를
무슨 복권처럼 긁고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왜
까닭모를 화가 치미는지를
버스는 이내 저 홀로 풍성한 계절을 맞이한 청소차를
아슬아슬 비껴나간다 청소차에서 분명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차가 덜컥덜컥거리며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짤랑거리며 들어서는 건 언젠가는 내 몸 가장
투명한 부분을 밀치고 들어설 낯선 불행들일 것이다;갑자기 숨이 가빠온다
(아까부터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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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어와 빙어(세계02)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9 00:05

작품명 : 공어와 빙어
성 명 : 신현대 
 
<심사평> 김윤식.오정희

"적절한 복선배치-문체…안정된 구성력 두각 "
예심에서 올라온 9편의 작품들을 읽으며 소재와 주제의 다양함, 다채로움이 일단 반가웠다. 그중 박정윤씨의 '미역이 올라올 때',장용석씨의 '닭',안성호씨의 '저 하늘에 떠 있는 사내를 보라',신현대씨의 '공어와 빙어'에 주목하였다. '미역이 올라올 때'는 문장의 속도감이 있고 발랄하였으나 할머니와 정신병을 앓는 어머니, 아비를 모르는 자식들인 주인공과 이모 등으로 이루어진 가족구성원 모두 지나치게 주술적인 분위기에 의존하여 그 존재가 어렴풋하고 산만하였다. 어떤 암시나 복선이 없이 뒷부분에 주인공의 애인이 등장하는 것도 구성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시니컬한 문체로 백수생활 3년차 청년의 암울한 심리를 그린 '닭'은 묘사력도 뛰어나고 시종 소설로서의 오기 혹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칼'에 대한 관념이 장광설로 끼어들며 구심점을 흐트렸다는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욕심을 자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 하늘에 떠 있는 사내를 보라'는 신선하고 활달한 상상력을 십분 발휘하여 흥미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서부터는 떠 있는 사내에 대한 상징과 풍자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여 어수선한 코미디같이 되어버렸다.


'공어와 빙어'는 퍼즐놀이처럼 섬세하고 복잡한 독법을 요하는 소설이다. 적절한 복선의 배치, 주제에 걸맞는 투명한 문체, 안정된 구성력으로,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 남매의 해후, 얼음같은 세월을 품고 살아온 그들의 상흔과 외로움을 얼음속의 물고기 '빙어'에 견주어 형상화하고 있다. 때로 문장의 기교가 지나쳐 표현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나 작의랄지 속내랄지 하는 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끝까지 고른 리듬을 지켜가는 것, 소설을 풀어가는 솜씨에서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이해도나 공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기에 망설임없이 당선작으로 뽑는다.

 
 
작품명 : 공어와 빙어
성 명 : 신현대 
 
당선 소식을 듣고 집 앞 초등학교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언 손을 녹이며 체육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운동장엔 겨울이 눈처럼 쌓여만 가고, 구석진 곳에선 길 잃은 아이들이 얼어버린 땅 위에 웅크리고 앉아 삭정이로 뭔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적고 있는 것이 무엇인줄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누구인줄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훌쩍 어디론가 떠나갈 아이들.

손으로 꼽아보니 벌써 십 년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해 가을,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이었죠. 스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무턱대고 집을 뛰쳐나와 스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가슴에 맺힌, 언젠가부터 가슴을 옥죄어 밭은 숨만 몰아쉬게 하던 무엇인가를 풀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인가 지리산 여기저기를 헤매다 마지막에야 불일암이란 곳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불일폭포 위에 있다던 작은 암자. 몇 끼를 굶은 허기진 배로 새벽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렇게 폭포 앞에 다다랐고,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 앞에서 목놓아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불일암이란 곳은 소실되어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자주 그 생각을 합니다. 폭포 앞 바위에 앉아 안개에 휩싸인 계곡을 바라보던 아이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만 내려가라고, 너와는 인연이 아니라고 등뒤에서 가슴을 후려 패던 폭포소리도 기억납니다.

십 년이 지났지만 그때와 달라진 걸 찾으라면 솔직히 자신이 없어집니다. 가슴에 쌓여만 가는 것들을 풀어내려 글을 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미욱한 글을 뽑아주신, 작은 인연의 한 자락을 잡아 주신 김윤식, 오정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호된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신 본교 선생님들과 동기들, 소설분과 친구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끝으로 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항상 하늘에서 지켜봐 주시는 아버지에게 이 기쁨을 전합니다.

<약력>

▲1976년 충북 단양 출생

▲1994년 제천고등학교 졸업

▲1996년 세종대 영문과 입학

▲1997년 군입대

▲1999년 세종대 중퇴

▲현재 동국대 문과대 문예창작과 2학년 재학중

 
 
작품명 : 공어와 빙어
성 명 : 신현대 
 
토요일 오후 아홉 시경, 빙판 길을 과속으로 달리던 서울3라 5862 흰색 쏘나타 승용차가 커브 길에서 미끄러지며 남한강 아래로 추락, 이 사고로 김○○(48)씨와… 건성건성 신문을 훑어 가던 남자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남자가 무릎에서 신문을 들어올린다. 이 사고로 김○○(48)씨와 유○○(48)씨 부부가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전국 폭설 빙판 길 사고 곳곳이라는 굵은 활자체 하단으로 흰색 쏘나타 승용차가 보인다. 차는 지금 막 크레인 줄에 걸려 두꺼운 빙판 속에서 인양되고 있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남자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릉행 고속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간밤에 내린 폭설로 버스들은 줄줄이 연착되고 있었다. 대합실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은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모여들었다. 수상기에서는 밖의 날씨와는 전혀 무관한 남미 어느 나라의 축구중계가 방송되고 있었다. 골은 쉽게 터지지 않았다. 연신 미드필드에서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느라 남자는 스포츠신문을 샀다. 그리고 사회면을 보다 다시 매표소로 간다. 겨울낚시에 걸린 월척처럼 구멍 난 빙판 속에서 꺼내지던 승용차와 사망자 중의 한 이름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강릉행 우등고속 차표를 사고가 난 곳으로 바꾼다. 오천 백 원을 거슬러 받는다. 시간표대로라면 출발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차표를 바꾼 남자는 다시 대합실 의자에 앉아 검정 모나미 펜을 꺼내들고, 신문에 실린 '알쏭달쏭 낱말 퀴즈' 의 퍼즐을 맞춰 간다.

가로 18번. 공법상의 의무 이행이나 질서 유지를 위해 위반자에게 과하는 벌금.

과징금인가? 남자는 실제로 몇 번의 과징금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답이 확실치 않은지 세로 16번을 찾아간다. 가로로 놓인 단어의 첫 음절이 세로 16번, 네 칸의 빈 공간 중 두 번째 칸과 겹쳐 있기 때문이다. 퍼즐은 결코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퍼즐에서 단어를 쉽게 알아맞히는 방법은 겹쳐진 또 다른 빈칸의 단어를 확인해 보는 방법밖에 없다. 이를테면 '글을 깨치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는 네 음절의 가로 칸 단어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내 마음의 풍금'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세로 칸의 남자 배우와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퍼즐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찾아내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자는 계속해서 가로와 세로 칸을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퍼즐을 맞춰 간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의 퍼즐이 풀리지 않는다. 가로 몇 번. 부부가 아닌 두 중년 남녀가 한 차를 타고 가면,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남자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세상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엉뚱한 답들이 즐비하다. 퍼즐은 역시 다른 세로의 빈칸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채널이 기상예보로 바뀌자 남자는 수상기로 시선을 돌린다. 긴 꼬리가 매서운 눈보라에 걸려 있는 듯, 눈길 위로 옴짝달싹못하고 서 있는 차량들이 화면을 꽉 메우고 있다. 이 궂은 날 어딜 가려고 저들은 집을 나섰을까. '미시령'이라고 쓰여진 이정표가 길가에 서 있다.

장의차가 멈춰 섰다. 매서운 눈보라가 앞유리창에 세차게 부딪친다. 수증기가 낀 유리창에 남자가 손바닥으로 투명한 페인트를 쓱쓱 칠하자 금세 낯선 호수의 풍경이 그려진다.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로 어둠이 성깃성깃 내리고 있다. 작은 회오리바람이 미끄러져 가다 유선장(遊船場) 빙판 위에 얹혀 있던 놀잇배들 위로 올라타는 게 보인다. 창 밖을 내다보던 남자는 유리창에 겨울 바다와 영하의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배 한 척을 그린다. 반달 모양의 선체를 그리고, 돛대를 우뚝 솟구쳐 올린다. 일이 터지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남자는 강릉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거친 파도와 작은 배가 유리창 위로 주르륵 녹아 내린다.


"뭔 놈의 날씨가 이 지랄인지. 체인이라도 둘러야겠네."


운전기사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려간다. 겨울 호수만큼이나 장의차 안은 휑뎅그렁하다. 차 안은 남자와 운전기사 그리고 여자, 셋뿐이다.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선다. 삼베로 짠 옷을 입고 있어서일까. 하얀 빛깔의, 시린 눈꽃 같은 여자다. 흰 빛깔의 보자기로 싼 함이 여자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다. 여자가 내려가다 말고 뒤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돌아본다. 남자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 밖, 길 건너엔 호수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스물 여덟 해, 여자를 잡아놓았던, 둥그런 호수가 이젠 쇠고랑처럼 느껴지는.


출발하려는지 타이어에 체인을 두른 기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여자를 돌아본다. 여자가 차 안에 앉아 있는 남자를 올려다본다.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호수에 박혀 떠날 줄을 모르고 있다. 여자가 유리창에 손을 올려 얼어버린 창을 탁 탁 두드린다. 얇은 얼음에 잔금이 가듯, 바스락대는 남자의 어깨. 얼어버린 고개가 천천히 부서져 내리며 여자에게 향한다. 호수에서 갓 건져낸 듯 차가운 눈빛이다. 매운 바람이 둘 사이를 빠르게 스쳐간다. 독한 년이여… 독한 년이여… 어젯밤, 빈소에서 속닥거리던 사람들의 말이 여자의 귓불을 빨갛게 때리고 지나간다. 귀가 떨어질 듯 아프다.


이제 내려야 해요. 벙긋벙긋 입 모양으로 말하며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장의차가 눈길 위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사라지고 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휩쓸린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켠다. 바람에 불이 붙지 않는다. 찰칵, 찰칵. 섬광처럼 불똥만 튄다. 담배를 던져버린 남자가 사방을 둘러본다. 수증기 낀 유리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놀이공원이 남자의 앞에 놓여 있다. 남자는 자신이 호수와 놀이공원을 가로지르는 길 위에 내린 것을 깨닫는다. 멀리 호숫가를 따라 포장마차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남자는 이곳이 작은 호수를 낀 유원지라는 것을 알아챈다. 남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작은 등을 본다. 여자는 놀이공원을 보고 있다.


"큰 놀이공원 같은 곳에 대면 꽤 작지만, 회전목마에 바이킹, 없는 게 없어요."


여자의 입에서 담배연기 같은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연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녹슨 정문 안으로 눈에 덮여 하얀 고깔모자가 된 지붕의 회전목마가 눈에 띈다. 둥글게 맴을 돌았을 빨강, 노랑, 파랑, 갈색 목마들의 머리와 안장에 눈이 수북하다. 고개를 수그린 채 깊은 잠을 자는, 그런 모습이다. 옆으로 회전그네와 찻잔, 다람쥐 통들이 작은 짐승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바람에 쓸린 과자봉지와 낙엽 부스러기들이 그들 사이를 쓸쓸히 배회하고 있다.


"꼭 악한 마법사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지 않아요? 오즈의 마법사 본 적 있죠? 도로시랑 토토,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양철인간 들이 나오는 동화. 이곳을 지날 때면 오즈에 온 기분이 들곤 해요. 특히 이런 겨울에는 더 하죠. 커다란 찻잔들이나 줄에 묶여 결국엔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는 그네, 떠나버린 다람쥐를 기다리는 버려진 다람쥐 통들. 마법에라도 걸려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르는 것 같아요."


여자는 처음 놀이공원으로 싣고 오던 목마와 회전그네, 찻잔들을 기억한다. 며칠 동안이나 큰 이사를 했었다. 잘 닦인 터에 울타리가 세워지고 바리바리 이삿짐을 실은 차들이 한적한 호숫가를 요란스레 점령했었다. 여자는 구경 나온 아이들 사이에서 구경을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새것이 아닌 헌, 꼭 재활용쓰레기장에서 쓸 만한 것들을 주워와 호숫가에 주욱 펼쳐놓는 것 같던 모습들. 잔뜩 때가 낀 찻잔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었다. 녹슨 그네들은 전부 줄이 끊어져 있었고, 목마들은 갈기에 메마른 모래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래도 바이킹을 옮겨올 땐 굉장했어요. 큰 기둥이 두 개 세워지고, 그만큼 큰 트레일러가 왔죠. 트레일러 위에는 아주아주 커다란 천으로 가려진 바이킹이 있었어요. 그런 것 있잖아요. 마술 쇼에서 검은 보자기 안에 귀여운 토끼를 넣었는데, 보자기를 확 펼치니까 빨간 장미꽃이 나오는 거. 잔뜩 신이 나서 기다렸죠. 뭐, 딴 게 나올 거라는 상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히 기대가 되잖아요. 그런데 확 펼쳐진 보자기 속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꼭 오래 전에 바다에서 끌어낸 난파선이지 뭐예요."


웃음을 참는지 여자의 목에서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난다. 커다란 바이킹이 남자의 눈에 가득 찬다. 기우듬히 철탑에 걸려 있는 모습. 여자의 말대로 바다에서 오래 전에 끌어낸 난파선 같다. 노란 페인트 칠이 벗겨진 작은 생채기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짙은 귤색으로 대충 덧칠을 해놔서 눈에 쉽게 띈다. 고물 쪽은 뭔가에 호되게 부딪혔는지 움푹 꺼져 있다. 끼이이. 바람에 흔들리며 녹슨 쇳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온다. 하지만 바이킹은 거센 파도를 타던 모습 그대로 얼어 있을 뿐이다. 저 바이킹은 무엇을 잃고, 아니 무엇을 꿈꾸며 철탑에 걸려 있는 걸까. 용기? 심장? 그도 아니면, 도로시의 집과 같은 심연의 바다? 남자는 궁금해진다. 함이 무거웠을까. 여자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휘우뚱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진 여자의 어깨에서도 녹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길 건너 얼어버린 호수를 바라본다. 유선장 근처를 서성이던 바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배는 떠났을까. 남자는 강릉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배를 떠올린다. 오늘 아침이 출항예정이었다. 용역회사에서 소개를 받은 배였다. 서울에서 떠나올 때 받아놓은 연락처로 전화를 넣었지만 통화중이었다. 그 후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배는 남자를 남겨두고 떠났을 것이다. 빙판 위로 띄엄띄엄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겨울낚시꾼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낚시를 간다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어젯밤, 시경 교통과 소속의 중년 경사와 함께 남자는 병원 주차장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가족들에게는 낚시하러 간다고 하셨다지만 가방에는 릴낚시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 엄동설한에 참. 꼭지도 안 떨어진 기자 놈이 신문엔 부부라고 올렸던데, 신원 조회하니 그것도 아니고, 이럴 때는 정정 보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은근히 비웃는 투로 경사가 비아냥댔다.


"마침 뒤에 다른 차가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그 쪽이 워낙 한가한데다 가드레일도 없겠다, 하마터면 날 풀려도 실종자 명단에 계속 오르내릴 뻔했어요. 남한강 바닥 샅샅이 뒤지면, 아마 이런 주차장 하나는 거뜬히 채우고도 남을 게요."


깜깜한 주차장을 손으로 쓰윽 훑는 시늉을 하며 경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남자의 고개는 자꾸만 빈소 쪽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에 섞여 따뜻하고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부침개 냄새 같았다. 점심을 거른 빈속이 싸아하게 쓰려왔다.


저녁 일곱 시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곧바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오후에 서울로 옮겨지고 난 뒤였다. 집으로 먼저 연락을 할 걸 그랬나. 잠깐 후회를 했다. 자신은 내려오고, 아버지는 올라가고……. 항상 그렇더니 결국 마지막도 어긋나버렸다. 어쩌면 길 어디쯤에서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어디쯤이었을까.


"그럼."


경사에게 대충 인사를 한 남자는 빈소로 걸어갔다. 속이 쓰려왔다. 맥이 쑥 빠지고 발걸음이 허청거렸다. 어이, 잠깐만요. 경사가 손짓으로 남자를 불러 세웠다.


"잊을 뻔했네. 다 인계된 줄 알았는데 하나가 빠졌지 뭐요."


경사가 파카 속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건네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짙은 어둠이 금세 경사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쥐어진 물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비닐봉투였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지갑이었다. 지갑을 꺼내는 남자의 손에 축축한 물기가 배어 났다. 비닐봉투 속에 채집된 단서를 꺼내드는 형사처럼 남자는 긴장을 했다. 지갑에는 물에 젖은 얼마의 현금과 신용카드가 여러 장 꽂혀 있었다. 투명한 비닐 칸으로 형체가 흐릿한 사람들의 윤곽이 보였다.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남자는 가로등 빛이 반사되게끔 지갑의 한쪽을 기울였다.


"겨울만 되면 저래요. 저 사람들, 일년 내내 호수가 얼기만 기다리거든요."


여자의 왼쪽 어깨가 아래로 기울어진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함을 바꿔 잡은 탓이다. 여자가 호수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저 사람들 뭘 잡고 있는 줄 아세요? 재미난 고긴데… 아, 그러지 말고, 날도 추운데 떠나시기 전에 포장마차에서 한 잔 하고 가세요. 가더라도 속이나 따끈하게 덥히고 가야죠. 실은 저 사람들 잡고 있는 게 술안주로 그만이거든요."


여자가 남자를 보며 빙긋 웃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의 눈이 짓궂은 개구쟁이 같다. 기울어진 여자의 어깨를 보고 있던 남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시침이 다섯 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대로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러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대답도 듣지 않고 벌써 여자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남자가 머뭇머뭇 뒤를 쫓아 걸어가기 시작한다. 호수 주변으로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는 포장마차들 속에서 불빛이 새나온다. 유행가의 경쾌한 리듬이 지붕 위 연통에서 흘러나온 연기에 섞여 뿔뿔이 흩어져 가는 게 보인다.


남자와 여자는 낡고 허름한 포장마차 앞에 서 있다. 주황색 천막에 적힌 '진천댁'이라는 상호가 큼지막하다. 문을 따고 들어섰을 때는 이미 온몸이 얼어 있다. 며칠 동안이나 문을 닫았을까. 어두컴컴한 가게 안은 밖과 별다를 게 없다. 되려 갇혀 있던 한기가 왈칵 밀려든다.


여자가 스위치를 켜자 알전구가 오랫동안 깜박거리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명이 다해가나 보다. 벽의 모서리마다 빙 둘러친 색전구들에도 알록달록한 불빛들이 켜진다. 노랗고, 붉고, 푸른 빛깔들 사이로 가게 안이 드러난다. 기역자로 꺾여 밖으로 나 있는 연통을 달고 가운데에 난로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난로 주위로 다섯 개의 둥근 스테인리스 식탁과 서너 개의 플라스틱 간이의자들이 따다만 꽃잎처럼 흩어져 있다. 나머지 의자들은 구석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 여자가 함을 의자에 올려놓는다.


"아휴 추워. 불 좀 지펴 주세요."


널찍한 판자로 엮어 짠 주방으로 여자가 몸을 움츠리며 들어간다. 주방엔 커다란 냉장고와 조리대가 있고 냄비며 프라이팬, 조리기구들이 판자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다. 찬장에는 플라스틱 접시들이 가득하다. 구석에 쌓여 있는 장작과 기름통을 가지고 남자가 난로에 불을 지피는 사이, 여자는 깻잎을 씻고 흰 파빅스 통에서 미리 껍질을 벗겨 놓은 마늘과 몇 줌의 고추를 꺼내 식칼로 숭덩숭덩 썰어 나간다. 함을 들던 손이 얼었는지 입김을 쐬지만, 여자의 손놀림은 꽤 익숙하다.


타닥타닥. 마른 껍질이 터지며 장작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연통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들이 알큰한 냄새를 풍기며 가게 안으로 퍼진다. 허공 중에서 색전구의 불빛들이 얽혀든다. 의자 위에 올려진 함 위로 연기가 아른거린다. 함이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놀이공원, 화장터, 호수… 불꽃을 보며 남자가 중얼거린다. 남자가 보았던 이질적인 풍경들이 매캐한 연기와 형형색색의 빛들에 섞여 머리 속을 떠돈다. 결코 섞이지 않을 것 같은 풍경들. 하지만 상이한 풍경들 사이에는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겹쳐진 부분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여자가 고추장에 식초를 풀어 초고추장을 만들고 있다. 난로의 뜨거운 열기에 남자의 두 눈이 빨갛게 익어간다.


잔 얼음이 송송 떠다니는 얼음물이 담긴 양재기에 젓가락이 푹 꽂힌다. 연해 들려올 아득 아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 뭉툭한 골이 팬 단단한 석회질의 어금니에 자근자근 바스러질 뼈의 비명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입술을 달싹거린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심하게 부르튼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말을 듣지 못한다.


남자의 아래로 기울어진 시선은 온통 여자의 젓가락에 쏠려 있다. 얼음물 속을 천천히 맴돌고 있는 한 쌍의 젓가락에 박혀 있다. 으스름한 저녁 하늘의 어느 냇가. 말라죽은 삭정이를 꺾어 냇물을 휘젓는 계집아이의 기다림 같다.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 아빠와 엄마를 기다리는, 혹은 봉긋이 부풀어 오른 가슴의 작은 멍울에서 느껴지는 먹먹함을 보드랍게, 혼자 있다는, 혼자서 텅, 빈, 집까지 가야 한다는 아픔을 보듬어줄 사내아이를 내심 기다리는 것일지도. 그런 휘저음일지도. 석양의 냇물과 발갛게 물든 마음 속 냇물의 물살을 때로는 역행하고, 때로는 순행하는 것일지도. 남자는 한 쌍의 젓가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번뜩이는 여자의 젓가락. 여자는 보기 좋게 남자의 상상을 배신한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건전지를 뺀 초침처럼 탁 정지하고, 여자의 젓가락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잡았다. 이 녀석. 월척을 낚아채는 낚시꾼 같다. 한 쌍의 낚시대에는 어느새 작은 물고기가 잡혀 있다. 파다닥, 파다닥. 젓가락 사이에서 물고기가 요동친다. 온몸을 비틀어댄다.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것만 같다. 여자가 재빨리 깻잎에 물고기를 올려놓고 초고추장으로 쌈을 싼다.


아득, 아드득. 여자의 가칠한 입술에 빨간 고추장이 묻어난다. 하얀 삼베옷에 빨간 고추장이 떨어져 붉게 물든다. 눈언저리에 질끈 힘을 주며 소주잔을 입술에 갔다대던 남자가 물끄러미 잔 속을 들여다본다. 물고기가 혹시 잔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만드는 너울 속으로 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두려워진다.


"드셔 보세요. 쌉쌀하면서도 담백한 게 맛이 기막혀요."


허리께가 으스러진 속살이 이빨 사이에서 미끄러지나 보다. 여자의 볼이 올강볼강 실룩거린다.


"공어라고 해요. 빌 공(空)에 고기 어(魚). 그러니까 몸이 텅 빈 고기라는 뜻이죠. 물론 진짜로 텅 빈 건 아니에요. 보세요. 뼈랑 내장이 죄다 보이잖아요. 전국에서도 특히 이곳 공어가 최고예요."


여자가 소주를 쭈욱 들이켜며 입가심을 한다. 작은 물고기들이 차가운 얼음물 속을 헤엄치고 있다. 여자의 말대로 뼈와 내장이 고스란히 보인다. 공어라고? 신기하다. 하지만 추워 보인다.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만 같다. 다시 여자의 젓가락이 녀석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선다. 여자가 입맛을 다시며 침을 삼키고 있다. 모르게 남자도 침을 삼킨다. 여자의 입가에 묻은 초고추장이 계속 신경을 자극한다. 하필 왜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이미 아버지는 땅 속에 묻혀 있을 텐데, 마지막이라도 아버지를 봤어야 하지 않았을까. 남자는 애써 여자의 입술에서 시선을 돌린다.


"저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죠? 그 사람들처럼, 아 죄송해요. 하여튼 머리채라도 쥐어뜯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은 아니던데."


아드득, 아드득. 여자는 다시 한 마리를 입 속에 넣고 씹으며 남자를 본다. 주황색 천막 사이 비닐창 너머로 남자의 눈길이 걸어가고 있다. 하얀 눈보라가 소나무 사이를 스쳐가고 있다. 남자의 눈길이 가로등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경사가 떠나고도 남자는 한참을 서성이다가 빈소로 향했다. 발길을 돌려 서울이나 강릉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밤차를 타면 집이나 강릉에 새벽까지 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랬으면 염습을 했을 수도, 배를 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이 계속 쓰려왔다. 아버지와 같이 타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 저 눈꽃 같았다. 창 밖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꽃처럼, 영정 앞에 무릎을 괴고 앉아 있던 여자가 생각난다. 여자의 몸에서 흘러 넘치던 서슬퍼런 냉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년이라고 구석에서 쑤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는 여자……. 그랬다. 남자는 대번에 여자가 누군지 알아챘었다. 어머니와 동생들도 단박에 알아봤을 거다. 제기랄. 남자의 텅 빈 속에서 욕지기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시큼한 현기증이었다.


"오늘은 꼭 소풍가기 전날 같아요. 학교를 다니던 내내 제가 제일 싫어했던 날이 언제인줄 아세요."


여자는 뼈를 잘게 씹으면서도 전혀 끊어짐 없는 말로 얘기한다.


"시험 날도, 성적표에 도장 받아오던 날도 아니었어요. 바로 소풍 날이었어요.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일년에 두 번이니 스무 번이 넘는 그 짓을 항상 이곳으로 왔으니까요."


여자는 하얀 성에가 눈꽃처럼 핀, 창 너머로 어둠 속을 바라본다. 하얀 눈꽃들이 무성한 소나무 숲 사이를 떠돌고 있다.


"솔밭 공원. 항상 우리는 저 솔밭 공원으로 소풍을 왔죠. 봄, 가을, 우거진 소나무 숲이 만드는 시원한 그늘과 보송보송한 흙바닥에서 피어오르던 구수하고 달콤한 흙 냄새……. 둥글게 둘러앉아 장기자랑을 하고 놀았죠. 참 좋은 곳이죠. 그런데 웃기지 않아요? 소풍을 집 앞으로만 가야 하는 가련한 처지가. 한번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시시했어요. 아이들은 제자리에 앉아 가운데로 나간 아이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면 발그레한 흥분을 삭이며 생각하죠. 저 아이는 나를 뽑아줄까. 아니, 나는 잘하는 것도 없는데 날 뽑으면 어떡하지. 두려움과 설렘을 적당히 얼버무린 얼굴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거예요. 두근두근 심장의 피돌기가 빨라지죠. 그러곤 장기자랑이 끝난 아이의 눈이 주위를 한번 쓰윽 휘둘러보면, 아이들 대부분은 고개를 숙여버려요. 그러곤 마음 속으로 외치는 거예요. 나를 뽑아. 나를 택해. 뽑지마. 안 돼."


여자가 거푸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남자는 둥근 원의 한 고리였을, 아마도 별로 뽑혀본 적이 없을, 둥근 원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여자를 바라본다. 언제나 제자리에 앉아 손뼉을 치고 있었겠지. 저 여자는.


"그래도 그건 참을 수 있었어요. 제가 제일 싫어했던 건 바로……"남자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손수건돌리기였다. 어디를 가도 언제나 손수건돌리기를 했던 소풍. 남자는 너무 헐거웠다. 바투 앉아 있던, 이제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 몸만큼의 무게로 앉아 있던 아이들. 그 아이들 사이로 남자는 바짝 붙어 앉아 자신의 몸이 떠오르지 않기를 원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노래가 시작되고 손수건을 손에 감춘 아이가 천천히 원의 바깥을 맴돌기 시작했다. 둘러앉은 아이들은 술래가 자신에게 가까워지면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두 눈을 흡뜨고는 뒤를 힐끗거렸다. 누군가의 뒤에 몰래 떨어질 손수건. 내게 떨어뜨려. 나를 뽑아. 아니, 안 돼. 제발… 이상했다. 남자는 어김없이 걸려들곤 했다. 술래는 왜 내 뒤에 손수건을 떨어뜨릴까. 아이들의 중력에서 툭 끊긴 자리. 술래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은 그 중력의 빈 자리에서 허공으로 빙그르르 떠오른 걸까. 그래서 아이는 깜짝 놀라 그러쥔 손을 푸는 것일까.


남자는 손수건을 쥐고 일어나 빙글빙글 사라져 가는 술래 뒤를 쫓아갔다.

텅 빈,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계수나무 한 그루와 토끼 한 마리가 외로이 있을 남자의 자리를 향해. 그 자리를 향해 뛰어가는 술래. 가지마. 가지마. 그곳으로 가면 안 돼.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하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자꾸만 허청거렸다. 남자의 바램은 돛대도 달지 않은 나뭇잎 배처럼 방향을 잃고, 어느새 술래는 남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앉아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달싹거렸다. 이제 네 자리는 없어. 한 뼘의 공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단히 엉킨 중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손수건을 손에 쥔 남자는 술래가 됐다.

"이 고기, 빙어라고도 해요. 얼음 빙(氷)자를 써서. 재미있지 않아요? 겨울에 수면 가까이 산란하러 나오는데, 그 때 사람들에게 잡힌다고 빙어라고 하죠. 난 꼭, 요 텅 빈 뱃속에 겨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을 하곤 해요. 작은 몸뚱이 속에다가 겨울을 품고 있다가 토해내면 바깥 세상이 겨울이 되고, 몸뚱이는 텅 비어버린 채, 사람들 손에 잡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 작은 고기의 몸 속으로 겨울이 들락날락하는 거죠,"


"그게 무슨……"


그때, 천막 문이 들춰지며 가게 안으로 한 사내가 불쑥 들어선다. 남자의 물음이 저절로 끊긴다. 청재킷에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짧은 머리의 사내. 눈에 익은 얼굴이다. 어제 빈소에서 잠깐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잔뜩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다. 어제도 그랬다. 술 냄새가 훅 끼쳐온다. 사내는 앉지도 않고 말없이 남자를 노려보고만 있다. 시뻘건 눈빛이 꽤 매섭다고 남자는 느낀다. 잘못하면 한 대 후려칠 기세다. 여자가 사내를 밖으로 끌고 나간다. 마지못해 끌려가듯 사내의 눈빛은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밖으로 나간 그들 사이에서 이내 고성이 오간다. 갈 수 있어. 나두 갈 수 있다구. 술에 취한 사내의 고함이 들려온다. 사내는 어딜 갈 수 있다는 것일까.


청재킷의 고함을 들으며 남자는 젓가락을 냄비에 슬쩍 담가본다. 하나, 둘. 냄비 속에는 이제 두 마리의 고기만이 남아있다. 그 많던 고기는 모두 여자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공어라고 했던가. 빙어라고도 했지. 손가락 세 마디도 안 되는, 투명한 몸 속으로 뼈가 훤히 보인다. 한 마리가 젓가락 근처를 헤엄치다 주둥이로 젓가락을 툭 건드린다. 입질이 손끝에 느껴진다. 갑자기 가슴이 저릿하다. 또 한번 툭 건드린다. 저릿저릿 가슴이 저려온다.


왜 이러지. 가슴이 저린 남자가 왼손을 가슴에 얹고 꾹 누른다. 남자의 손바닥에 불룩한 감이 느껴진다. 지갑이다. 아버지의 지갑이다. 남자는 어젯밤에 보았던 사진이 떠오른다. 또 다시 시큰한 아픔이 찾아온다. 물고기의 자그만 입술이 남자의 가슴을, 아버지의 지갑을, 지갑 속에 들어있던 사진을 쪼아대고 있는 것 같다.


가로등 빛에 드러난 사진 속의 윤곽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어머니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들 뒤로 중학생인 현과 민, 두 동생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들은 남자 앞에서 별로 웃은 적이 없었다. 배가 다르다는 것은 그들에게나 남자에게나 극복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틈새였다. 하지만 남자는 이해하려 노력했다.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라고 불렀다. 동생들에게도 친근히 이름을 불러줬다. 대신 아버지와의 사이는 갈수록 어긋나기만 했다. 아버지의 결혼식 날, 남자는 지금 현과 민의 나이였다. 남자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찾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남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집을 나왔다.


왜 그랬을까. 왜 아버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낚시를 간다는 핑계로 항상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말마다 혼자 낚시를 가곤 했던 아버지. 정말 그랬을까.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애써 저으며 사진 속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들의 모습은 완벽했다. 어디 한군데 흠잡을 곳이 없는 사진이었다. 혹 작은 꽃병 하나라도 멋모르고 끼어 들면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꼭 서울로 가야만 할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신문을 읽던 그 순간 이미 품었던 생각인지도 몰랐다. 남자가 끼여들면 금세 구도가 깨어질 게 뻔한 사진. 멋모르는 꽃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가 천막을 들추며 들어서자 남자는 재빨리 젓가락을 초고추장으로 가져간다. 여자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있다. 청재킷의 사내는 들어오지 않는다.


술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다시 몇 병이 따졌다. 청재킷의 사내가 떠난지도 이미 오래다. 여자는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생긋생긋 웃으며 연거푸 술잔을 들이킨다. 낯빛이 해쓱해지며 여자의 말은 한층 수선스러워진다. 빈소에서 남자가 느꼈던 여자의 냉기. 그 시린 기운은 거짓이었나. 남자는 궁금해진다. 화장터에서 돌아와 장의차에서 내리던 순간 여자는 돌변했다. 왜일까. 여자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냉기는 어디로 갔을까. 술을 따르고, 마시고, 파닥이는 공어의 몸부림을 입으로, 혀로 느끼던 여자가 남자에게 불쑥 묻는다.


"왜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거죠? 궁금한 게 있어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남자는 술에 취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의 풀어진 눈빛이 게슴츠레하다. 그래, 무엇을 물어볼까, 생각을 해보지만 정작 뭘 물어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아버지는 계속 영정 속의 그 여인을 만나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왜 남자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해야할까.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일까. 이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대합실에서 맞추던 퍼즐이 떠오른다. 답을 모르던 가로 칸. 남자는 세로 칸이 알고 싶었다. 궁금했다. 그렇지만 퍼즐은 맥없이 풀려버렸다. 세로 칸의 단서는 여자였다. 여자를 처음 본 순간 퍼즐의 빈칸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을까.


남자가 젓가락을 집어 양재기에 푹 꽂는다. 금세 젓가락 사이로 작은 물고기가 들어선다. 남자의 젓가락이 물고기를 확 잡아챈다. 남자의 입 속으로 물고기가 사라진다. 이빨 사이로 고무공처럼 탄력이 느껴지는 몸뚱이가 걸린다. 여자가 남자를 유심히 쳐다본다.


"우리, 참 많이 닮았어요. 그죠?"


우드득. 남자는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


울긋불긋 희부연 빛을 뿜어내던 색전구들이 꺼졌다. 세차게 몰아치던 눈보라는 이미 온데간데없다. 한바탕 짓궂은 소나기라도 내린 것 같다. 새까만 밤하늘에 눈꽃이 흐드러지게 달려 빛나고 있다. 달빛에 아슴푸레 물든 호수가 보인다. 남자와 여자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달빛이 하얀 빙판 위에서 몰래 미끄럼을 타다 노송들의 가지 사이로 후다닥 숨어버린다.


여자가 눈길 위로 몇 발짝을 떼다가 휘청거린다. 기울어지는 몸을 남자가 잡아챈다. 여자가 뿌리치고 다시 걷는다. 뽀드득 뽀드득. 그리고 풀썩 주저앉아 버린다. 훔쳐보던 달빛이 깜짝 놀라 기척을 낸다. 가지 위에 쌓여있던 눈들이 놀라 후드득 떨어진다. 남자가 휙 고개를 돌려 숲 속을 노려본다. 달빛이 숲을 지나 놀이공원으로 숨어들어 가고 있다. 순간 회전목마와 찻잔이 작은 달처럼 투명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달이 거기 있다. 갈기를 휘날리며 목마의 달이 고삐를 끊고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것만 같다. 커다란 배 모양의 반달이 돛대를 펴고 힘차게 노를 저어올 것만 같다.


벌겋게 녹이 슨 곳이 부대끼며 쇳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이 쿡쿡 쑤셔온다. 물고기의 입질처럼, 녹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달빛이 남자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다. 달빛이 낚시 바늘처럼 꼬부라져 시커먼 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낚시바늘 끝에 달린 미늘이 날카롭게 번득인다. 무엇이 걸려들까. 텅 비어버린 몸뚱이 속에서 무엇이 건져 올려질까.


"조금만 업어줄래요."


여자의 날카로운 미늘이 남자의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


"무겁지 않아요? "


여자가 남자의 등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인다. 여자를 업고 걸은 지가 꽤 지났지만 남자의 발걸음은 이상스레 침착하다. 가로등 끊긴 길 위로 쌓인 눈이 형광색 도료처럼 빛나며 남자를 인도하고 있다.


"보세요. 달이 밝아요. 아침엔 날씨가 참 좋을 것 같아요. 소풍가기 딱 알맞은 그런 날씨 말이죠. 휴, 다 와가네요. 그만 내려줘요."


뒷목에 와 닿는 입김에 오슬오슬 한기가 돋는다. 여자의 두 팔이 남자의 목을 꽉 조인다. 내려달라는 말과 달리 여자는 남자의 등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여자가 말한 파란대문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남자의 눈앞에 하얀 보자기로 싼 함이 대롱거리고 있다. 함의 모서리가 남자의 가슴을 툭툭 쳐댄다.


남자의 몸이 푹신한 소파 속으로 꺼져 들어간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남자를 비추고 있다. 여자가 들어간 방은 고요하다. 남자는 소파 위로 다리를 뻗고 드러눕는다. 뻥 뚫린 가슴이 보인다. 달빛이 아직도 낚시를 하고 있나 보다. 가슴속으로 작은 호수가 보인다. 이상한 호수다. 이상한 호수에 와 있다는 것을 남자는 깨닫는다. 떠날 수 있을까. 남자는 자신이 없어진다. 졸음이 몰려온다. 감겨드는 눈에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낚시 바늘이 보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작은 포구다. 멀리 배 위에서 누군가 손짓으로 남자를 부르고 있다. 어서 타요. 곧 배가 떠날 겁니다. 어서. 남자가 뛰어가 배 위로 훌쩍 뛰어오른다. 이윽고 배가 포구를 떠난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하얀 포말이 이는 바다가 남자의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다. 남자는 그 망망함에 눈을 감는다. 순간 누군가 몸을 확 잡아채듯 남자의 몸이 뒤로 부웅 떠오른다. 솟구쳐 오른 배가 빠르게 떨어진다. 우욱. 속이 울렁거린다.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그때 잔뜩 몸을 웅크린 남자의 손을 누군가 잡아준다. 시큼한 눈물 속에 바람에 헝클어진 긴 머리칼과 한 쌍의 눈이 있다. 너로구나. 너.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여자다, 이런, 바이킹 타본 적 없어요?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바이킹이라고? 다시 배의 이물이 크게 솟구쳐 오른다. 남자와 여자의 몸이 앞으로 쏜살같이 떠오른다. 배가 허공의 정점에 다다른 순간 남자와 여자의 몸이 배 위로 튀어 오른다. 어느새 배는 아래로 푹 꺼져들고 있다. 손을 꽉 잡은 남조와 여자의 몸이 허공을 날아 차가운 겨울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가라앉아 가는 남자의 눈에 일렁이는 수면이 아른거린다. 점점 시야가 깜깜해진다. 배가 보이지 않는다. 숨이 막혀온다. 귀가 먹먹해진다. 고무공처럼 부풀어오른 폐가 뻥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 같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남자는 눈을 흡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그 때다. 멀리서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는 것들이 떠돌고 있는 게 보인다. 작은 불빛들이 남자에게 다가온다. 작은 물고기들이다. 작은 물고기들이 남자의 곁을 헤엄치고 있다. 물고기의 몸 속에서 투명한 빛이 빛나고 있다. 차가운 빛이 물고기들의 몸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남자의 손을 누군가 톡톡 건드린다. 고개를 돌린 남자의 눈에 여자가 있다. 아니 작은 물고기가 있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뿜어내며 여자가 있다. 아니 물고기가 있다.


*


창 밖으로 싱그러운 소나무 숲과 놀이공원,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자의 말처럼 날이 화창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따뜻한 볕이 남자를 깨운다. 여자의 방은 여전히 고요하다. 소파 위에서 일어난 남자가 한껏 기지개를 켜며 창 밖을 내다본다. 호수 위로 작은 인형들 같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한창 얼음 낚시에 열중인 포즈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썰매를 지치고 있다. 남자의 시선이 아이들의 썰매를 타고 빙판 위를 미끄러지다 한 곳에 툭 걸려 넘어진다.


호수 위에 여자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앉아있다. 호숫가 도로에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을 걸고 서있다. 차 옆으로 한 사내의 푸른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낯이 익다. 어젯밤에 본 청재킷이 틀림없다. 남자는 힐끗 여자의 방을 돌아본다. 여자의 방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여자의 손이 옆에 놓인 함에 들어갔다 위로 들려지기를 반복한다. 손끝에서 하얀 눈보라가 만들어진다. 남자는 바짝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댄다. 여자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하얀 눈보라를 뿜어내고 있다. 여자의 몸 속에서 눈보라가 이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가 얼음 구멍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잘 있어요. 엄마.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깜깜한 호수 속으로 천천히 퍼져간다. 연신 담배를 물고 안절부절못하던 청재킷이 여자를 재촉한다. 여자가 이내 청재킷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기다려."


남자가 황급히 여자를 불러 세운다. 유리창에 하얀 입김이 서린다.


"어제 네가 물었지. 무겁지 않냐고. 사실……그래, 사실, 난 네가 너무 차갑다고 말하려 했어. 그리고 내 허청거리던 발이 왜 너를 업고 나서야 침착해졌는지도. 그런데 뭔가 뜨거운 게 목에 툭 떨어지는 거야. 너무 놀라 말을 잊었어. 나는 그때 내 텅 빈 몸을 생각하고 있었어. 술기운이 아니라 그래서 허청댔던 거라고. 어릴 적 수건돌리기처럼 내 발이 자꾸만 허청댔던 게 실은 내 몸이 텅 비어서라는 걸. 그래, 너를 업고서야 알았어. 너만큼의 무게가 내 몸에 실리니까 이상스레 내 발이 안정되었어. 꼭 한 사람이 스스로의 무게를 인식하고 걸어가는 것처럼……"


남자의 말이 여자의 귓가에 아른거린다. 여자는 남자가 있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당신은 공어였어요. 그럼 난 빙어쯤 됐을까요. 아니, 이제는 당신이 빙어겠죠. 그런데……우리는 호수를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를 만든, 그들의 호수를 떠날 수 있을까요?"


옷깃을 여미며 여자는 청재킷 쪽으로 걸어간다. 차 속에 앉아 여자를 기다리던 청재킷이 문을 열어준다. 여자가 옆에 올라탄다.


남자가 떠나가는 차를 향해 입김을 뿜어낸다. 유리창에 하얀 입김이 서린다. 차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하얀 입김 위에 겨울바다와 배 한 척을 그린다. 반달 같은 배를 그리고, 우뚝 솟은 돛대를 그린다. 남자가 소파에 주저앉는다. 꺼진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낯선 사내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브라운관 속, 아이의 시선이 거실을 한바퀴 돌고 있다. 낯선 집에 홀로 버려진 불안하고 두려운 눈빛이다. 괜찮아, 걱정하지마. 너는 버려진 게 아니야. 금방 다들 돌아오겠지. 남자가 아이를 폭 끌어안으며 다독거린다.


"많이 잡았습니까?"


남자의 물음에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중년의 사내가 싱긋 웃으며 한쪽을 가리킨다. 오목하게 파놓은 얼음구덩이 속에 물고기 수십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다.


"마치 작은 호수 같군요."


"한 번, 해보시겠소?"


털모자가 새빨갛게 얼은 코에서 콧물을 훔치며 파놓은 얼음 구멍 중, 하나를 가리킨다. 좋죠. 견지를 건네 받은 남자가 얼음구멍 앞에 쪼그려 앉는다. 대여섯 개의 바늘을 단 낚시 줄이 외짝얼레에서 풀리며 얼음구멍 속으로 가라앉아 간다.


사진을 찾은 것은 아침이었다. 낯선 집안을 서성거리던 남자는 물기가 마르면 잔뜩 울어버릴 사진이 떠올랐다. 불현듯 사진을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사진을 꺼냈을 때, 남자는 사진 뒤에 또 하나의 사진이 숨겨진 채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맞물린 가로 칸과 세로 칸처럼 두 사진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 붙어있었던지. 인화지의 풀기가 배어 나온 모양이었다.


사진은 불량 스티커처럼 귀퉁이가 앞 사진에 붙은 채로 떨어졌다. 꽤 오래된 흑백사진이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품에는 두 갓난아이가 안겨있었다. '축 돌 기념' 이라는 흰 글씨가 사진 하단에 휘갈겨져 있었다. 74. 2. 10 이라는 숫자가 밑에 쓰여있다. 2월 10일. 남자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생일일 것이다. 바짝 얼은 표정이 정말 볼만했다. 사진사가 눈을 크게 뜨라고 했는지 젊은 남자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했다. 매초롬한 여자는 동그란 눈을 토끼처럼 뜨고 있었다. 남자는 사진을 보다 피식 웃었다. 가족사진 뒤에 또 하나의 가족을 붙여놓고 살았을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 어머니가 지갑을 뒤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는지. 아니, 발각되기를 하루하루 고대하며 헐떡였을지도 몰랐다. 하루하루 부러 불안감에 자신을 옭아매고 살았을지도, 그게 자신의 죄과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한참동안 법석을 떤 뒤에야 남자는 다리미를 찾아냈다.


"반은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래야 다음 겨울에 또 올 수가 있거든요."


잡은 고기의 반을 다시 호수로 돌려보낸 털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떠나고 있다. 만선을 이룬 뱃사람 같다. 멀리 놀이공원의 바이킹이 노을에 불그스레하다. 겨울에 얼어버린, 긴긴 잠을 자던 바이킹과 회전목마들. 그들의 잃어버린 꿈들이 불그스레하게 익어 가는 것 같다. 주말에, 날씨가 오늘처럼 좋으면 놀이공원도 개장을 하려나? 내일은 소풍가기에 딱 좋을 것 같아요. 남자의 빨갛게 얼은 귀에 바람이 소곤거리며 스쳐간다. 남자는 얼음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차갑다. 손등이 저릿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남자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언뜻 물고기의 입질이 토도독 손끝에 느껴진다.


이런 벌써 왔어요? 남자의 얼굴이 수면에 닿을 듯 하다. 물고기가 보인다. 깊고 차가운 심연 속, 투명한 빛을 뿜어내며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다. 짝짓기를 끝내고 산란을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들이 남자의 손끝을 톡톡 건드리며 맴돌고 있다. 요 몸 속으로 겨울이 들락날락하죠. 다시 바람이 스쳐간다. 남자는 얼음으로 된, 텅 빈 물고기처럼 언제고 저 깊은 호수 속에서 흐르고 있을 공어의, 그리고 빙어의 겨울을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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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踰里에서(세계01)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9 00:01

작품명 : 水踰里에서
성 명 : 장만호 
 
<심사평> 유종호-신경림 

시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너무들 비슷비슷하다. 유행처럼 생긴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각종 문학강좌 탓이 아닌가 싶다. 시란 어차피 남과 다른 시각 없이는 쓸 수 없는 것, 이런 시각은 손기술의 훈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감각적으로 세련된 시들이 적지 않으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이번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다.
하지만 최승철('눈 덮힌 돌'목도장이 있는 골목' 등), 이현승('근황'모과'등), 장만호('수유리에서'겨울잠' 등)의 시는 크게 돋보인다. 최승철의 시에는 생활의 음영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목도장이 있는 골목'의 분위도 시를 재미있게 읽히는 데 한몫을 한다. 표현을 공연히 모호하게 하여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버릇은 고쳐야 할 것 같다. 이현승의 시는 남과 비슷하지 않은 시로서 매우 개성적이다. '근황'이 가장 좋았는데 이만큼 유니크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데 수준에 미달하는 시가 여러편이다.
장만호의 시는 우선 읽기에 편하다. 자연스럽고, 그 나름의 리듬도 갖고 있다.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회한이며 안타까움, 그리움이며 깨달음 같은 시적 내용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남의 것이 아니고 진짜 자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든 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점은 매우 값진 것이다. '수유리에서'가 가장 빛나는데,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같은 비유도 시에 생기를 더한다. 밝고 환한 분위기의 '원정'(園丁)은 생명감으로 충일해 있고 완결성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청어'(靑魚)도 그가 시를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자질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균질감 있는 시다. 우리는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준비를 충분히 끝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주저하지 않고 '수유리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작품명 : 水踰里에서 
성 명 : 장만호 
 
이제는 많이 늙으신, 계속 늙어가실 어머니에게 이 기쁨을 드려야겠습니다.
봉문(封門)하고 산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빚어 올린 항아리에 갖혀 지내며 시를 읽는 밤이 있었습니다. 예민해진 귀는 작은 소식에도 멍멍해졌습니다. 간혹 누군가가 그리워지기도 했지만 그 이름 부르지 않았습니다. 상처라는 걸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곱게 키우던 새를 날려 보내며 세상의 조롱 속에서 한껏 자유롭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깨달음도 없이 나는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문도 창도 길도 없는 항아리 속에서 나오기 위해, 굳은 마음을 깨기 위해 나는 그 마음과 같이 넘어져 굴렀습니다. 계속 굴러가 시장에 이를 때까지…….
'큰 현명함은 시장에 숨는다'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작은 현명함도 못되겠지만, 상대를 용인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거래하며, 그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말들을 엮어 꽃을 만들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고 싶습니다.
이 당선의 기쁨이 그런 힘으로 치환되기를 바라며 부디 내 시가 깨달음의 경지로 떨어지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 삶 속에서 기우뚱거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종암동 시절의 식구들, 문창반 선후배님들, 고전기타부의 사람들, 인생의 모든 스승들과 뽑아주신 선생님들, 애정으로 가르쳐 주신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약력
△1970년 전북 무주 출생
△1989년 전주 상산고등학교 졸업
△1997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재학중
 
 
작품명 : 水踰里에서
성 명 :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재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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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세계01)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8 23:59

작품명 : 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
성 명 : 최치언 
 
<심사평> 김윤식-서영은 

예심에서 올라온 10편 중, 관심을 끈 작품은 `사육'(조미라) `지구 뚫기'(황의성) `편지도둑'(나찬경) `잃어버린 방'(김은주) `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최치언) 등 5편이었다.
`사육'은 집착에 대한 강인성이 돋보이나 대화 운용이 너무 평이해 보였으며 `지구 뚫기'는 상투적인 세계인식을 뛰어넘기 위한 발상법이 돋보였으나 설득력이 모자란 점이 지적되었다.
`편지도둑'은 서술의 투명성이 돋보였으며 글쓰기의 기원이 다른 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삶에 대한 미련이 불투명해 보였고, `잃어버린 방'은 열쇠를 둘러싼 상상력이 지닌 소재의 낯익음이 지적되었다.
`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은 줄거리를 의식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서술의 다양성을 확보한 사실이 강점으로 보였다.
`농담'이란 말이 암시하듯 풍부한 입심과 그에 상응하는 상황묘사가 우화성과 풍자성을 동시에 확보한 점이 이 작가의 자질로 평가됐다.
 
 
작품명 : 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
성 명 : 최치언 
공터 한켠에 버려진
그 낡고 오래된 냉장고의 문을 열자
염소가 한 마리 고등어를 입에 물고 있었다
고등어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듯 죄없는 눈물 한 방울

얼음처럼 톡 그녀의 발아래 떨어뜨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염소가 고등어를
입에 물고 고등어가 더운 눈물을 얼음으로 만들기까지는
.
그녀는 염소의 목에 매어진 밧줄을 당겼다
그러나 그녀가 오히려 냉장고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

아주 낯설고 침울한 슬픔이
냉장고 속에 성에처럼 깔리고 문이 닫혔다
어느날 내가
그 버려진 냉장고의 문을 열자
허연 성에를 뒤집어쓴 그녀만 혼자 그곳에 남아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염소가 고등어를 먹고 그녀가 염소를 잡아먹은
그 외롭고 배고픈 시절은.

나를 오늘 이곳에 있게 해준 그 문장, 그녀는 요즘
바람을 피해 냉장고에 숨어 있다.
어서 나와라 내 아름다운 문장아!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서 있는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내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던 스승들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께, 나의 모든 것은 그분들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나는 내 손금의 어느 부분을 걷고 있는
것일까?

<약력>

△1970년 전남 영암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현재 국립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 재학중
 
 
작품명 : 석탄공장이 있는 市에 관한 농담
성 명 : 최치언

최 치 언 광부는 그날 꿈속에서 어떤 알지 못할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빌어먹을! 나 검은 콧구멍은 절대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잠시 그는 자신의 말에 대해 어리둥절하였으나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입 속에서 검은 덩어리가 튀어 나왔으므로 의식의 갈피는 빠르게 그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광부는 방금 자신의 입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왔다는 아주 단순한 사건의 개요를 인식하고는 목구멍에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이 엄습하여 올 것이라는 생각에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광부는 이건 운이 좋았던 경우의 하나라고 생각하고는 이 운이 쉽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 부분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 그것은 어쩜 늦게라도 찾아올 고통을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석탄이었다. 광부는 자신의 몸 속에서 왜 이런 석탄이 튀어 나왔는지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나사가 더 깊게 그의 의식을 조여올수록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던 두 손이 점점 자신의 목을 졸라대는 것을 느꼈다. 광부는 그로 인하여 생각을 그쯤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고 말았는데 그것은 막장에서 너무 많은 석탄가루를 마신 게 문제였다고, 그 석탄 덩어리를 발로 냅다 걷어찼다. 그러나 기적처럼 석탄이 스스로 움직여 굴러가는 그 순간과 검은 콧구멍의 발길질은 타이밍이 정확히 일치했으므로 그는 허공 중에 크게 원을 그으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내심 이 황당하고도 불길한 일에 화가 난 광부는 굴러가는 석탄을 잡으러 뛰어갔다. 석탄이 굴러간 자리엔 붉은 핏물이 하나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순간 광부는 석탄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아주 당연한 발견을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이건 어떠한 불길한 징조의 예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꿈속이라는 또 하나의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이 일을 동료들에게 알려야 할 자신의 막중한 의무를 깨닫고 꿈속에서 미련한 그 자신이 어서 빨리 깨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땀에 절은 작업복처럼 숭고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가슴은 풀무질처럼 부풀어올랐다. 예언은 검은 콧구멍 그에게만 찾아온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그쯤 도살장의 신부도 어떤 꿈인가를 꾸고 있었는데 피 흘리는 석탄은 검은 콧구멍 광부의 꿈속에서 신부의 꿈속으로 굴러 들어갔던 것이었다.
짧은 꿈에서 깬 신부는 나지막이 그러면서도 아주 단호하게, 어제 새로 산 의족으로 갈아 낀 왼다리의 뒤꿈치에 골반뼈 근육과 대퇴부의 민감한 꿈틀거림으로 살짝 힘을 주며 지껄여댔다. '오! 이것은 권능에 대한 빌어먹을 광부들의 도전이다.' 신부는 피 묻은 장갑을 벗고 마치 무슨 대단한 사건의 수사관처럼 이맛살을 눈썹 쪽으로 잠시 당겨 보았다.

소문은 급속도로 마을의 광장을 휘돌아 잠시 우물곁 아낙네들의 치맛자락을 살랑거리게 하였고 우편배달부의 입을 타고 이 마을에서 오직 하나뿐인 약국의 굳게 닫힌 셔터를 새벽에 열게 하고 말았다. 석탄이 피를 흘린다고? 약사 스컹크는 그의 별명대로 길쭉한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채 소화되지 않는 배설물에 박혀 있는 겨자씨 같은 매운 방귀를 뿡뿡 뀌어대었다. 그의 방귀는 확실히 구린다든지 고약스럽지는 않았다. 단지 사방 십여 미터 안을 최루가스처럼 맵게 할 뿐이었다. 약사 스컹크는 소화제 드링크를 민첩하게 그것도 딱 한번의 비틈으로 열어제치고 새벽의 수탉처럼 마셔댔다. 그 소식을 그에게 전달한 우편배달부는 벌써 그와는 꽤 먼 거리인 중앙은행의 돌계단에 앉아 고통스럽게 코를 감싸고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다. 약사 스컹크는 그것에 대하여 미안하다든지 안쓰러운 기색 없이 그에게 크게 소리쳤다. "도살장의 신부는 뭐라고 하던가?" 바로 그때 이 마을에 놀라운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지상에서 줄을 매달아 떠올린 풍선처럼 태양은 마을 입구 종려나무 가지 끝에 걸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광장으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늘어날 때마다 최초의 소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고 각기 다른 소문을 만들어 거짓말 경쟁대회처럼 서로를 속이고 속임을 당하며 은근히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시장은 아직 자신의 타조털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타조의 등을 타고, 그러나 그의 몸무게는 백 삼십 킬로가 넘었으므로 타조는 땅바닥에 배를 대고 기다시피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타조가 더 이상 달리기를 포기할 쯤 시장은, 내가 너를 얼마를 주고 샀는데 고작 이것뿐이냐, 하고 구두코로 인정사정 없이 타조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타조는 검은 석탄 덩어리를 주둥이로 토해냈다. 시장은 덩치에 비해 예민하고 직감이 빨랐으므로 꿈속의 이 황당한 일에 대해 상징적인 암시를 받았다. 피 흘리는 석탄은 시장의 꿈속에도 그렇게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시장은 돌돌 굴러가는 그 석탄 덩어리를 그것보다는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집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장에게 그것은 무리였다. 그가 선 채로 허리를 굽혀 손을 뻗으면 그의 손은 그의 허벅지, 정확히 말하면 무릎 연골 바로 위까지만 닿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의 올챙이 같은 배에 있었다. 때론 지나치게 튀어나온 배가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만 그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는, 특히 허리를 굽히려고 할 땐 방해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장은 예민한 만큼 영리했다. 그는 더 빠른 속도로 뛰어나가 석탄이 굴러오는 쪽으로 훽 방향을 틀고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젠 기다렸다가 보란듯이 잡으면 되었다. 하지만 아주 하찮고 미물인 석탄에게도 생의 의지는 있어 시장의 전방 오십 센티에서 딱 멈춰 버린 것이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간혹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타조의 신음소리만 초원에 한 가닥 바람처럼 울다 사그러졌다. 시장은 아예 울상이 되었다. 빌어먹을 광부자식들! 당장에 광산을 폐지하는 입법을 통과시켜 버려야지, 하고 시장은 자신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판단보류로 있던 안건을 생각해 냈다. 그러자 석탄은 다시 굴러오기 시작했고 비로소 시장은 그것을 냉큼 움켜잡을 수 있었다. 시장은 한동안 손아귀의 그것을 빤히 노려보았는데 갑자기 석탄이 붉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모양으로, 조금 더 이 상태로 있다가는 석탄이 비명을 지를 것 같아 그만 그의 힘이 닿는 한 제일 먼 곳까지 던져 버리고 말았다. '재수 없게 석탄의 피라니.' 시장은 침을 퉤 뱉고 땅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뒤집어진 딱정벌레처럼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몸의 불균형이 문제였으나 그는 또다시 저주를 퍼붓듯 석탄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지껄여댔다. 권위에 도전하는 광부새끼들은 모조리 철창에 집어넣어 버려야 해, 하며 그는 아주 구체적인 광부탄압을 구상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어 앞을 보았을 때 태양은 종려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었고 타조는 아직도 땅바닥에 쓰러져 가끔씩 몸을 뒤채이며 울고 있었다. 시장의 육중한 몸을 등에 태우고 초원을 달린다는 것이 사실상 타조에겐 죽겠다는 각오였던 것이다.

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더 이상 꿈이나 꾸며 타조와 함께 초원에 엎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시장은 그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황급히 여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각료 회의를 준비시켰다.

한편, 검은 콧구멍은 작업장을 돌아다니면서 광부들에게 그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광부들이 자신의 꿈에 그닥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낀 검은 콧구멍은 광야로 내몰린 예언자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신의 가난한 집으로 향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극도로 외로웠고 그의 꿈이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조용히 그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아내는 그의 가슴 춤으로 손을 집어넣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상심에 빠진 그의 남편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가슴에 수북히 난 털을 빗질하듯 훑어 주었다.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검은 콧구멍은 배꼽아래 뜨거운 부근에서 힘차게 부풀어오르는 그것을 아내의 손을 잡아끌어 함께 꼼짝못하도록 오랫동안 잡고 있었다. 순간 느닷없이 그의 집의 문이 벌컥 열리고 일군의 광부들이 찾아왔다. 광부들은 검은 콧구멍 내외의 그 같은 행동을 애써 외면하고는 각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어떤 수습도 하지 못한 검은 콧구멍 내외는 그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 늙은 광부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꿈 이야기를 들었다. 석탄이 피를 흘리는 일은 백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불길한 징조로서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고 그 뒤로 탄광에 대재앙이 몰려왔다." 늙은 광부는 조금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혼자 지껄여댔다. 그러나 다른 광부들은 그 이야기보다 검은 콧구멍 아내의 거대한 젖무덤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늙은 광부는 검은 콧구멍 아내의 젖무덤으로 인하여 자신의 말이 그 어떤 권위를 상실한 것을 느끼곤 검은 콧구멍의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어찌할 틈도 주지 않고 여자의 봉긋한 젖무덤에 자신의 노란 헬멧을 벗어서 덮어주었다. 그 시간적 틈을 비집고 검은 콧구멍이 침대 위에서 일어섰다. "나는 예언을 보았다. 그 예언은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이런 이야기였는데, 순간 동료들은 무너진 막장에 갇힌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어지럽게 쳐다보곤 하였다.

이쯤에서 늙은 광부는 시에서 탄광을 폐지하고 그곳에 대규모 도박장을 차리려고 하는 비열한 음모가 날로 더해지는데, 이젠 그것이 절정에 달했고 검은 콧구멍의 꿈속에 나타난 피 흘리는 석탄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한다고 다시 한번 검은 콧구멍의 말을 정리하여 자신의 오랫동안의 생각인 양 광부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토론은 계속되었다. 검은 콧구멍의 아내는 노란 헬멧을 껴안고 이젠 잠이 들어 버렸다. 결국 검은 콧구멍은 곧 있을 어떤 사태에 대항할 광부의 대표가 되었다.

각료회의 소집 통지서가 각 유지들에게 배달되었다. 각료회의 인원은 기껏해야 도살장의 신부와 약사 스컹크, 각 구역의 어리석은 통장들 그리고 시장이 전부였다. 소집 통지서를 받은 신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열 두 번째 황소의 머리에 도끼를 내려찍고 도살장안을 한번 휙 둘러보았다. 황소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으나 신부는 개의치 않았다. 솟구친 피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잠시 그는 얼굴에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그 순간 이번 사건은 의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근거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도살장의 신부는 검은 사제복으로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느린 속도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도살장을 막 나서자마자 태양이 종려나무가지에 걸려 꿈쩍 않는 것을 보곤 황급히 도살장안으로 되돌아갔다. 혹시 이게 세상 종말의 징후가 아닐까. 그는 도살장안에서 유일하게 햇살이 비껴드는 창문을 향해 무릎을 꿇으려 했으나 새삼스럽게 당황하고 말았다. 왼다리에 의족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무릎 꿇는 행동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도살된 소의 피가 흥건하게 젖어있는 바닥을 잠시 들여다보다 그는 선 채로 비껴 낀 햇살을 바라보곤 이렇게 외쳤다. "부디 신이시여 저에게 주어진 이 잔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의 기도소리는 사지가 도륙난 소들의 아직 식지 않은 더운 살 깊이 박혀드는 듯 했다. 그러나 죽은 소들은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한 느낌에 신부는 어떤 공포감을 이물스럽게 이빨로 씹는 듯해서 도살장의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누런 가래가 낀 침은 소들의 붉은 피에 섞여 잠시 흐르다가 멈추었다.
그 즈음 약사 스컹크도 각료회의에 나가기 위해 소화제를 위장 깊숙이 털어 넣고 있었다. 오래된 소화불량이란 소화제를 수시로 복용하고 위장에서 잘 섞이도록 몸을 좌우로 흔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기다렸다는 듯이 방귀가 항문에서 대포를 쏘듯 터져 나오는 것이다. 사실 약사 스컹크는 이 방귀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약사 스컹크의 무례한 방귀에 시청으로 탄원서도 내보고 직접 찾아가 조리 있게 시장에게 말을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시장은 그들에게 한 여름인데도 매번 더운 차를 내어주곤 서류철만을 곤혹스럽게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생리작용이기 때문에 시의 법으로는 불가항력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장은 조금 더 참아보자는 제안을 했고, 더운 차는 이제 적당히 식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차를 후룩 마시곤 황송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시청 정문을 빠져 나올 때쯤에야 비로소 서로의 심란한 눈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눈길들이 서로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좀더 현명한 시장을 다음 번엔 꼭 뽑아야겠다는 것이었지만, 시장은 삼십 년째 이 시에서 재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사 스컹크는 새 약사가운을 장롱에서 꺼내 들고 혼자 되뇌어 보았다. '석탄의 피? 피 흘리는 석탄이라니. 석탄이 소화불량에 걸린 것도 아니고 변비가 심각해 묵은 된똥을 누다가 항문이 파열된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석탄이 피를 흘린단 말인가.' 그리고 약사 스컹크는 창문을 열고 저 멀리 광장에 응집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새까만 머리통을 한번에 툭 돌려 틀고 벌컥벌컥 그들의 더운 피를 들이마시는 생각에 빠져 버렸다. 무엇인가 설명될 수 없는 악마적인 힘이 그의 정강이 뼈 부근에서 목젖 부근으로 힘차게 밀려 올라왔다. 약사 스컹크는 마지막으로 아랫도리를 벗고 항문에 그 약국에서 제일 크다는 파스를 붙였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엉덩이에 전해질쯤 약사 스컹크는 약국의 셔터를 내리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파스가 제 구실을 다한다면 시장 앞에서 방귀는 새어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 찔러둔 발포성 소화제를 만져 보았다. 모든 것이 든든했다. 약사 스컹크는 그때 골목길에서 나오는 도살장의 신부를 보았다. 그 둘은 아주 가볍게 꽃잎처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함께 걷지는 않았다. 신부는 약사 스컹크보다 정확히 십 미터는 더 앞질러가고 있었다. 약사 스컹크도 그 거리를 의식적으로 유지해 주었다. 은밀한 묵계 그것만이 약국과 교회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조합광장에 놓인 연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검은 콧구멍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곤 힘차게 연단위로 뛰어 올랐다. 연단이 순간 심하게 흔들렸으나 검은 콧구멍은 그의 민첩한 동작으로 연단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그러자 그 아래 광부들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광부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복장과 얼굴이었다. 석탄으로 검게 찌든 얼굴에 해지고 낡아빠진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자 위에 일률적으로 붙어 있는 전등은 마치 분노에 들끓는 그들의 또 다른 눈 같았다. 검은 콧구멍은 그 눈만을 쳐다보며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 검은 콧구멍은 피 흘리는 석탄을 보았다. 그것은 이 탄광촌에 불어닥칠 대재앙을 예언한다. 시의 간사한 모리배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광부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갈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곳을 가진 자들의 방탕한 여가를 위한 한갓 도박장으로 만들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뭉치지 않으면 우린 죽는다." 검은 콧구멍은 자신 속에서 어떻게 이런 우렁차고 당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순간 의아해 했지만, 이내 자신의 말에 자신이 감동하여 생목이 메이는 관계로 그의 다음 말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광부들은 함성을 질렀다. "우리에게 무기를 줘라. 우리의 손에 그들의 피를 묻히자." 광부 중 유달리 다혈질적인 젊은이들이 연단 아래로 몰려와 손을 높이 쳐들고 외쳐대었다. 늙은 광부는 연단 아래 의자에 앉아 감격에 겨운 듯 그러나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고 힘들여 절도 있게 박수를 쳐대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더욱 광적으로 자신이 뱉아 낸 말들의 홍수에 잠겨갔다. 검은 콧구멍은 환호하는 광부들과 일일이 뜨거운 악수를 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혼자 나즈막이 내깔겨 보았다. 바로 그때 한 광부가 그에게 다가와선 다급한 목소리로 그러나 그의 귀에만 들릴 수 있도록 속삭이며 말했다. "시에서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합니다. 그것은 피 흘리는 석탄에 관한 안건인데, 어떻게 피 흘리는 석탄의 예언이 그들에게 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태는 심각한 상태로 흘러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양을 한번 바라봐 주십시오." 정말 태양은 제 1갱도 부근에 멈춰 있었다. 갱도는 검은 콧구멍이 바라보는 쪽에서 어른 키 한 뼘 정도의 높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대표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 광부는 황송한 듯 그렇게 말하곤 검은 콧구멍의 유별나게 검은 콧구멍의 테를 쳐다보았다. 검은 콧구멍은 다시 연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휘청 그가 넘어졌으나 그 아래 일군의 젊은 광부들이 그를 받아 연단위로 밀어 올렸다. 검은 콧구멍은 그의 실수가 광부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저기 제 1갱도를 보아주십시오. 태양이 저곳에서 멈춰 버렸습니다." 그때까지 그 놀라운 일을 발견하지 못했던 광부들은 서로 먼저 멈춰버린 태양을 보려고 아우성을 치며 격렬하게 옆 사람의 몸을 밀치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검은 콧구멍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핏대를 세우며 외쳐댔다 "제 1갱도는 오래 전 우리 선조 광부들께서 맨손으로 개척한 갱도입니다. 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이 우릴 부릅니다. 자 모두다 시청으로 갑시다. 그곳을 접수합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부들의 동요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일순 조용해졌다. 검은 콧구멍은 광부들의 돌연한 변화에 일격을 맞은 듯 또 한번 연단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몸의 중심을 가까스로 잡으며 바라본 늙은 광부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젠 늙은 광부의 동조가 필요한 것이다. 잠시 동안 늙은 광부와 검은 콧구멍의 무언의 토론이 벌어졌다. '그건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 '아니오 지금 칼을 빼들지 못하면 우리가 베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 모든 결과는 누가 책임지나?' '나 검은 콧구멍이 합니다.' 광부들은 숨을 죽이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늙은 광부가 졌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검은 콧구멍을 따라 시청을 접수하러 갑시다." 시청의 각료회의는 오후 두 시에 시작되었다. 각 구역에서 불려나온 어리석은 통장들은 의자에 앉자마자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시장이 여비서를 대동하고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비서는 언제 그렇게 많이 준비했는지 가슴에 안은 서류더미에 묻혀 가끔씩 발을 헛디뎠다. 그때마다 여비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질렀는데 졸고 있던 각 구역의 통장들은 감고 있는 눈을 더 꾹 감으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장은 도살장의 신부와 약사 스컹크에게 악수를 청했다.

시장의 팔은 몸에 짧게 붙어있는 꼴이라서, 신부와 약사 스컹크는 시장에게 바싹 다가가 바로 그의 주둥이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악수를 해야 했다. 시장의 입에서 막 잠에서 깬 사람 특유의 신 사과즙 냄새가 났다. 약사 스컹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주머니에서 발포성 소화제를 꺼내 시장에게 복용하도록 권했다. 시장은 약사 스컹크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황급히 약을 받곤 뒤로 물러섰다. 약사 스컹크는 잠시 뼈저린 외로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한편, 검은 콧구멍이 집회의 열기에 들떠 그의 가난한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내는 커다란 솥 가득 목욕물을 데우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어지러운 생각인양 집안 가득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콧구멍은 아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시청으로 출전하기 전 마지막으로 집에 들린 것이었다. 아내는 검은 콧구멍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의 무거운 구둣발 소리로 알 수 있었으나 모르는 척 그대로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어서 빨리 검은 콧구멍이 자신에게 다가와 어떠한 행동을 해주길 바랬다. 그녀의 몸은 젖어 있었다. 검은 콧구멍은 아내의 수세미 같은 머릿결을 한 손으로 어렵게 쓸어 올리고 또 한 손은 아내의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제꼈다.

아내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가 서서히 끓는 물처럼 풀어지자 검은 콧구멍은 아내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쪽으로 거칠게 돌려세우고 길게 입 맞춰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누렇고 기다란 혓바닥으로 아내의 뺨을 위에서 아래로 몇 번인가를 핥아 주었다. 아내도 몇 번인가를 흠칫 몸을 떨었다. 뿌옇게 피어오른 수증기 속에서 알몸의 검은 콧구멍 내외는 끓는 물보다 더 뜨겁게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끓어올랐다. 어쩜 일이 잘못된다면, 이것이 마지막 아내와의 잠자리 될 거란 생각이 들자 검은 콧구멍은 지금까지 생각으로만 망설였던 여러 가지 체위를 바닥에 누운 아내의 몸 위에서 시도해 보았다.

그 스스로도 조금은 어색하고 아내도 그의 돌연한 변화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지 않게 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 어색함을 이겨내었다. 끓던 물도 식고 수증기가 바닥으로 갈아 앉자 검은 콧구멍의 아내가 말했다. "이젠 당신은 탄광촌의 영웅이 됐어요 이웃집 처녀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제와는 달라졌는걸요. 당신이 또 다시 나 아닌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면 그땐……." 여자는 검은 콧구멍의 축 늘어진 성기를 한 손으로 잡고 세게 잡아 당겼다. 검은 콧구멍의 입 속에서 쇳조각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콧구멍은 고통을 참아내려고 본능적으로 그의 아내의 엉덩짝을 세게 움켜잡았다. 아내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먼저 손에 힘을 빼지 않았으므로 고통은 집안의 정적 속에서 길게 이어졌다. 이내 검은 콧구멍이 체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땐 당신이 저 곡괭이로 나를 죽이시오" 검은 콧구멍이 손으로 가리킨 현관문 앞엔 배의 닻처럼 생긴 곡괭이자루가 모로 세워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손에서 검은 콧구멍의 성기를 풀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콧구멍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그들은 또 다시 격렬하게 요동치며 서로의 몸 속으로 탐닉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찬장 위의 접시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고 냄비와 국그릇들이 덩달아 요동쳤다.

어리석은 통장들은 이젠 아예 시청 회의실 탁자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졸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씩 잠꼬대를 해댔는데 대부분 어젯밤에 심하게 퍼부어 댔던 술자리의 자잘한 시비 한 토막을 거리낌없이 지껄여댔다. 여비서는 서류철 속에서 피 흘리는 석탄에 관한 보고서를 찾느라고 한동안 회의 탁자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서류가 이게 아닌데 하는 최종적인 판단에 그만 울고 말았다. 시장은 기가 막혔으나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이를 악물고 회의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도살장의 신부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에 대하여 물어 볼 참이었으나 신부는 경건하게 눈을 꼭 감고 있었으므로 약사 스컹크에게 앞으로 벌어질 마을 사람의 소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약사 스컹크는 그런 일쯤이야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자신이 광장으로 나가 항문에 붙여놓은 파스를 떼곤 방귀를 한 두 번 뀌면 그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해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그러나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시장은 한시름을 던 듯한 기분에 한 귀퉁이에서 울고 있는 여비서를 용서할 아량으로 차를 준비해 올 것을 명령했다. 여비서는 고양이처럼 샐쭉해져 대답없이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문을 닫지 않고 나갔으므로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지껄여댐이 들렸다. 시장은 순간 그 소리를 듣고 놓았던 한 시름을 다시 마음에 올려놓았다.
"나는 광부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거외다." 시장은 이번 기회에 광부들을 이 마을에서 내쫓아내고 싶었다. 탄광은 몇 해째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큰 골치거리였다. 차라리 이웃 시에서 석탄을 수입하는 것이 훨씬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시장은 탄광을 폐지하고 그곳에 대규모 자본을 다른 시에서 끌어와 지상최대의 도박장을 만들면 관광 수입과 기타 여러 부대시설 사용료에서 얻을 수 있는 순 이익이 석탄산업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장은 각료회의 때마다 여러번 탄광폐지를 주장했다. 시장은 그런 말들을 또 혼자 지껄여댔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낚아채갈까봐 시장은 얼른 자신도 오늘 피 흘리는 석탄을 꿈속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혹 누군가 고급 타조털 침대를 빌미삼아 자신의 도덕성을 공격한다면 회의는 자신에 대한 탄핵으로 흐를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장은 자신의 몸통보다 두 배나 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느긋이 기대곤 도살장의 신부를 내려 까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도살장의 신부는 내심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시장 당신이 본 건 번개탄 쯤 되겠지 하는 약간의 조롱이 섞여 있었다. 감히 신의 대리인인 나와 동격으로 놀려고 하다니, 생각 같아서는 한껏 비웃어주고 싶었으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적당히 제어하며 회의실 창문 아랫단에 살짝 비껴든 햇살을 쳐다보곤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피 흘리는 석탄이 문제가 아니라 멈춰버린 태양이 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필시 신이 굉장히 노여워하는 일을 누군가 저질렀기 때문인데 우리 모두 그 문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는 자세로 회의를 진행해야 합니다." 도살장의 신부는 소의 정수리에 도끼를 내려치듯 탁자를 힘차게 내려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위협적이었든지 졸고 있던 어리석은 통장들이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순간 시장은 도살장 신부의 단호한 의지에 감복하여 자신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치고 말았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이 회의는 종교적 문제로 흘러가는 듯하게 되었다. 분위기가 도살장의 신부 쪽으로 넘어가자 약사 스컹크는 재빨리 빌어먹을 광부들을 더 이 마을에 거주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그때마다 발포성 소화제를 꺼내 마셨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시장은 단호하게 일어서서 종합하여 말했다. "문제는 광부들이 이 마을을 적자의 수렁으로 몰아 간다는 것이외다. 이런 연유로 신께서 피 흘리는 석탄과 멈춰버린 태양을 어떤 상징적 암시로 본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만만치 않은 힘의 대립을 파악한 도살장의 신부는 더 이상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광부들이 땅속에서 석탄을 캐내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태양은 더 이상 우리들의 머리꼭대기에 그 온화한 빛을 내리쏟지 않을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도박장을 세운다는 계획에 자기는 적극 찬동하며 그렇게 된다면 부대시설로 들어서는 음식점에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자기는 더 열심히 소를 도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무 노골적인 자신의 음흉한 속셈이 혹 들통 난 것은 아닐까하고 흘낏 통장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리석은 통장들은 그저 박수만 쳐대었고, 약사 스컹크는 도박장이 세워질 경우 자신에게 떨어질 이익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셈하고 있었다. 그때 여비서가 더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여비서가 들어오는 동시에 어리석은 통장들은 다시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여비서의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그들은 더 깊이 보다 빠르게 음탕한 꿈에 잠겨갔다. 도살장의 신부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읊조렸다. "오늘부터 낡은 도끼는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도끼를 사두어야겠어. 이건 신이 나에게 준 최대의 기회다." 시장은 그런 그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꿈속에서 본 타조를 생각해보았다. 다음 번엔 낙타를 타고 초원을 달려보아야지 하면서 여비서가 가져온 차를 아무런 생각 없이 단번에 마셔버리곤 잠시동안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다가 타조를 얼마에 주고 산 건데 이 따위 밖에 되지 못하지 하고 말한 자신의 꿈속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리곤 황급히 주둥이를 딱 벌리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회의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증오에 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내가 시장을 사퇴하던지 저년을 당장 갈아버리든지 할테다." 여비서는 도살장의 신부에게 곧 있어 광부의 대표가 도착할 것이라고 속삭여 주었으나 도살장의 신부는 도박장이 들어서면 하루에 몇 마리의 소를 더 도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헛말을 하고 말았다.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지 뭐." 여비서는 그 말을 종교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그 옛날 마녀 화형식을 생각해내곤 자칫 음탕하게 보일 수 있는 자신의 짧은 스커트를 황급히 무릎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짧은치마는 볼록한 엉덩이춤에 걸려 내려오지 않고 주름만 팽팽하게 펴질 뿐이었다.

그때 구겨진 주름들처럼 검은 콧구멍과 그의 광부들이 시의 중앙은행을 지나 시청 앞 광장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검은 콧구멍은 광부들의 대오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시민들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며 그러나 군중들을 그들의 편으로 선동 할 수 있는 구호를 외치며 물결처럼 유장하게 시청으로 방향을 틀었다. 광부들이 대오를 이루며 지나가자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시민들은 열렬하게 박수를 쳐주었다. 어떤 여자들은 검은 콧구멍에게 지금 막 자신이 애인에게 받은 꽃다발을 안겨주고 수줍게 다시 애인의 품으로 뛰어가곤 하였다. 검은 콧구멍은 자신의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는 힘에 휩싸여 꽃을 안겨주는 여자들의 엉덩이를 만질까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검은 콧구멍은 한때 자신도 어떻게 해보지 못할 만큼 여색을 탐하곤 했었다. 그 버릇이 다시 이 중요한 순간에 나온다면? 검은 콧구멍은 그런 일에 대해선 생각하기도 싫어졌다. 그러한 자신의 의지의 확인으로 여자들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군중들에게 던져 주곤 하였다.

그때마다 군중들의 환호소리가 시의 마을 전체를 높이 들었다 내려놓곤 했다. 군중들 틈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 본 검은 콧구멍의 아내는 남편을 향한 질투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몇 명의 경찰관과 수위들은 쉽게 진압되었다. 시의 오랜 동안의 평화로 인하여 그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진압해야하는지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기껏 아는 것은 시위대를 보고 큰 소리로 위협하는 것 정도였다. "당신들은 시의 위대한 법을 어기고 있다." 그 말뿐이었다. 그들은 사실 시의 법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윽고 광장은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그때 검은 콧구멍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빌어먹을 나 검은 콧구멍은 절대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검은 콧구멍은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하지 않았다. 검은 콧구멍은 왼쪽 팔에 완장을 둘러맸는데 거기엔 광부대표라고 써 있었다. 그리고 노란 헬멧을 눌러쓰고 곡괭이 자루를 어깨에 둘러멘 막장의 작업복 차림으로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때기에 기름이 낀 저 시청 안 모리배 놈들의 기를 옴팍 죽이고자 한 것이다. 시청은 사실상 이미 광부들에 의해 접수된 상태였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시청 안의 시장과 여비서와 도살장의 신부와 약사 스컹크 그리고 어리석은 통장들뿐이었다. 검은 콧구멍은 이쯤에서 자신이 영웅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적의 소굴에 홀연 단신으로 들어가 결판을 짓는 행동을 광부와 군중들 앞에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늙은 광부에게 자신이 먼저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보고 그 다음에 사태의 추이를 봐서 광부들을 투입해줄 것을 부탁했다. 늙은 광부는 이쯤에서 자신도 뭔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그곳에 함께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외로 검은 콧구멍은 단호하게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곤 시청 안으로 혼자 쏜살같이 들어가 버렸다. 늙은 광부는 무엇인가 검은 콧구멍에게 빼앗긴 것 같아 잠시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탄광에서 심심찮게 휘두르던 권력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늙은 광부는 힘없이 광부들 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도살장의 신부는 그날 있었던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졸음과 그것보다 더 짧은 꿈속에서 그가 보았던 피 흘리는 석탄에 대한 어떤 상징성을, 마을의 탄광을 폐지하는 쪽으로 끌고 가보려고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탄광폐지의 신학적 명분 그것이 그에겐 필요했다. 여섯 마리 째 소의 뿔과 뿔 사이에 도끼를 내리치려는 순간, 손에 들었던 도끼의 무게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고운 모래가 머릿속에 들이부어 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선 채로 졸았던 그 선잠에서, 순간 기적처럼 나타났던 시꺼멓고 동그란 그것은 분명 석탄이었는데 그것은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가 검은 석탄 위에 붉게 퍼질 때 졸음에서 깨어났고 도끼는 소의 정수리를 쪼개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태양이 멈춰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의 과정을 다시 밟아 내려오자 신부는 불현듯 도살된 소의 마지막 울음처럼 외쳤다. "오! 이것은 권능에 대한 빌어먹을 광부들의 도전이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몸을 돌렸을 때 여비서는 그 앞에서 자신의 짧은 치맛단을 끌어내리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검은 콧구멍이 회의실 문 앞에 나타났다. 회의장 안은 깊은 막장처럼 조용했다. 한쪽 어깨에 곡괭이를 을러메고 노란 헬멧을 쓴 검은 콧구멍은 왼쪽 팔에 비딱하게 흘러내린 광부대표 완장을 바로 잡았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모습은 광부의 대표였다. 검은 콧구멍은 자신의 움츠려드는 마음을 자신에게 속이려고 연신 쌍욕을 지껄여 댔는데, 그것은 광부들이 석탄을 캐면서 지껄이는 오래된 욕설이었다. '이런 깊은 곳에 숨어 있을 바엔 검지나 말지 빌어먹을 새끼들.' 뭐 이런 말이었는데 문 앞에서 그는 이 말을 두 번인가 하곤 이내 회의장의 정적에 다시 기가 죽어 버렸다. 그러나 검은 콧구멍은 순식간에 막장을 빠져 나온 사람처럼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것으로 그는 다시 쭈그러진 자신의 기를 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위안을 주며 말했다.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뭐요?" 여비서는 검은 콧구멍 광부의 불량한 말투와 말할 때마다 희게 빛나는 이빨을 보곤 가슴속 욕망에 불이 확 달아 붙는 것을 느꼈다. 검은 콧구멍도 자신을 향한 여비서의 은밀하고 수상쩍은 눈빛을 읽어냈으나 애써 냉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검은 콧구멍은 잠시 흔들렸다. 예전의 버릇이 욕망의 불길을 피해 도망가려는 그의 두발을 꼼짝없이 붙잡고 있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도살장의 신부는 광부에게, 더 이상 이 마을에서 석탄 채굴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검은 콧구멍은 도살장의 신부 따위의 말은 성가시다는 듯 자신의 모자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순간 도살장 신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광부에게 위협을 느낀 왼다리의 의족이 차갑게 굳어감을 느꼈다. 그러나 광부는 의외로 부드럽게 어깨에 둘러메고 온 곡괭이를 신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도살장의 신부의 몸은 광부의 돌연한 부드러움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으나 신부 그 자신은 심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를 더 난처하게 하는 것은 곡괭이 자루였다. 도살장의 신부는 나름대로 도끼에는 이력이 나 있었지만 곡괭이 자루는 처음인지라 그것을 어떻게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콧구멍의 광부는 그러한 도살장의 신부의 마음을 읽었는지 곡괭이 자루를 그의 오른손에 바로 쥐어주고 왼손을 오른손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신부의 오른쪽 어깨 빗장뼈 위로 들어 올렸다. 광부는 이제 자신이 내팽개친 모자를 주워들어 신부의 머리 위에 왕관처럼 경건하게 씌어주었다. 도살장의 신부는 이 급변한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하려 이렇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광부 녀석 신의 권능에 도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그러나 검은 콧구멍은 도살장 신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권능은 저 밖에 모여있는 광부들이 주었다. 그럼 너희 신의 권능은 누가 주었는가?" 검은 콧구멍도 자신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으나 하여간 무척 근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무식한 광부놈에게 예상치 않은 일격을 받은 도살장 신부는 아득히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은 정신적 공황으로 크게 벌어졌다. '정말 신의 권능은 누가 주었단 말인가?' 그러나 검은 콧구멍은 끓어오르는 색욕을 자신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신부를 내버려 둔 채 여비서의 음탕한 치맛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청 안 광장엔 군중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시장은 화장실에서 뜨거운 차에 데인 입안을 찬물로 헹구고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바라보다 그들의 검은 머리통에 기름을 붓고 불을 확 싸질러 버리면 멋있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데인 그의 입안이 다시 후끈거려왔다. 그가 바닥에 침을 한번 퉤 뱉고 거울을 들여다 본 순간 그의 머리통 뒤로 싸늘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는 듯하여 다시 돌아 본 창문밖에는 불길한 예상대로 광부들이 곡괭이 자루를 높이 치켜들고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올 것이 이렇게 빨리 오다니. 시장은 빨리 무슨 대책인가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책이 세워지면 그 대책이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늦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서 회의장으로 뛰어갔다.

시장이 회의실로 뛰어들어갔을 때 검은 콧구멍의 광부는 여비서의 치맛단을 엉덩이 위로 쓸어 올리고 있었고 도살장의 신부는 곡괭이 자루를 둘러멘 채 허공에 대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를 외치며 광부에 대한 분노로 울부짖고 있었다. 어리석은 통장들은 이젠 아예 서로서로 몸을 포개고 보란 듯이 탁자 밑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잠에서 깨면 그들은 다시 바뀐 정책과 인물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잠은 하급 관료들의 정치적 생존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시장은 예민하고 직감이 빨랐으므로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볼록한 배에 두 손을 가지런히 얹고 권위있게 검은 콧구멍 광부를 보며 말했다. "더 이상 광부들은 이 시에 거주할 수 없소. 그것이 이번 회의의 결론이외다." 검은 콧구멍은 그제서야 그 자신이 광부들의 대표로 이곳에 온 것을 생각해 내곤 여비서를 잠시 뒤로 물리치며 시장에게 말했다. "이유는 뭐요?" "신부와 내가 꿈속에서 신의 예언으로 본 피 흘리는 석탄과 무엇보다 저 멈춰버린 태양 때문이오." 검은 콧구멍은 시장이 자신의 꿈을 역으로 이용하여 비열한 공작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멈춰 버린 태양이 우리 광부들과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검은 콧구멍은 분노에 싸여 어금니를 몇 번 갈아대곤 곧 이렇게 맞받아 쳤다. "그렇담, 우리도 더 이상 시장 당신을 인정 할 수 없소. 그건 내가 꿈속에서 본 그 피 흘리는 석탄의 예언 때문이오. 그리고 저 멈춰버린 태양도 그 이유로 넣어둡시다." 시장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촌의 일개 무식한 광부가 어떻게 자신의 꿈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을 했는지 시장은 기가 찼다. 시장은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시장에겐 시민들이 부여한 법의 권능이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당신들의 이번 집단 행동은 시에 대한 도전이며 반역이외다. 그 책임은 누군가 목숨의 대가로 져야 할 것이외다." 시장은 자기가 생각해도 한 시의 지도자로써 모자람이 없는 의연한 말투와 행동이었으므로 다음 선거에 지금의 이 상황을 각색하여 선거용으로 써 먹는다면 당선은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검은 콧구멍은 시장에게서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듣자 순간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자 여비서가 혼자 달아오른 몸을 비비꼬고 있었다. 검은 콧구멍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비서의 블라우스를 거칠게 열어 젖혔다. 그 바람에 여비서의 갤갤 풀린 눈동자 같은 단추들이 사방으로 뜯어져 나갔다. 검은 콧구멍은 여비서의 젖무덤을 한 입 깨물고는 그녀의 허리를 힘차게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안았다. 여비서의 단말마 같은 더운 신음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약사 스컹크는 이 모든 사태를 조심히 관망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복잡한 무엇인가를 계산하듯 빠르게 흔들렸다.

늙은 광부는 시청 안으로 들어 간 검은 콧구멍이 약속된 시간 내에 나오지 않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가 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조금 전부터 광부들은 검은 콧구멍이 나오지 않자 조금씩 대열이 흔들리고 있었다. 늙은 광부가 대오의 앞으로 다시 나가려 하자 광부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그것으로 늙은 광부는 자신의 권위를 되찾은 거였다. 그의 마음은 빨리 광부들 앞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그의 걸음은 한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나아갔다. 마치 사열을 받는 지도자와 같은 심정으로 늙은 광부는 대오 앞에 섰다. 늙은 광부는 동요하는 광부들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이렇게 말했다 "검은 콧구멍은 실패한 것 같다. 이제 내가 저곳으로 들어 갈 것이다" 광부들의 환호성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덩달아 시민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 재미있는 사건이 이대로 맥없이 끝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잠시 잠깐 그들을 엄습했으나 다시 광부들이 대오를 정비하여 사건을 더 길게 만들어갈 것이라는, 이를테면 좀 더 재미있는 구경이 남아있다는 구경꾼들만이 가지는 안도의 환호성이었다. 늙은 광부는 미리 준비해둔 완장을 팔에 둘렀다. 거기엔 광부의 지도자라고 써져 있었다. 그러나 어떤 광부도 그것에 토를 달지 않았다. 늙은 광부가 군중을 뒤로 한 채 시청을 잠시 바라보다 긴 호흡을 들이마시며 한 걸음 떼려 할 때 누군가 쏜살같이 시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누군가는 검은 콧구멍의 아내였던 것이다. 광부들과 시민들은 검은 콧구멍의 아내의 용기에 환호성을 질렀다. 늙은 광부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검은 콧구멍의 아내가 시청 안 회의실로 뛰어 들어가 처음 본 것은 당연히 그의 남편 검은 콧구멍이 여비서의 젖통을 깨물고 있는 광경이었다. 검은 콧구멍의 아내의 눈동자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체념과 함께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자기 확신으로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검은 콧구멍의 아내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았으므로 곡괭이를 든 채 울부짖고 있는 도살장의 신부에게로 가서 그 곡괭이 자루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신부는 여자가 자신을 해치려는 줄 알고 곡괭이 자루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당연히 둘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말고기 같은 자식, 내 손으로 기필코 죽일 테다." 여자의 욕설에 신부는 더 필사적으로 곡괭이 자루를 부여잡았다. 욕설이 오가고 여자는 신부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도살장 신부는 여자의 복부를 의족으로 서너 차례 힘껏 내질렀다. 그러나 여자는 끄덕하지 않았다. 그의 의족 어디쯤인가의 나사가 풀렸는지 의족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의족이 무릎을 꿇자 그의 성한 다리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검은 콧구멍의 아내가 그 밑에 깔리는 형국이 되었다. 시장은 이 급작스런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알 수가 없어 그때까지 자신의 생각에 잠겨있는 약사 스컹크를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약사 스컹크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바지를 벗고 팬티를 내려깠다. 그리고 항문에 붙여 놓았던 파스를 떼어 내려 하였다. 그러나 파스는 의외로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사태를 관망한 약사 스컹크의 또 다른 계략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시장은 약사 스컹크를 다그쳤고 약사 스컹크는 시장을 향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광부들을 탄광촌에서 몰아내고 그곳에 도박장을 세우면 그곳의 지분을 자신에게도 3할 정도 배정해 줄 것을 제안했다. 시장은 약사 스컹크의 그 겁없는 제안에 놀라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어떻게 그런 낯뜨거운 말을 사람들 앞에서 쉽게 할 수가 있는가 하는데서 오는 놀라움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검은 콧구멍은 불현듯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무릎을 바닥에 꿇고 곡괭이 자루로 그의 아내를 내리누르고 있는 도살장의 신부였다. 검은 콧구멍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가 도살장 신부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그만 반쯤 벗겨진 자신의 바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욕망의 늪에서 제 정신으로 빠져 나온 여비서도 이 모든 사태가 자신으로 인하여 벌어진 줄 알고 시청 앞 광장이 보이는 창문 쪽으로 뛰어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사실 그 비명은 광장에 모인 험악한 광부들을 보고 지른 것이었는데, 실의에 빠진 늙은 광부에게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웃옷이 찢어지고 흰 젖통이 드러난 여자가 회의실 창문에 기대어 광장의 그들에게 간절하게 구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늙은 광부는 자신의 감정을 능청스럽게 사람들 앞에서 속일 심리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곧 바로 신랄하게 검은 콧구멍을 비방했다. "검은 콧구멍이 여색을 탐한다는 것은 우리 탄광촌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의 예언을 믿고 그를 대표로 시청 안에 보낸 건 그에게 동료적 입장에서 기회를 한번 주자는 것이었는데 그는 저곳에서도 기어이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여자를 범했다. 그가 우리들의 신의를 더럽혔다. 이젠 정말 내가 저곳에 들어가야 할 때다." 그의 말은 이번 사태 이전부터 하루에 꼭 한번씩 준비하고 외워두었던 것처럼 일사천리로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 말과 동시에 늙은 광부는 시청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어갔다. 이젠 그 누구도 늙은 광부를 어이없게 만들지 않았다.

시장은 선택을 해야 했다. 스컹크에게 3할을 약속하고 이 사태를 진압하느냐 아니면 이대로 될 대로 되는 운명에 맡길 것인가. 교활한 약사 스컹크는 모든 정치적 거래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시장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조금은 불안했다. '도대체 시장은 그깟 3할 정도의 지분을 왜 아끼는 것일까?' 그러나 시장의 머릿속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주판알들이 하나 빼고 하나 더해지고 있었다. 도살장의 신부에게 이전에 미리 2할을 약속했었는데 약사 스컹크에게 3할을 주면 나머지는 5할. 또 통장들에게 각각 몇 할의 지분이 돌아가고 그럼 자신에게 남는 것은 몇 할이란 말인가? 그럼 도살장의 신부의 지분을 더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시장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손바닥에 땀이 배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손을 자신의 볼록 튀어나온 배에 쓰윽 문질렀다. 그 행동은 마치 모든 것은 이미 내 속에 결정되어 있다는 자만심의 의기양양한 표현방법으로 보였다. 초조히 그 행동을 지켜보던 도살장의 신부는 어떻게든 시장의 말을 막기 위하여 일어서려고 하였으나 검은 콧구멍의 아내는 신부를 붙들고 놓칠 않았다. 시장이 다시 한번 두 손바닥을 배에 쓱 문지르고 약사 스컹크의 제안을 승낙할 자세를 보이자 도살장의 신부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다시 한번 일어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검은 콧구멍의 아내가 도살장 신부의 머리채를 붙들고 끝까지 놓아주질 않자 다급한 그는 곡괭이를 그녀의 머리위로 높이 치켜들곤 위협적으로 두 눈을 부라려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신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랜 직업적 관성이 시키는 대로, 치켜 든 곡괭이를 정확하게 여자의 정수리에 찍어 놓았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여자는 도끼를 얻어맞은 황소처럼 가늘게 신음을 토하곤 몇 번 피식 피식 머리통에서 붉은 피를 뿜어대더니 맥없이 사지를 뻗어 버렸다. 순간 그것을 지켜 본 약사 스컹크도 시장도 바람에 떠밀린 듯 경악하며 도살장 신부의 주변에서 두 세 발짝씩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시장은 내심 이런 사태를 노렸다는 듯 약사 스컹크에게 그것만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말에 어이가 없는 건 약사 스컹크가 아니라 도살장의 신부였다. 도살장의 신부는 자신이 시장의 얄팍한 술수에 말려들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약사 스컹크는 시장의 더러운 물욕에 속이 뒤틀릴 만큼 화가 났다. "그럼 시장 혼자 다 먹겠다는 것인가?" 약사 스컹크는 자신의 엉덩이에 붙은 파스를 떼어내어 시장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곤 얼른 파스를 떼어 내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믿었던 방귀는 중요한 순간에 그를 배신했다. 방귀를 뀌지 못하는 약사 스컹크는 이제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발가벗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약사일 뿐이었다. 검은 콧구멍은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분노로 바지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그의 아내에게로 기어갔다. 그러나 검은 콧구멍은 막상 사지를 뻗고 축 늘어진 자신의 아내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자 의외로 자신의 눈앞에서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 아래 이웃집 처녀들과 자신이 통렬한 해방감에 휩싸여 얼싸안고 춤을 추는 환영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그에게 말없이 다가와 가슴의 털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던 아내의 손길이 떠오르자 검은 콧구멍은 시뻘건 화인에 데인 망아지처럼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것은 마치 도끼를 십여 차례 맞고도 죽지 않던 황소가 내지르던 마지막 울음과도 같았다. 도살장 신부도 지금 막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 팔을 허공에 십자로 크게 휘둘러대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때 검은 콧구멍은 닭똥 만한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며 그의 아내를 내리찧었던 피묻은 곡괭이 자루를 신부의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 젊은 광부들이 회의실로 뛰어 들어 왔다. 늙은 광부는 회의실로 올라오는 마지막 계단에 그만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시청계단을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력을 내어 뛰어 올랐으나, 유달리 다혈질적인 젊은 광부들이 사태의 추이를 참지 못하고 늙은 광부를 제치고 앞질러 회의실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도살된 짐승처럼 피투성이로 널부러진 아내 옆에서 곡괭이를 높이 치켜든 채 울부짖고 있는 검은 콧구멍을 본 젊은 광부들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유혈 혁명이 시작된 것을 알곤 각자 무기가 될 만 한 집기를 집어들었다. 그들이 볼 땐 검은 콧구멍과 그의 아내는 홀연 단신으로 시청 안 모리배들과 영웅적으로 싸웠던 것이었다. 순간 숭고하고도 깊은 존경심이 젊은 광부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곤 아슬아슬한 긴 정적이 흘렀다. 약사 스컹크도 시장도 검은 콧구멍도 한 구석에서 이 모든 사태에 반쯤 미쳐버린 여비서도, 이젠 완전히 곯아떨어진 각 구역의 어리석은 통장들만 빼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어 보지 못하고 사태가 이렇게 험악하게 변해 버렸나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다 이쯤에서 서로들 한 발짝씩 물러 서 주길 바랬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정적이 또 다시 흘렀다. 그런데 약사 스컹크의 방귀가 그 중요한 순간에 항문의 괄약근을 힘차게 밀곤 밖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약사 스컹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광부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막장에 들어 갈 때 착용하는 마스크를 동시에 아주 빈틈없이 착용하였다. 그 틈에 죽어 나는 것은 시장과 도살장의 신부와 각 구역의 어리석은 통장들과 여비서뿐이었다. 시장은 그 매운 최루가스의 방귀에 코를 쥐어 잡고 분노에 떨며 약사 스컹크의 얼굴을 한 대 쥐어 갈겼다. 약사 스컹크는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도 계속하여 방귀를 뀌어 대었다. 그 동안 참았던 방귀에 약사 스컹크도 어떻게 자신을 통제 할 수 없었으므로 시장에게 맞으면서도 그는 자신에게 속상하여 울고 말았다. 시장은 그의 구두코로 사정없이 약사 스컹크의 배를 내질렀다. 광부들은 그런 시장의 행동을 저지하기보다는 더 과격하게 보이도록 시장을 쓰러진 약사 스컹크의 허리춤에 앉혔다. 백 삼십 킬로의 육중한 무게가 약사 스컹크의 허리를 분질러 놓는 듯 했으나 약사 스컹크는 그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검은 콧구멍은 아내를 잃은 치유할 수 없는 아픔과 분노로 울부짖으며 아직도 곡괭이를 신부의 머리 위에서 높이 치켜들고만 있었다. 도살장의 신부는 이제 그만 자신에게 허락된 고통의 잔을 마시고 싶었다. 신부는 자신의 의족과 성한 다리를 한곳으로 모아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도 그는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이 일을 기적적으로 해냈고 처음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어색함으로 얼굴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깊이 묻었다. 순간 검은 콧구멍의 곡괭이 자루가 더 이상은 힘에 부쳐서라도 높이 쳐들고 있을 수 없다는 듯 신부의 머리통에 내리쳐졌다. 이 단 한번의 내리침으로 해서 도살장의 신부는 죽지 않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피를 본 광부들이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광기에 휩싸여 어리석은 통장들을 회의실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어리석은 통장들은 창문 밖으로 떨어지면서도 함부로 갠 모포처럼 최대한 몸의 사지를 웅크린 채 허공을 가르며 광장에 모여 있는 광부들과 군중 속으로 떨어졌다. 군중들은 이 모든 사태를 혁명으로 규정하고 혁명의 편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과격하게 몰아갔다. 그들은 상점과 거리의 차들을 불태우고 전복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광기 속에서도 자신들의 상점과 차들은 분명하게 구별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들에게 혁명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광부들의 오랜 욕설을 마구 지껄여댔다. "이렇게 깊이 숨어 있으려면 검지나 말지." 도살장의 신부는 자신의 쪼개진 정수리에서 솟구쳐 오르며 이마를 적시고 자신의 눈 속으로 흘러 들어가 검은 동공을 안개 속으로 가두는 피의 온기를 섬뜩하게 느꼈다. 신부는 이젠 모든 것이 아득했다. 으깨어진 정수리의 고통도, 고통을 주었던 곡괭이 자루도, 자루를 들고 있는 검은 콧구멍도, 콧구멍의 아내도, 시청 앞 광장도, 그곳으로 오기까지의 골목도, 도살장에서의 마지막 기도도, 그 날 자신에게 찾아왔던 피 흘리는 석탄도. 이제 검은 콧구멍은 시장의 볼록 튀어나온 배도 사정없이 곡괭이로 찢어발겨 버렸다. 그러나 신기하게 시장의 찢어진 배에서는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장도 잠시 자신의 찢어진 배를 넋 나간 듯 쳐다보다가 꿈속에서 버린 피 흘리는 석탄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사태가 이렇게 나빠지진 않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보았지만, 그는 그 어떤 꿈도 다시는 꿀 수 없게 되었다. 시장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갈라 찢어진 뱃속으로 광부들이 곡괭이자루를 들고 사라져 버리는 환영을 보았다. 검은 콧구멍의 광부는 잠시 앙탈 부리는 여비서의 젖통을 한 입 덥석 깨물고는 곡괭이 대신 여비서를 어깨에 을러메고 사라져 버렸다. 시장은 차라리 광부들과 공평한 계약을 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신의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떠오르자 자신은 정말 예민하고 직감이 빠른 위대한 지도자라는 터무니없는 자만심에 들떠 죽은 뒤에도 죽음이 찾아온 것도 잠시 잊었다. 늙은 광부는 이 모든 사태가 진정 된 뒤에야 회의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발로 한번씩 걷어차면서 - 검은 콧구멍 아내는 더 세게 걷어차였다 - 혹시 살아있을지 모르는 시체를 찾아보았다. 그것은 그가 해야할 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었는데 그런 그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생각되어 창문 쪽으로 다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텅 빈 광장을 바라보며 늙은 한 마리 타조처럼 울부짖었다.

그때 마을의 종려나무가지 위에 걸려있던 태양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 다.

* 이른 아침 검은 석탄을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그 마을의 석탄공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트럭들이 지나가는 길엔 한쪽 눈을 소의 뿔에 찔린 도살공이 사는 도살장이 있었고 앉은뱅이 약사가 자신에게 처방전을 쓰고 자신에게 약을 먹이는 약방이 있었고 항상 청렴결백을 외쳐대던 그러나 비만으로 끝내 각료회의실에서 쓰러져 죽은 시장의 집이 있었다. 석탄 차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검은 석탄가루를 날리며 태양보다 더 높이 솟아있는 공장의 굴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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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세계00)

대한민국 신춘문예/문학평론 2008/11/08 23:58

작품명 :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 
 - 대립하는 두 인물을 가진 세 편의 소설
 성 명 : 이성우 
 
<심사위원> 홍기삼
"논지 분명"
응모한 작품들에 대해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관점이 심사에 참고되었음을 밝힌다. 첫째 논지가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가 하는점. 둘째 비평적 담론으로서 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 셋째 논리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하 가는 점. 넷째,비평적 문장으로서 어느 정도 품격이나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 지의 여부. 다섯째,대학원의 리포트나 각종 논문투로 쓰여진 글인가 비평적 개성이 드러난 글인가 하는 점.
위와 같은 관점을 굳이 밝히는 까닭은 그것이 대부분의 응모작을 통해서 받은 느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먼저 9편을 골랐으나 이 중에서 다시 세편로 압축,결선에 남겨지게 되었다. 박남시의 '신화적 주체로서의 존재찾기(김정란의 시섹)',최유진씨의 '사랑과 노래의 운명,시의 연금술-김소월론'및 이성우씨의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대립하는 두 인물을 가진 세편의 소설'이 결선에 오른 작품들이다.

박남희씨의 '신화적 주체…'는 김정란의 신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문학의 형식문제,해체하고자 하는 대상,"자아와 타자들의 인습화된 한계"에 대한 도전등이 이글의 줄기를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는 김정란의 시가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지 그것을 밝히는데 주력함으로써 논의의 초점을 이루지 소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최유진씨의 '사랑과 노래…'는 세련된 수사와 문장력이 비평적 안정감을 이루어내고 있는 글이다. 또한 김소월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논리에 설득력이 있어어 비평적으로 신선한 느낌도 준다. 그러나 이 글 역시 논지가 하나로 모아져 있지 못해 한 편의 비평으로는 허술함이 보이고 있다.

당선작으로 가려진 이성우씨의 '스테로오적 시점…'은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분명하고 진술과 논중도 탁월한 설들격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와 크게 관련이 없는 현학적 지식을 오용,남용하는 최근의 비평적 폐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글은 세편의 소설이 가진 복수화자(시점)의 문제를 통해 삶의 진실,역사에 대한 원칙과 그인식,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문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떤 것인지를 두루 생각하게 하는 힘을 보여주는 당당한 글이다.


작품명 :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 
 - 대립하는 두 인물을 가진 세 편의 소설
 성 명 : 이성우 
 
당선 통지를 받던 날은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였는데, 오히려 하늘의 달은 우리 지구에 가장 가까워서 환한 밤이 될 거라고 곁에서 누군가 말했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 우러나온 몸짓이 진실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음을 나는 믿어 왔다.
대학 졸업 후 3년 간 먼발치에서 모교의 시계탑이 녹슬어 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몰입했던 컴퓨터의 가상 공간에서 차디찬 이진법의 세계관에 절망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문학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세상에서 문학이 가장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밤을 새우며 컴퓨터 앞을 지키던 그들의 삶에도 문학의 경우에 못지않은 열정과 지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다만 세상을 사는 많은 길 중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겠다.

예전에 어느 명의가 그랬듯이, 작품에 열 개의 '침'을 꽂더라도 그 작품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비평을 하고 싶다. 더 나아가 이미 창작된 작품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작품에 영감을 부여하는 창조적인 글을 쓰고 싶다.

충주 시내로, 낯선 도시 서울로 맏손자의 학업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하시다가 이제는 내 공부방의 한 장 사진으로 남으신 할머님께 기쁜 소식이 닿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장남 그리고 막내 사위에 대한 기대와 애정을 듬뿍 주시는 부모님들과 가족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철없던 학생에게 처음으로 스승의 엄한 애정과 자상한 질책을 깨닫게 하시고 또한 이끌어 주시는 최동호 선생님과 모교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부족하기만 한 글에 기대를 실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는 더욱 정진하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선배.동료.후배인 나를 따뜻한 관심과 매서운 비판으로 감싸 안아 준 대학원 식구들에게도 고마움의 인사를 전해 드린다.

늘 곁에서 나를 지지해 주는 아내 미숙과 개구쟁이 이산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작품명 :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 
 - 대립하는 두 인물을 가진 세 편의 소설
 성 명 : 이성우

{{ }}스테레오적 시점과 삶의 진실 -대립하는 두 인물을 가진 세 편의 소설 이 성 우 세기말과 새 천 년의 의미가 겹치는 희망과 불안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현실은 천(千)의 얼굴을 가졌다,라고. 천의 얼굴이라고 할 만큼 현실은 복잡 다단하여 어느 일면의 관찰만으로는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일 게다. 특히 현대 문명 사회에서 개인화되고 전문화된 삶은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단편으로서의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는 견해가 팽배해 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사회는 수많은 파편으로 된 모자이크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현실의 천의 얼굴'은 다만 하나의 얼굴이 지어낸 표정과도 같은 것이며,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은 '얼굴'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전자의 견해에 따른다면 세계를 움직이는 기본 질서나 법칙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파편화된 삶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전체 현실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후자의 견해는 다양한 현실의 저변에 일정한 삶의 원리나 법칙이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 두 세계관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전자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주장처럼 들리고, 후자는 세계를 곧잘 관념화.도식화하는 현실 변혁 운동자들의 주장과 유사해 보인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두 세계관 중 어느 하나의 범주에 이미 속해 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사람들도 잠시 그 범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함께 읽을 세 작품을 확인하자. 각기 10∼20여 년의 사이를 두고 발표된, 전광용의 [사수(射手)](1959), 송기원의 [춘몽(春夢)](1978), 임철우의 [붉은 방](1988)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이 주인공 또는 화자인, 우리 소설사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이 작품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우리들에게 기꺼이 판단의 위기에 직면하며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소설의 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소설 작품에서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경우,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발언의 기회를 갖느냐, 즉 누가 작중 화자가 되느냐에 따라 독자의 인식과 판단이 크게 달라진다. 의도적으로 반어의 효과를 노린 작품이 아니라면, 독자는 화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작중 인물들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가 1인칭이라면 독자의 작품 이해의 범위와 각도는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의 작품 가운데 하나가 전광용의 [사수]이다.

[사수]는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와 친구 B 사이의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나'와 B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오면서 우연이랄 수만은 없는 극적인 경쟁 관계를 지속하다가 급기야는 B의 사형 집행 사수로 '내'가 차출되기까지 한다.

'나'와 B의 대결의 내용은, B의 사형 집행 현장에서 실신했던 '내'가 침대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나'의 회상은 일화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되어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① 국민학교 때 : "곰" 선생의 수업 시간에 '나'와 B는 서로의 뺨을 때리는 벌을 받는다.

(B의 승리-'내'가 코피를 흘렸다.) ② 중학교 때 : 경희를 양보 받기 위한 공기총 시합을 벌인다.

(B의 승리-'내' 자신의 실수로 귓바퀴에 상처를 입었다.) ③ 청년기 1 : 6.25 전쟁 중에 '나'는 B와 다시 만난다.

(B의 승리-B는 이미 경희와 결혼해 있었다.) ④ 청년기 2 : B의 사형 집행 사수로 '내'가 차출된다.

(B의 승리-B의 의연함에 비해 '나'는 총도 제때 쏘지 못했다.) '내'가 B와의 대결에서 모두 패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특히 일화 ②에서 생긴 귓바퀴의 상흔은 '나'로 하여금 B와의 경쟁 의식과 함께 지속적인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B가 '나'와의 대결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승부를 결정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성장 과정을 따라 연속되는 경쟁적 일화는 '나'의 시점에서만 회상될 뿐이다. 1인칭 화자인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독자는 그런 '나'의 진술에만 의존해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B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B 사이에서 경쟁의 촉매 역할을 하는 '경희'에 대한 정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부족할 따름이다. 차라리 경희가 작중 화자가 되었더라면 '나'와 B의 경쟁 관계가 좀더 입체적으로 조명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이처럼 1인칭 화자인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겪은 것만을 묘사할 수 있을 뿐 '내'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나 다른 인물의 마음속은 묘사할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스테레오적 시점'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스테레오적 시점이란, 한 번은 인물 1이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하고, 또 한 번은 인물 2가 자기의 입장에서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독자는 대립하는 두 인물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고, 따라서 사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스테레오적 시점을 채택한 작가는 철저하게 일인이역을 감당해야 한다. 두 명의 화자가 전달하는 정보는 그 각각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가 드러내 놓고 일인이역을 한다는 형식은 독자에게 이질감과 낯선 느낌을 줄 수 있다. 심한 경우 독자는 반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작품을 대할 것이다.

스테레오적 시점은 이렇듯 불리한 조건을 함께 가진다.

작가의 인식 내용의 새로움이야말로 이러한 불리함을 딛고 일어서는 유일한 무기이다. 스테레오적 시점의 최대 목적은 소홀히 취급되어 왔던 일면의 진실을 새롭게 조명하여 입체적인 인식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송기원의 [춘몽]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에서는 월부책 장수인 1인칭 남성 화자(앞으로 '화자 1'로 표기)가, 제2부에서는 외국인 회사의 사장 비서로 근무하는 여성 화자(앞으로 '화자 2'로 표기)가 역시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월의 여대 교정, 하루 종일 허탕을 치고 교정을 빠져 나가려는 화자 1을 화자 2가 부른다. 화자 2는 책을 사 주는 형식으로 화자 1을 꾄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인천의 호텔에 가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자 2는 '처녀'였고, 이튿날 아침 종적을 감춘다. 이상이 두 화자 사이의 사건의 개요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일한 사건, 특히 화자 2의 '처녀성'에 대한 화자 1과 화자 2의 인식 태도가 판이하다는 사실이다. 화자 1은 여성의 처녀성을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인식한다. 화자 1의 이러한 인식 태도는 여느 독자들의 인식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당사자인 화자 2에게 있어서 처녀성은, 한때 금전으로도 환산될 수 있었던 것이며 지금에 와서는 가난의 흔적 혹은 거추장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한 낡은 방식의 삶을 대변할 뿐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통상의 관념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 비난과 지탄을 받아 마땅한 여자인 화자 2에게 당당한 발언의 기회를 부여했다는 데 있다.

화자 2의 발언에 의하면,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은 물론 홀어머니 슬하를 떠난 대학 시절에도 가정 교사, 월부책 판매원, 출판사의 임시 교정 직원, 심지어 맥주홀의 호스티스 등 갖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다. 그녀는 대학 4학년 때 아르바이트하던 맥주홀에서 자신의 '처녀'를 거액으로 흥정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팔지는 못한다. 그녀에게는 '가난한 자존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인 사장의 비서로 근무하면서, 그녀는 참담했던 대학 시절의 궁핍의 때를 벗기기 위해 노력한다. 방 한 칸 없이 떠돌던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한강변에 아파트를 장만하고, 에이프런을 두르고 서양 요리를 만들고, 자신의 육체를 금전으로 흥정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덮어 버리기라도 하듯 거의 매일처럼 보디로션을 사용한다. 그녀는 스스로 "미운 오리새끼처럼 버려져 있던 나의 육체는 어느 날 느닷없이 눈부신 백조로 둔갑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외국인 사장과 동반해 각종 파티에 참석하기도 한다. 파티를 통해 그녀는 비로소 상류 사회의 모습을 구경했고, 그녀의 '상품 가치'는 폭등한다. 이제 그녀 앞에는 온갖 좋은 조건을 구비한 남자들이 그녀의 선택을 위해 "상품처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는 반대로 그녀는 내심 옛날의 가난했던 모습을 그리워한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상류 사회'에 완전하게 편입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갈등한다. 그녀가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 외국인 사장이 그녀에게 청혼을 해 온다. 그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호텔 방을 예약하고, 외국인 사장 앞에서 옷을 벗는다. 그러나 외국인 사장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육체를 바라보는 그의 차거운 눈길을 보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난 처녀예요." 그가 여전히 차거운 눈길로 나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오." 아아, 바로 그때 나의 내부에서 어떤 것들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졸업한 후 이 년 동안 나를 지탱 시켜 온 그 어떤 것들이.

그녀의 '처녀성'이 외국인 사장에게는 이렇다 할 가치가 없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녀에게 있어 외국인 사장의 가치관은, 그녀가 소속되기를 원하는 상류 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녀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처녀야말로 내가 끝내 버리지 못한 가장 큰 가난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것을 버리지 못하는 한 나는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마 침내 파멸하고 말리라는 것을.

그녀는 '처녀'를 자신의 한계로 인식한다. "비참하다 못해 차라리 처참하기까지 했"던 가난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그 한계를 깨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녀는 월부책 장수를 유혹해 '처녀'를 버렸던 것이다.

화자 2의 이상과 같은 진술이 화자 1의 진술과 나란히 놓여짐으로써 독자는 두 명의 사건 당사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할 수 있다. 두 화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 보자.

{{ }} 화자 1 {{}} {{}}{{}}{{}}여대 교정 인천의 호텔 외국(인 사장과의 결혼) {{}} 화자 2 화자 1과 화자 2가 공유한 공간은 여대 교정부터 인천의 호텔까지이다. 그 이후의 공간은 '처녀성'에 대한 인식 태도에 따라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 1은 화자 2와의 만남 이후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 상태에 빠져 대부분의 의식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게 된다(실선 부분). 화자 2는 외국인 사장과 결혼해 외국으로 나간다(점선 부분). 이렇듯, 가난한 젊은 시절을 고생으로 살아 낸 두 명의 화자가 그리는 삶의 궤적은 양쪽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스테레오 음악처럼 독자의 가슴을 흔든다.

임철우의 [붉은 방]은 모두 여덟 토막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역시 스테레오적 시점이 활용되었는데, 두 명의 작중 화자(앞으로 오기섭 화자, 최달식 화자로 표기)가 1인칭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 오기섭 화자 (하나, 셋, 다섯, 일곱째 토막)}}{{ 최달식 화자 (둘, 넷, 여섯, 여덟째 토막)}}{{ 본 적}}{{ 약산도}}{{ 낙일도}}{{ 나 이}}{{ 이십대 후반∼삼십대 초반(추정)}}{{ 47세}}{{ 학 력}}{{ 대졸}}{{ 고졸(추정)}}{{ 직 업}}{{ 고등학교 교사}}{{ 보안 관련 경찰}}{{피부양 가족}}{{ 아내, 1녀}}{{ 어머니, 아내, 1남 2녀}}{{ 당면 과제}}{{ 전세금 인상분 삼백만 원}}{{ 정신 이상이 된 어머니}} }} 두 화자의 만남은 오기섭 화자가 수사 기관에 연행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기섭 화자는 시국 관련 수배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최달식 화자의 취조를 받는다. 최달식 화자의 취조는 주로 '고문'을 수단으로 행해진다. 이 작품이 갖는 의미의 중점은 고문의 문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편의 분량에 담겨진 사건 자체는 지루하리 만큼 단조롭다.

{{}}{{ }}{{}}{{ }}오기섭 화자 : 집 학 교 집 {{ }} 붉은 방 {{}}최달식 화자 : 집 {{}} 집 작품의 표제이기도 한 '붉은 방'은 최달식 화자가 오기섭 화자를 취조하는 방이다. 오기섭 화자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점선 부분)은, 자동화된 인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삶이 아주 쉽게 부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오기섭 화자의 붉은 방 체험은 독자를 포함한 평범한 다수의 삶을 파괴하는 시대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두 명의 화자를 교대시키는 소설적 장치를 택한 것은, 고문이라는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일방적 비판이 가져올 독자의 의식의 자동화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고문을 폭로하는 작품이 비슷한 내용과 수법으로 반복된다면, 오히려 고문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최달식이라는 가해자에게 피해자와 대등한 진술의 기회를 부여했다. 최달식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야말로 시대의 희생자이다. 6.25 때 가족들의 몰살,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원수로 알던 아버지의 급사, 이들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 버린 어머니, 게다가 어려서 죽은 아들 한수에 대한 죄책감이 최달식 화자를 괴롭힌다.

빨갱이들 손에 우리 조부모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일가까지, 모두 합해서 아홉 사람이나 떼죽음을 당하지만 않 았더라면-그랬더라면, 아버지는 홧병이 들 리도 없었을 테고 [……] 알콜중독이 심해져 끝내는 옷을 벗기우다시 피 해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결국…… 그렇게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란 말이다.

정말이지,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어머니가 저렇듯 노망기가 들어 똥오줌을 떡 주무르듯 하지도 않았을 테고, 나도 너희들처럼 대학을 나와서 지금쯤은 더 그럴듯한 직장을 잡았을 테고 [……] 한때 난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

최달식 화자의 삶의 내력을 알게 된 독자는 인간적인 연민을 금할 수 없다. 오히려 피해자인 오기섭 화자가 당하는 고통은 신체적인 부위에 머물러 최달식 화자의 삶의 아픔보다 정도가 덜해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는 최달식 화자의 삶의 내력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투영시켜 '고문'의 뿌리가 당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최달식 화자의 현재의 일상은, 고문으로 대변되는 폭력과 비인간화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고문을 행하는 당사자조차 그것의 부정성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음을 힘주어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스테레오적 시점의 효과는 최달식 화자의 삶에 현대사의 비극성과 평범한 일상성을 부여함으로써 극대화된다. 최달식 화자는 가해자이기 이전 피해자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기섭 화자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의 영위자들이야말로 최달식 화자와 같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스테레오적 시점은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을 대등하고도 입체적으로 다루려는 소설적 장치임을 살펴보았다. [춘몽]과 [붉은 방]에서 스테레오적 시점은, 양쪽 당사자의 삶이 모두 일면의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볼 때 스테레오적 시점은,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 혹은 '이쪽도 그르고 저쪽도 그르다'는 이른바 양시쌍비론(兩是雙非論)과 아주 흡사해 보인다. 사실 우리들 삶에는 딱 부러지게 어느 한 쪽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이 드물지 않다. 이럴 때 우리는 양시쌍비론에 기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편리할 뿐이지 올바른 처사라고는 할 수 없다. 왜인가? 한마디로,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잘 알려진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솔로몬의 재판에서, 두 여인은 서로가 자신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한다. 이때 솔로몬의 판결이 양시쌍비론이다. 둘 다 일리가 있으니 똑같이 옳다는 판결은 양측 모두를 존중하는 처사 같지만 실지로는 이처럼 진실(아이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솔로몬의 이같은 판결에 찬성한 쪽은 물론 가짜 어머니이다. 가짜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목숨보다도 양쪽이 모두 옳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의 판결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진짜 어머니는 지금 당장의 시시비비보다는 아이의 목숨이 남아 있기를 원한다. 솔로몬은 양측의 반응을 보고 진실을 가려낸다. 솔로몬은 양시쌍비론의 허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양시쌍비론의 허점은 무엇인가?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 것이다. 아이를 낳은 사실(과거)이 없고, 아이의 목숨에 대한 소중함(미래)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잘 알려진 명제를 상기하는 것도 좋다. 물론 그 대화는 미래를 바라보며 나누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현실에 급급해 판결을 내릴 때, 양시쌍비론은 잘못 판단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양시쌍비론은 판단의 회피이지 온전한 판결은 아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일화에서 양시쌍비론이 최종 판결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만 쓰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양측 당사자에게 동등한 진술의 기회를 주고(양시쌍비론), 판결하는 사람은 사건의 맥락(크게 말하면 역사 의식)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솔로몬의 재판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가르침이다.

솔로몬이 행한 재판은 작가의 소설 쓰기와 대응된다. 솔로몬이 진실을 분별하는 수단으로 양시쌍비론을 사용했듯이,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 스테레오적 시점을 활용한다. 스테레오적 시점이라는 형식만으로 볼 때 작가는 엄정한 중립을 지키며 양쪽을 모두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형식적인 중립은, '중립적이지 않은'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이다. 작가는 겉으로 중립적인 체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말하기 위해 더 교묘한 기법이나 장치들을 사용한다.

스테레오적 시점에 의해 평행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춘몽]을 자세히 뜯어보면 작가의 의도가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작중 인물의 인식 태도와 어조에서 드러난다.

화자 1과 화자 2는 비슷한 정도로 가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가난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화자 2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에 비해 화자 1은 "돈을 벌기 위하여 내 몸을 사용하는 일이라면 나는 뭐든지 해 왔었다. 좋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 주마."라고 했으면서도, 막상 화자 2가 '처녀'를 버리고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태도에 변화를 보인다.

나는 그년을 원망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년의 앞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 꼴리는 밸이나 질투를 넘어서라도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문제는 그년의 거울로 인하여 파괴당한 내 삶이다. 주간지에서 그년이 결혼하리라는 것을 안 이후, 나는 줄곧 내 저주스러운 모습이 비치는 그년의 거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년의 거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 삶은 가치가 없다. 가치가 없는 삶은 고통일 뿐이다. 그년의 거울은 너무나 뚜렷하게 내 삶의 한계를 보여 준다.

아아, 어떻게 내가 그년의 거울을 깨뜨릴 수가 있으랴. 그토록 눈부신 거울을.

화자 1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의 한계를 반어적으로 "내 삶의 한계", 깨뜨릴 수 없는 "그토록 눈부신 거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반어법은 일차적으로 화자 1이 가치관의 극심한 혼란 상태에서 가치 전도를 경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이 반어법은 작품에 대한 작가의 개입이 어조의 변화로 표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화자 1의 "삶의 한계"를 보여 주는 화자 2의 "거울"이란 무엇일까?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분부터 화자 1의 진술이 끝나는 부분, 그러니까 제1부의 끝까지 읽어 보자.

그년의 거울이 눈부신 것은 그년이 앞으로 살아갈, 나와는 반대되는 계급 때문만은 아니다. 권력이나 돈으로만 이야기한다면 나도 그년의 계급처럼 못 되란 법도 없다. 권력이나 돈뿐만이 아니다. 그년의 거울에는 권력이나 돈 뿐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

야외 음악당 앞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해가 지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 버렸다. 어둠이 도심지를 혁명군 처럼 진주해 오고, 도심지는 주둔군의 품에 안겨 빌딩마다 요염하게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도심지를 내려다 보며, 빌딩에 불이 켜질 때마다 얼핏얼핏 그년의 웃음소리를 들은 듯했다.

화자 1의 진술에 따르면 화자 2의 "거울"은 돈, 권력, 그리고 "또 다른 무엇"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화자 1은 돈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그 "또 다른 무엇" 때문에 눈이 부시고 거울을 깨뜨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돈이나 권력 등의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의 측면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화자 1이 자신의 도덕적 타락의 한계를 "내 삶의 한계"라고 반어적으로 말했던 사실과도 조응된다.

이제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화자 1이 말하는 "그년의 거울"이, 돈이나 권력 등의 물질적 가치 그리고 그것의 획득을 위한 정신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화자 1은 "또 다른 무엇"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놓고 작가는 줄 바꿔 쓰기를 하고 문맥을 바꿔 버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작가가 시치미를 뗀 것이다.

작가의 난데없는 시치미 떼기는 독자로 하여금 독자 자신이 짐작했던 "또 다른 무엇"의 의미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제 앞뒤 문맥을 다시 한번 살피는 주의 깊은 독서를 요구 받은 것이다. 작가가 줄 바꿔 쓰기를 한 마지막 단락이야말로 정교하고 치밀한 독서를 필요로 하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 문명의 타락한 가치는 '어둠 혁명군 주둔군'으로 표현된다. 그것에 대한 항거는 이미 "삶의 한계"로 치부될 뿐이다. 따라서 '도심지(빌딩) 그년'은 자발적으로 타락한 가치의 품에 안겨서 항복 혹은 동조의 신호로 "요염하게 불을 밝히"는 것이다. "텅 빈 광장"이나 "그년의 웃음소리"는 타락을 거부하는 화자 1과 같은 존재를 오히려 비웃는 전도된 가치 풍조를 대변한다.

이상과 같은 비유 구조 속에는 물질적 가치로 인한 정신적 타락의 범위가 개인에서 도시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화자 1의 인식의 범위가 은연중에 확대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화자 1이 새롭게 인식한 내용이 고스란히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화자 1의 진술임을 가장하여 함축적인 의미의 문장으로 작가 자신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화자 1이 보여 주는 위와 같은 인식의 확대에 비할 때 화자 2의 인식 태도는 그 자체로서 아이러니가 될 만큼 저급의 수준을 면치 못한다. 다음은 화자 2의 마지막 진술이자 작품의 끝 부분이다.

내가 처녀인 것을 알고 놀라던 그 남자의 시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남자에게 큰 죄라도 진 듯한 기 분이었다.

처녀를 버린 다음날 아침은 참으로 청명했다.

화자 1에 대한 화자 2의 죄책감은 화자 1을 도구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결코 자신의 '처녀를 버린' 행위에 대한 자책이 아니다. 이런 인식 상태에서 "처녀를 버린 다음날 아침은 참으로 청명했다"라는 마지막 진술이 나온다. 화자 2는 도덕적 마비 상태에 있다. 작가는 화자 2에게 진술의 기회를 주었을 뿐 온전한 인식 능력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자 2의 진술은 일면 타당한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독자들의 의식과 어긋나는 것이다.

[붉은 방]이 스테레오적 시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최달식 화자의 삶에 현대사적 의의와 일상적 의미를 함께 부여했음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최달식 화자가 겪은 비극적 사건들은 때로 최달식 화자를 이상 성격의 소유자로 만든다. 최달식 화자가 붉은 색에 대해 가지는 이상 심리라든지, "무엇이든 허약하게 보이는 것을 나는 깡그리 증오한다"라는 진술에서 드러나는 과도한 피해 의식 등은, 최달식 화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독자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그 결과로 '고문'이 우리 시대의 보편성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몇몇 개인의 특수 문제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삶의 양면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는 스테레오적 시점에서 어느 한 쪽의 화자가 정상이 아니라면, 작품의 평행적 대립 구조가 어그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① 그렇지. 나는 내 혼자만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잖나. 내겐 이 사회와 국가를 저 간악한 악의 세력들로부 터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해. 아암.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지하실로 이르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 동안에도 동료들은 수고하는 모양이다. 이 방 저 방에서 고함소리와 신음소리가 활기 있게 흘러나오고 있는 참이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붉은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② 주님. 악을 멸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이 죄인을 버리지 마시옵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 록 굳건한 믿음으로 지켜주시옵소서. 오오 주여. 저희들 비록 죄 많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양들이오나……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어느새 성스러운 은총과 기쁨이 내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기 시작하고 있음을 나는 역력히 느낀 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이 붉은 방 안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고 있다.

위의 두 인용문에서 시대 착오적이며 과대 망상적인 최달식 화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적인 어조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인용문과 같은 발언들은 독자들의 의식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반어적 의미를 산출한다. 3인칭 시점의 소설이라면 화자에 의한 인물 비판 곧 풍자이지만, [붉은 방]은 1인칭 시점의 소설이므로 화자와 독자의 대립, 곧 반어의 효과가 된다. 이것을 작가의 개입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읽는다면 작가에 의한 화자 비판, 곧 풍자로도 볼 수 있다. 결국 위의 인용문은 자신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릇된 인식 상태에 머물고 마는 최달식 화자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진다.

이에 비해 오기섭 화자는 붉은 방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① 이렇게 간단하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렇다. 알고보면 어느 한 사람의 목숨 쯤이야 참으로 손쉽고도 간단하게 해치워버릴 수 있는, 그렇듯 소름끼치는 야만과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도, 사람들은 막상 그걸 까맣게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② 불현듯 피잉 눈물이 돈다. 돌아온 것이다. 내 집으로.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그러나 얼른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 붉은 방에서 보낸 그 몇 개의 밤과 낮 동안 내 육신과 영혼은 만신창이로 갈가리 찢겨져버렸고, 그자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소름끼치는 환멸과 증오로 걸레쪽처럼 찢겨져버린 내 육신을 다시 내 집 앞에다가 멋대로 내팽개친 채 유유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불덩이 같 은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차츰차츰 내 전신의 구석구석까지 뜨겁게 퍼져나가다가 이윽고는 엄청난 열기로 타 오르는 그것은 분노였다.

자신에게 행해졌던 고문의 의미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벗어나 동시대 보편의 문제로 확대한다는 점에서 오기섭 화자의 위의 진술은 가치를 지닌다. 개인에게 행해진 국가 기관의 폭력에서 '야만과 폭력의 시대'을 읽어 낸 오기섭 화자의 인식 능력에 의해 독자의 인식 범위는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이런 인식 행위의 밑바탕에는 어느 시대에든 개인의 삶은 고립된 개별자의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공동체적 세계관이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인용문 ①)을 거쳐 시대에 대한 분노(인용문 ②)에 이르는 오기섭 화자의 의식의 변이 과정은 독자의 독서 체험에서 효과적으로 재현된다. 따라서 오기섭 화자의 발언에 구태여 최달식 화자에서와 같은 반어의 형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최달식 화자의 반어법과 오기섭 화자의 진지한 어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스테레오적 시점이 활용된 작품을 읽은 독자가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명확한 현실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작가의 전략이 작품에 교묘히 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세 편의 소설은 모두 대립적인 위치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사수]는 주인공인 1인칭 화자의 한쪽 진술에만 의존함으로써 총체적 삶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편의 소설과는 구별된다. [춘몽]과 [붉은 방]은 1인칭 화자의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테레오적 시점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활용했다. 우리는 이 두 편의 소설에서 대립적인 입장에 처한 두 화자의 진술을 마치 무릎맞춤하듯 따져 들음으로써 사건을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테레오적 시점은 인생의 양면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소설 장치일 뿐 그것 자체로서 완결된 판단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또한 주목해야 한다. 스테레오적 시점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테레오적 시점에만 머무르지 않고 작중 인물들의 인식 능력과 어조 등 작가 자신의 교묘한 기법들을 동원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을 말한다. 그 삶의 진실의 무게 중심을 작중 인물들 가운데 어느 쪽에 놓을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작가의 '역사 의식'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솔로몬의 재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이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은 비유적인 차원에서는 일면 타당하다. 문제는, 그 말의 의미가 현실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의 불가해성을 주장하는 곳까지 치닫는다는 데 있다. 아무리 현실의 구체적인 양상이 많고 그 양상들을 이어 주는 인과 관계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에 대한 이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현실은 파편화된 삶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아니다. 현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주장과 다름없다. 현실은 천의 얼굴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아니라, 천의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우리네 인간들이 한 땀 한 땀 직조해 내는 삶의 모습일 따름이다. 천의 표정으로 거짓을 화려하게 꾸미는 현실 속에서, 역사 의식을 지닌 작가와 비평가는 나름의 삶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같은 삶의 진실이 과거 혹은 동시대의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문학의 죽음 대신 문학의 존재 이유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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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세계00)

대한민국 신춘문예/시 2008/11/08 23:55

작품명 : 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성 명 : 최용수

<심사평> 유종호.신경림

"생활속 소재..밝고 따뜻하다"
시들이 틀에 맞춘 것처럼 너무 비슷하다. 산문시와 운문시 또는 한 시에서 산문과 운문을 적당히 배합하는 형식부터 그렇다. 신춘문예를 위한 특별한 텍스트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내용도 서로 비슷비슷하고 알쏭달쏭이다. 억지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만드는 것, 쓰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냥 만드는 것은 아닐 터이다.
네 사람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승철의 작품 중에서는 '편지에게 쓴다'가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제목은 좀 이상하지만 불안하고 무언가 을씨년스러운 작자의 느낌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요즈음 유행하는 젊은 사람들의 시와 너무 다른 점이 없다. 이현승의 시는 장황한대로 지루하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근황' 같은 시는 경쾌하고 발빠른 느낌을 준다. 시어의 선택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안정감이 없다.

김성곤의 시는 무언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추'가 가장 좋은데 좀 산만하다. '다물도' 같은 시가 왜 지루하게 느껴지는지 작자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용수의 시는 생활 속에서 가져온 소재이면서도 밝고 따뜻해서 좋다. '낙엽 한 잎'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는데 고달픈 삶의 현실을 다루었으면서도 어둡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그지없이 아름답다.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같은 비유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녀 이야기'도 쌈박한 시다.

이상 네 사람의 시 가운데서 최운의 '낙엽 한 잎'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다른 응모자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 당선작으로 뽑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자기 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평가되었다.

 작품명 : 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성 명 : 최용수 
 
꽤 열정적이었던 문학청년 시절이 내게도 한때나마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군 제대 후,특별한 이유도 없이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많은 이름들이 반짝 나를 스쳐가는 동안 살아서 외로웠던 날들이 많았다. 어떤 길은 반드시 갔어야만 했고 또 어떤 길은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오랜동안 있었지만,작년에 만난 몇몇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름대로 의미있고 소중한 작업들을 시작했다. 이 사회 혹은 세상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나는 서른이 되었서야 하게된 셈이었다.
아주 가끔씩 시를 적었다. 창작의 성과물로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날 때 일기를 쓰듯이 말이다. 적어도 시 적는 동안에는 스스로에 대해,이웃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게 나에게 더없이 소중했다. 반강제적으로 친구에에 등 떠밀려 응모를했고 그리고 염치없이 당선이 되었지만,내게 시는 앞서 밝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사실이다. 삶의 많은 사소한 부대낌을 접어가면서까지 시를 적진 않을 것이다. 다만,더욱 몸을 부려 시 적는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는 재미없는 다짐을 해볼 뿐이다.

공사현장에서 지하 공장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묵묵히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두 동생에게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등 돌리기에도 바쁜 시절에 변변치 못한 나에게 안부를 물어주던 몇몇 벗들이 있다는 게 살아오는 매순간 힘이 되었다. 그들에게 한 번쯤 질퍽한 술이라도 대접해야 겠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었는데,그러한 계기와 여건을 한꺼번에 마련해준 두 분 선생님께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감사드리고 싶다.

새 천년에는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품명 : 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성 명 : 최용수 
 
날이 저물고,

마음 맨 안쪽까지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낙엽 한 잎이 다 닳아진 옷깃을 세운다

밥 익는 소리 가난히 새는 낮고 깊은 창을 만나면

배고픔도 그리움이 되는 걸까

모든 길은 나를 지나 불 켜진 집으로 향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마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일수록

실직의 내 자리엔,

시린 발목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새우잠을 청하던 동생의 허기진 잠꼬대만

텅텅 울린다

비워낼수록 더 키가 자라는

속 텅 빈 나무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섰을 때,

애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먼데서부터

우리 삶의 푸르른 날은 다시 오고 있는지!

길바닥에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부르르 떨기도 하면서

구로동 구종점 사거리 횡단보도 앞,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세상을 둥글게 말아엮던 달빛이 하얀 맨발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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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暴炎)(세계00)

대한민국 신춘문예/단편소설 2008/11/08 23:53

<심사평> 김윤식.박완서
"소재 통제하는 솜씨 돋보여"

금년도 응모작의 수준은 대체로 고른 편.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다음 4편이었다.
'내가 먹은 해바라기'(이수). 36세의 노총각인 삼촌과 25세의 조카 사이에서 교환되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상상력의 선선함이 돋보였으나 조금 허황하게 보였다. '칼을 쥐고 있는 여자'(노은영). 중년 주부의 불정한 심리를 파헤친 작품. 처녀 적에 겪은 성적 충격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거울을 통해 정리되었으나, 그 심각성에 비해 조금 안이하게 보였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거리'(홍겸선). 사람은 남의 자살을 도울 수 있는가. 이런 소재는 그 심각성으로 말미암아 자칫하면 굳어지기 쉬우나, 영화 장면의 도입에서 또한 희화적 처리에서 무난하게 다루어졌으나, 전체적인 통제력이 조금 모자라 보였다.

'폭염'(황광수). 죽은 맏형의 자리 이어받기를 한사코 도피해온 차남인 '나'가 이런저런 곡절을 겪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이 작품은 단편이 갖출 수 있는 간결함, 집중성, 그리고 단일성이 잘 갖추어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소재를 통제하는 작가의 이런 솜씨에서 작가적 오기조차 엿볼 수 있어 이 작가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작품명 : 폭염(暴炎)
성 명 : 황광수 
 
이제 그만 생을 포기해야겠다, 모질게 마음먹지 않는 이상 누구나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고, 또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포기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아직까지는 더 가치 있는 덕목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글쓰기라는 것도 그렇게 다수가 살아가는 평범하고 다양한 모습중 하나라 여기고,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것.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서툴고 숙련되지 못한 부족을 채우기 위해, 글쓰는 연습과 살아가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심사 위원의 따끔한 질책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흔들리는 차창에 기대 가로수와 전깃줄, 무질서하게 솟은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겨울 하늘과 까만 전선 가닥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무질서해 보이는 빌딩들도 딛고 선 땅을 배경으로 역시 어디론가로 향해 이어져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내 상체는 마을 버스가 튀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들썩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신문사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공손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추운 날씨와 늦게 도착한 마을 버스에 화가 나서가 아니였다. 신문사에 응모를 하고 돌아와 다시 읽어보고는 금방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고쳐 응모하는 수고로움을 몇 번이나 반복하느라 내 자신에게 지친 탓이었다. 늘 하던 '왜?'라는 질문도, 신중히 선택하던 '방법론'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막연한 불만들로 가득찬 작품은, 모호했다. 뒤늦게나마 힌트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30, 40년대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중이었고, 버스에 오르기 전에는 막 최명익의 '심문(心紋)'을 읽은 뒤였다. 마음의 무늬… 하지만 나는 아무런 힌트도 얻지 못했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이유를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당선 소감으로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아무런 조건 없이 기회와 용기를 제공해 주셨던 분께 드리는 감사일 거다.<황광수>


<약력>

△69년 전남 구례 출생

△88년 순천고등학교 졸업

△96년 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98년까지 전자회사 근무
 
 
작품명 : 폭염(暴炎)
성 명 : 황광수 
 
밖으로 나서는 순간, 동생이 행사한 폭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기에 흥건히 젖은 듯이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도, 손이 닿으면 데일 듯이 뜨겁게 달궈져 길을 가득 메운 차에서도, 에어컨 환풍 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콘크리트 건물 외벽에서도, 마치 아무도 밖에 나서지 말라는 경고라도 하듯 무서운 열기가 내뿜어져 길가로 나선 내 몸을 집어삼킬 듯이 뜨겁게 휘감았다. 온 몸이 끈적거리고, 후덥지근한 공기는 숨이 턱턱 막 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정말이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는 견 딜 수 없을 만큼 무더운 열기가 살속을 파고들었다. 머리 위에서는 따가운 햇 빛이 사람을 짓눌러대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조차도 상실감을 느끼기 에 충분할 만큼 태양은 사람을 풀어헤쳐 놓았다.

이런 불볕 더위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땅 위에 발붙이 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다 날려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태양과 지구 사이 어디쯤에서 시원한 폭발이 일어나 햇빛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지구가 날아가 버릴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으 로는 아무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 난 무얼 했던가… 제기랄! 아버지를 만났다. 이 지독한 무더 위에, 하필,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기막히게도 외로움이었다.

내가 터미널로 마중 나갔을 때, 아버지는 오래된 고목처럼 서 있었다. 넓은 와이셔츠 깃 사이로 햇빛에 그을린 까만 목이 빠져나오고, 그 위로 까만 주름 들이 말라붙은 깡마른 얼굴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 다. 살짝만 건드리면 와르르 부서져 내릴 것처럼 푸석푸석해 보이는 한 그루 의 까맣게 그슬린 고목 나무였다.

나를 발견하자 아버지는 축 쳐진 한쪽 팔을 약간 들썩이며 네가 찾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 는 신호를 보냈을 뿐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작은 키로 서 있던 아버지는 어디냐? 가자, 는 표정만 지 었을 뿐 아무말이 없었다. 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침묵을 사 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던 잠시의 시간동안 난 불쑥 외로움을 느꼈다. 아버 지와 나 사이의 그 짧은 거리에는 분명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떠다니고 있었 다. 어쩌면 그건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가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몰 랐다. 소유자가 불분명한 외로움이 더운 공기와 함께 내 얼굴로 확 끼쳐왔다.

나는 갑자기 밀려드는 알 수 없는 외로움도 분명 날씨 탓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곧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조 용히 뒤따라왔다. 아버지는 내가 걸음을 멈추면 따라서 멈추었고 걷기 시작하 면 다시 묵묵히 발걸음을 떼었다. 전철을 갈아타고 버스에 올라 경찰서에 도 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더위에 말을 잃은 사람처럼 침묵을 지켰다.

경찰서에 도착해 담당 형사가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가능하면 피해 자 측과 합의 보라는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 다.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할 정도로 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담당 형사 는 일목요연하게 말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동생이 얼 마나 큰 잘못을 한 건지, 행여 다치지는 않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건가에 대해 전혀 궁금한 게 없어 보였다.

담당 형사가 피해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적어 주었다. 나는 메모지를 집 어들었고 아버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와 나 그 누구도 동생을 만나보고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먼저 동생의 안부를 묻고 면회라 도 제안하기를 아버지는 바랬을지도 모른다. 옆에서 무관심하게 듣고만 있는 내가 내내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 때문에, 그것도 이런 무더위에, 내가 아버지보다 먼저 나서서 애간장을 태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동생은 당 신의 아들이었고 나는 그 아들중 하나일 뿐이었다.

한 마디 말없이 나서는 우리를 담당 형사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담당 형사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경찰서 정문을 벗어 나서야 아버지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자리 잡고 동생을 잘 돌봐줄 줄 알았다." "……" 등뒤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힘이 넘쳐서가 아니었다.

가는귀가 먹어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확인하기 위해 저절로 커지는 목 소리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가 생각하는 방식이 었다. 내 생각과 닮은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물과 기름처럼 전혀 다른 그야말로 아버지만의 생각이었다. 바깥의 세균이 아무런 여과 없이 무작정 피부를 통과할 만큼 동생이 얇은 막으로 둘러 싸여, 내가 세상의 온갖 못된 세균의 침투를 두팔 벌려 막으며 동생을 돌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된다. 동생은 건장한 체구에 얼마나 튼튼한가. 오 죽 건강하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고 철창 신세까 지 지겠는가 말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바싹 마르고 키만 멀대같이 커 허약해 보이 는 내 체구와, 영양실조 걸린 듯 창백한 얼굴에 쑥 들어간 눈을 보여주고 싶 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느새 내 어깨를 스치며 앞서가는 걸로 내 의도를 외 면했다. 아버지가 일으키고 간 더운 바람이 내 얼굴로 부딪쳐왔다. 나는 이마 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다시 돌아섰다. 하얀 색 와이셔츠 차림의 아버지 뒷모 습이 나와는 무관한 사람처럼 냉정하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동 생 일로 나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면, 그건 아버지가 잘못 생각한 탓이지 결코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를 외면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아버지는 잰걸음을 놀리며 벌써 저만치 앞서갔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아버지를 따라 잡았다.

내뱉듯 그 말 한마디를 꺼낸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입을 굳 게 다물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피해자 가족들이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가는귀 먹은 걸 다 아는 사람처럼 목청을 있는 힘껏 높였다.

나이 든 분에게 침을 튀기며 상스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피해자 가족의 빠 르게 움직이는 입술과, 그냥 흘려듣듯 무표정한 얼굴로 중간중간에 감정 섞이 지 않은 어조로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아버지의 메마른 입술을 번 갈아 확인했을 뿐,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 다음 아버지가 보일 행동이 어 떤 것일지 이미 나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듣기에 세상에 태어나 나쁜 생각이라고는 꿈도 꿔보지 못했을 그들의 천사 같은 자식이 겪었을 고통과, 마치 수천 명은 족히 상대했으리라 짐작될 정도 로 무지막지했을 동생의 폭력에 대한 과장 섞인 추궁이 끝나자, 마침내 피해 자 가족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지푸라기라도 건네듯이 슬그머니 피해보상금 문제를 꺼냈다. 아버지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 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보일 듯 말듯 고개를 숙 여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피해자 가족이 합의금 액수에 대해 흘러가는 말로 운을 떼었을 때, 아무런 대꾸도 않고 돌아섬으로써 아버지는 합의금을 줄 능력도 의사도 없음을 내비 쳤다. 이미 내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나는 묵묵히 아버지를 따 라 병원을 나왔다.

아버지는 그만한 합의금을 댈 처지가 못됐다. 그렇다고 악착같이 어딘가에 서 돈을 구해 이번 일을 합의보고, 동생을 빼낼 생각이라고는 애당초 없었을 것이다. 행여 지금 당장 그만한 돈이 있다고 쳐도 아버지가 합의를 해주었을 지,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럴 능력도 의사도 없으면서 이런 무 더위에 경찰서를 방문하고 굳이 병원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고스란히 이런 수모를 당할 바에는 도대체 무 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가 말이다.

정작 식구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한 번 꺼내본 적 없는 분이, 낯모르는 사람 들에게 그렇게 많은 사죄의 말을 쏟아 부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계면쩍어 하는 것처럼,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문을 나서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 떻게 해서든지 동생을 풀려나게 하려고 올라온 게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 된 사람으로서 자식에게 무슨 일이 있다기에 구색을 갖추기 위해 얼굴을 한 번 비춘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아버지의 위치감각,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치에 늘 그 자세로 서 있기만 하는 아버지의 그 무능력한 위치 감각을 나는 경멸했다. 오래 전 어머니가 죽어갈 때도 아버지는 자신의 위치 감각을 잃지 않았었다.

대학생이던 내가 다음 학기 등록금을 위해 동분서주 하다가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이 아니었다. 중간 과정이 모두 생략 된 채, 어머니가 오늘내일 하니 와서 임종을 지켜보라는 거였다. 기가 막혔 다. 소식을 듣고 시골로 내려간 나는 어머니가 불쌍했다. 음식물을 갈아 삭이 는 작은 위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한 어머니가 불쌍해서, 소의 반추위처럼 어머 니 위가 여러 개로 나뉘어져 그까짓 망가진 위 하나쯤 댕강 잘라내버릴 수 있 다면, 내가 얼마든지 되새김질 해 어머니의 입속으로 음식물을 넣어주고 싶었 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는다는 슬픔보다, 지금 이 자리로 나를 내몬 장본인이면 서도 저렇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에, 나는 치를 떨어야 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누렇게 뜬 얼 굴로 복통을 호소하다가, 그나마 뜬 한 숟갈의 음식물에도 구토를 하면서 방 바닥을 뒹구는 어머니를 옆에 두고 아버지는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무슨 생각을 하다가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허수아비처럼 두손 놓고 바라만 보는 병원으로 어머니를 데려갈 생각을 한 거란 말인가. 감기약 먹이 듯 약봉지 몇 첩 지어다 주는 걸로 자신의 역할은 끝난 걸로 생각하고 입안에 넣은 밥알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단 말인가… 나는 상제가 돼 조문객을 받으면서 아버지 발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길 게 늘어선 개미떼 행렬이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병풍 뒤편으로 까맣게 달려가 고 있었다. 그때 나는 병풍 뒷편 어디쯤에 개미지옥이 있어 그 안으로 미끄러 진 녀석들이 모두 개미귀신의 밥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아니, 내가 직접 지구상에 단 한 마리의 개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밟아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내 발에 새카맣게 밟히는 개미들과 함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까지 지끈지끈 밟아버리고 싶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인간의 타고난 본 성일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개미들만큼 사회적 본성을 타고난 생명체는 없었다. 그 말 속에는 무서운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개인의 삶과 인격 따위 를 집어삼키려 집단이라는 괴물이 커다란 아가리를 떡허니 벌리고 서 있는 거 였다. 그 괴물 중에 누구도 피하기 힘든 가장 무서운 놈이 바로 가족이었다.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내가 가족이라는 괴물의 아가리에서 나왔고, 안으로 연 결된 혓바닥처럼 그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아버지 는 시커먼 입구를 지키며 서 있었다. 그 무능력한 보호 아래서 어머니는 누렇 게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꼼짝없이 그 고통을 나눠가져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식구들에게, 아니 고생만 하다 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미안하다는 속죄의 표정을 지어 보였 다면, 어쩌면 그 순간 나는 그를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여가 나갈 때쯤 아버지의 멍한 표정은 이제 아예 평온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흙속에 묻으면서 까지도, 그렇게 평 온한 모습으로 서 있으면 남편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훌륭히 끝낸 거라는 듯, 그 순간까지 아버지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건 결코 상주의 모 습이 아니었다. 모든 생명 세포가 활동을 멈추어버린 어머니의 관 위로 막 흙 이 뿌려지는 순간, 아버지의 깡마른 얼굴에서는 생명을 더 활력 있게 만들기 위한 세포들의 평온한 죽음이 한창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 순간 자신의 평 온한 죽음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때의 표정은 그 자리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평온함이었다.

아버지는 늘 서 있던 그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유지된 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냥 무능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지금도 아버지 는 동생 일로 나를 원망하고 있을 터였다. 형의 도리로써 동생을 돌보지 못했 다는 질책을 함으로써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건 아버지의 욕심이었다. 무능력한 욕심. 한 걸음 성큼 다가서지도 물러서지 도 않고 그 자리만 지키면서 울타리 안에 누군가 있기를, 그리고 무언가 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욕심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묻으면서 결심했다. 절대 로 그 울타리 안에 갇힌 채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아버지의 욕심을 채워주지는 않겠다고. 내가 형이라는 이유로 동생을 돌볼 이유는 없었다. 만약 그게 아버 지가 바라는 거라면 나는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병원을 나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아버지와 나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 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마주 앉아 있던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서둘러 옆으로 시선을 비켰다. 아버지는 맥빠 지고 백내장 걸린 듯 부옇게 흐려 보이는 눈을 끔벅이면서, 이제는 네가 장남 노릇을 해야되지 않겠느냐, 는 표정으로 내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옆 탁자 위에 놓인 신문에 시선을 박았다. 반찬 국물이 덕지덕지 말라 붙은 신문지 바로 옆에서는 새까만 먼지가 들러붙은 보호망 안에서 선풍기 프 로펠러가 달달거리며 더운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아버지는 나 를 찾아와 지금 같은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불과 두 달 전에.

형이 죽은 건 두 달 전이었다. 그 날 나는 형과 함께 있었다. 회사 근처 작 은 주점에서 동그란 철제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형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내 가 빈 잔에 소주를 채워 주었을 때, 형은 잠깐 전화를 걸고 오겠다며 가게 밖 으로 나갔다. 잠시후 밖에서 귀에 거스르는 자동차 급브레이크 소리와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올 때까지, 술잔 속의 소주는 형이 탁자 위에 내려놓을 때 받은 충격을 미처 벗어나지 못한 채 작은 흔들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후를 기 약하며 밖으로 나갔던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내가 채워준 술잔을 영영 마시지 못할 운명이었다. 부러울 만큼 당당하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났 고, 가족보다 더 큰 사회와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위해 일찌감치 자신의 안녕 을 포기했던 형이, 기껏해야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나는 영 믿겨지지 않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위해 가족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만큼 단호했던 형은 좀 더 멋있게 죽었어야 했다. 그게 투사였던 형한테는 어울렸 다. 재수가 없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그런 흔한 죽음이 형에게는 웬지 어색해 보여,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도 나는 형의 죽음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내게 형의 부재를 실감케 해준 건 아버지였다.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후, 아버지는 불쑥 내가 다니고 있던 인쇄소를 방문했 다. 오전에 내리던 비가 그치자, 나는 밖에 쌓아 두었던 광고지 위에 덮인 포 장을 걷어내고 주문한 물량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허름한 쥐색 양복에 작 은 체구가 인쇄소 안으로 느린 걸음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여겨보 지도 않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 사람이 아버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쌓여 있던 광고지 물량을 확인하기 위해 쭈그려 앉으며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잠시후, 그 허름한 양복바지가 바로 내 코앞에 와 멈추었 다. 바지 양옆으로는 갈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구식 우산과 청주 한 병이 나란히 들려 있었다. 순간 나는 언제나 아버지 주위에만 가면 내 목을 옥죄여 오고 나를 멀어지게 만드는 불길한 힘에 놀라 선뜻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 코앞에서 멈춘 바지는 움직일 줄 몰랐다. 우산 끝으로 모인 물방울들이 바짓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옷 속으로 슬그머니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삼형제를 낳았다.' 내가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그런 것이었다. 삼형제를 낳았고, 이제 장남을 잃었으니, 네가 그 역 할을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 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식 맡겨놓고 인사 한 번 못 드렸다." 아버지는 자식 맡겨놓고 사장에게 인사 한 번 제대로 못한 아비로서의 명분 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명분 뒤에 숨어 있는, 형을 잃고 이제 내게 장남 노 릇을 요구하겠다는 아버지의 뻔뻔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밖으로 나돌던 형 은 동생과는 다른 이유로 뻔질나게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그 생활은 아버지와 의 관계에 초연했던 형이 선택한 자신의 숨통을 트이게 만드는 가장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형이 장남 노릇을 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형이 없다는 이유로, 형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장남의 몫을 내가 물려받아야 한다는 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나는 일어서며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학교도 아니고 월급 주고받는 회사에 서 부모까지 나설 필요 없고, 또 요즘 세상에 직장에 찾아와 자식을 부탁하는 사람은 없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아버지를 만류했다. 다행히 사장은 거 래처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내 행동은 충분히 명분도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넘보기에 애비가 부끄러우냐?" "……" 색바랜 양복 끝에서 시작됐다가 내 어깨쯤에서 끝나는, 이마와 눈가에 잡힌 까만 주름 사이로 금방이라도 마른버짐이 떨어져 내릴 것처럼 말라붙은 아버 지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장이 거래처에 가고 없다는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로 아버지는 충분히 자식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서고, 회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정문을 지나다, 들어오 는 승용차를 피해 잠시 옆으로 비켜 설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 러서지 않고 굳건히 내 자리를 지켰다. 내가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 딛은 건, 사장을 태운 승용차가 회사 입구에 고인 물웅덩이를 세차게 밟으며 정문을 들어설 때였다. 승용차는 속력을 늦추지 않은 채 주차장으로 달려갔 고, 그 뒤로 아버지는 승용차가 튀긴 물벼락을 맞고 서 있었다. 아버지의 쥐 색 양복에서는 흙탕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는 물기를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축 쳐진 양손에 우산과 청주 한 병을 든 채로, 마치 그게 내 탓이라도 되는 양 정지된 한 장의 흑백 필름처럼 꼼짝도 않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내가 정문 쪽으로 어정쩡한 발걸음을 떼어놓으려 할 때, 정지했던 흑백 필 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천천히 돌아서서 회사 밖으로 나갔 고, 아버지의 뒷모습이 정문 기둥 뒤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가 잠시 자신의 위치감각을 상실한 아버지가 내게 한발 성큼 다가온 사 건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그 동안 자신이 유지해왔던 무능력한 위치감 각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무능력을 대신해 나에게 적극 적으로 개입해 들어오라는 강요였다. 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발 뒤로 물러섬으로써 그 거리를 유지했다. 아버지가 선택해서 만들어 왔고 스스로 초래한 울타리였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내가 끼지도 않았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얽혀 들어가야 하고, 이제는 장남 노릇까지 해야한다는 아버지의 요구를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형이나 동생만큼 초연한 자세로 내 삶을 선택하고 거기에 몰두할 권리가 나한테도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 식당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를 향해 고정된 선풍 기에서는 다르륵거리는 소음이 유난히 크게 났다. 그 소음에 섞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은 어떻게 사느냐?" "……"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연신 훔치고 코를 훌쩍거려가면서 뜨거운 국물에 열심히, 그리고 자신감 있게 숟가락질을 했다. 대답대신 이렇게 무더운 날씨도 아랑곳 않고 꿋꿋이 잘 살고 있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대답이 없자 아버지 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식탁 위로 고개를 숙였다. 더운 바람을 뿜어대던 선풍기는 간간이 온 몸을 떨면서 위아래로 머리를 들썩였다.
그럴 때면 보호망에 달라붙어 있던 새까만 먼지가 금방이라도 식탁 위로 쏟아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식탁 위 로 흙탕물이 한 바가지 쏟아져도 개의치 않겠다는 자세로 한 번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식탁만 내려다보며 느린 동작으로 젓가락질을 계속 했다. 나는 눈을 들어 힐끗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숟가락질을 계속 했다.

나는 두 달 전에 인쇄소를 그만두었다. 아버지에게는 그만둔 지 한 달이 지나서야 회사가 부도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뒤따를 지도 모르 는 아버지의 추궁과 참견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건, 아버지가 인쇄소를 다녀간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 날 사무실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거래처에서 주문한 물량이 맞지 않는다는 연락이 온 거였다. 내가 광고지 5만장을 확인하고 보냈는데 그 업체에서는 5천장을 주문했기 때문에 그 값밖에 지불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사장이 직접 거래처에 들렀 다가 연락을 해오는 날은 종종 그런 일이 발생했다. 그런 일에 익숙한 직원들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담당자를 찾으면 불려가 공손히 잘못 했다는 말을 하고 주의하겠다는 다짐으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사무실 사람들이 다 듣는 데서 불쑥, "사장님이 보낸 팩스에 5만 부로 되 있는데요." 만약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면 아버지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사장의 실수를 언급하고 말았다. 다른 날 같았으면 다른 직 원들처럼 조용히 내 잘못이라고 거짓 시인을 하고 넘어갔을 일에, 그 날은 왜 갑자기 내 혀가 굴러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혼잣말이 아니라 사무실에 공표라도 하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사장과 영업이사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주위 직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야 나는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가를 알아챘다. 직원들의 긴장된 표정에는, 사장이 한 실수는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실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짙은 우려가 깔려 있었다. 도대체 인간이 언제부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직원들의 표정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인간의 조상이 원망스러웠다. 가능하다면 머나먼 과거로 달려가 막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하는 유인원을 목졸라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당장 내 혀라도 싹둑 잘라내, 피를 뚝뚝 흘리는 빌어먹을 혀를 손바닥 위로 올려놓으며 요즘은 이게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그만 잘못 굴러간 거라고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를 더 견딜 수 없게 만든 건, 자신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연발하는 사장의 얼굴 위로, 전날 사장의 승용차가 튀긴 물벼락을 맞고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왜 하필 그 순간에, 마치 내가 아버 지가 당한 사소한 일에 복수라도 하기 위해서 지금 말도 안되는 일을 가지고 사장에게 대들고 있다는 듯이 그 광경이 떠올랐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나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나는 곧장 며칠전 사장이 보냈던 팩스 사본이 들어있는 서류철을 꺼내왔다. 소동을 일으킨 업체의 주문 물량이 다른 거래처 주문 물량과 함께 제일 아래 칸에 깨알같은 글씨로 '50000장'이라고 휘갈겨져 있었다. 나는 그 사본을 사장과 영업이사 코앞으로 펼쳐 보였다. 이것 봐 라, 맞지 않느냐, 내가 아버지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 말이 틀렸느냐, 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서류철 을 들고 있는 내 손은 떨렸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내가 책상 위를 뒤지고, 찾고 있던 서류철을 꺼내 펼쳐들며, 그들 앞으로 들이밀 때까지, 묵묵히 내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서류철을 그들 앞에 떨구면서 돌아섰다. 서류철이 풀어지면서 낱장 사본들 이 사무실 바닥으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사무실 분위기는 숨죽인 듯 조용했다. 나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왔다. 아버지가 인쇄소를 방문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지금 아버지가 어떻게 사느냐? 라고 물은 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왜 사느냐? 라고 물었다면 뜻밖의 질문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나는 당황했을 거고, 게다가 그 질문을 아버지가 했다는 이유로 변명하듯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거기에 답변하려 기를 썼을 것이다. 하지 만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됐다. 왜 사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 이만큼 살아온 아버지라고 해서 왜 사는지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밥을 깨끗이 비우고 물을 마시는 동안, 이미 수저를 내려놓은 아버지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안 봐도 어떻게 사는 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속이라도 들여다보듯이 유심히 나를 관찰하던 아버지는, 빈 그릇에 눈길을 한 번 주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 어났다. 문가에 있는 카운터로 천천히 걸어간 아버지는 밥값을 계산했다. 그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달려가 돈을 꺼내는 아버지의 손을 막으며, 나는 잘 살고 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까짓 직장이야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다, 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열려진 식당문 안으로 비춰오는 새하얀 뙤약볕 아래로 다시 나서느니, 더운 바람일망정 잠시라도 선풍기 앞 에 앉아 있는 게 나았다. 벌써 그 뙤약볕 아래로 한 발 들여놓고 있던 아버지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이제는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느냐는 표정으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 탁자에 놓여 있던 신문지가 펄럭거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전철을 타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번 달구어진 몸은 쉽게 식을 줄 모르고 땀방울을 밀어냈다. 등에 달라붙는 셔츠를 뜯어내느라 나 는 자꾸만 등뒤로 손이 갔다. 내 곁에 바싹 붙어 전철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키 작은 모습이 창문에 비쳤다. 아버지는 몸에서 나 는 열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와의 거리를 떼어놓지 않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와 전철역까지 오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내게서 틈을 벌리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아버지의 느린 걸음을 기 다리는 수고는 생략해도 됐다. 걸음을 조금만 빨리 해도 아버지는 거의 뛰는 듯한 걸음걸이로 내게 반응했다. 마치 조금만 거리를 두면 길 가에 자신을 떼어놓고 내가 도망이라도 칠 것처럼.

나는 등에 달라붙는 셔츠를 연거푸 뜯어내며 창문에 비치는 아버지 얼굴로 눈길을 주었다. 아버지는 벌써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악 착같이 나를 따라붙을 때와는 달리, 이제 달리는 전철에서야 네까짓게 어쩌겠느냐는 듯, 아버지는 창에 비친 내 모습을 외면하려 일부러 눈을 감고 한숨이라도 돌리는 것같은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덜컹거리는 전동차의 진동에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버티고 서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씩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왜 아버지를 만나 이런 무더위와 싸워가며 고생스럽게 돌아다녀야 하는 건지, 게다가 등뒤로 손을 뻗느라 자꾸만 흐트러지는 내 자세와는 달리 더운 내색 한 번 않고 침착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여유 있는 모습에 그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등에 달라붙는 셔츠를 뜯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던 팔 동작을 멈췄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두꺼운 천 조각 하나가 등에 찰싹 달라붙는 것처럼 불쾌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했다. 전화가 문제였다. 어제의 그 잘못 걸려온 전화… 그 전화만 받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나올 일도, 아버지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제 걸려왔던 두 통의 전화 를 원망하며, 다시 거친 동작으로 등에 달라붙은 셔츠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처음 전화는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경찰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단박에 잘못 걸려온 전화임을 알았다. 곧바로 잘못 걸었다는 말을 해주 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었다. 담당 형사라는 사람이 동생 이름을 들먹이며 보호자 분이 나와주셔야겠다고 했을 때, 당신네들이 무언가 착 오를 일으킨 모양인데, 그럼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어야지 나한테 전화를 건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따졌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무런 반 응도 없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뜨거운 열기에 녹아 내린 전화선에 문제가 생겨 잘못 연결된 전화일 수도 있었 다. 행여 그런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르니 다시 한 번 걸어보라는 식으로, 나는 시골집 전화 번호를 또박또박 불러주고는 전화를 끊어버렸 다. 그리고 더 이상 전화가 울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부질없는 희망에 쐐기를 박듯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 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짧게 자신의 용건만 말했다.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보다 더 무뚝뚝한 어조로 아버지는 새 벽 첫차를 끊었다는 말 한마디를 남겼고, 미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딸칵 하고 전화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로 전화 를 했는지, 몇 시에 도착할 건지, 마중을 나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 지, 아버지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알아, 그 말 한 마디면 내가 모든 사태를 단박에 이해하고 척척 알아서 움직일 거라는 듯, 아버지의 전화는 간략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아버지와의 만남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은 너무 간략해서 내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나는 두 번째 걸려온 그 전화 역시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느꼈다. 보호자가 나와야 한다는 담당 형사의 요구와, 새벽 첫차로 올라오겠다 는 아버지의 통보는 딱 들어맞는 대화였다. 그 둘간에 이어져야 할 전화선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 사이 에 불필요하게 끼여들게 되었고, 지금 이렇게 가까이서 아버지의 체온까지 느끼고 있는 거였다. 이 여름의 무더위만 아니었다면, 힘이 남 아돌아 주체하지 못하고 망나니처럼 돌아다니는 동생이 또 화를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는 일도, 어딘가에서 전화선이 녹아 내리는 일 도, 내 방의 전화기가 두 번씩이나 울어대는 일도, 절대 없었을 것이다. 슬픈 여름이었다.

전철이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3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나는 맞은편 창문 안에 있을 아버지를 찾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 다. 창 속에서 나만 홀로 오른 손을 든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잠시후에야 눈에 익은 아버지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얗 게 센 머리에 검은 빛깔을 띠는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섞여 헝클어진 머리였다. 아버지는 어느새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번 역에서 내린다는 눈짓을 보내려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로 졸고 있었다. 내 시선이 닿자 고개가 옆으로 떨구어지며 아버지 의 몸이 막 기울기 시작했다. 옆 사람이 일어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때 마치 내 생각을 시험해보겠다는 듯,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힘없는 모습으로 쓰러져갔다.

"내려야 되요."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행여 내 목소리를 못 들었을까봐, 나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여기서 내린다는 말을 해주었다. 잠시 눈을 끔벅이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버지는 곧 일어나 출입문 옆의 기둥을 붙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기둥을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졸음보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벽부터 올라오며 쌓였을 피로감이, 나와 함께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가속도가 붙어 누적되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의 표정은 무거워보였다.

나는 가능한 느린 걸음으로 3호선 승강장으로 갔다. 아버지는 이제야 자신의 정상적인 보폭을 되찾았다는 듯이 나와 한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었다. 마치 서로 호흡을 맞추어 걷기라도 하듯 아버지와 나는 발을 맞추어 걷고 있었다. 3호선 승강 장에 도착해 내가 멈추자, 아버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아버지는 강남 방향의 전철을, 나 는 불광동 방향의 전철을 타면 됐다.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강남 터미널까지 아버지를 배웅해 줄 생각이었 다. 한 걸음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서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버지는 깃이 누렇게 변색된 와이셔츠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더니, 갑자기 지갑을 꺼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의 행동에 놀란 내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까만 색 지갑에서 만원 짜리 몇 장을 꺼낸 아버지는 불쑥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헤어지기 전에 악수라도 할 듯 이 쑥 뻗은 아버지의 손이 내 앞에 와 멈추었다. 네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안다, 이제 네 갈 길을 가라, 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내가 화가 난 건 아버지의 지레짐작하는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 하나 지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을 것처럼 왜소한 모습 으로 서 있던 아버지가, 다 큰 자식에게 용돈을 내밀고 있다는 그 상황이 너무나 한심스러워서였다. 내가 무슨 밑바닥 인생으로 추락이라 도 해, 이런 식으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비 가슴이 찢어지고 자식이 굶어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돈이라면 지금 당장 내 주머니에도 아버지를 시골까지 택시로 모시고 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이 들어 있었다. 무례했다. 어떻게 다 큰 자식에게 용돈 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유난히 희게 보이는 아버지의 하얗게 센 머리를 보며 난 잠시 치욕감에 이를 악다물 어야 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받아 두어라." "… 돈 있습니다." "허 참 받아두라니까." "……" 손톱이 뭉그러지고 딱딱하게 달라붙어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린 아버지의 손안에는, 푸른빛을 띠는 만원 짜리 몇 장이 무겁게 들려 있었 다. 나는 아버지의 바지춤 아래로 시선을 떨구어야 했다.

부모품에서 자란 동물은 성장하면 아무런 미련 없이 그 품을 떠나 당당하게 먹이사슬의 경쟁자가 되었다. 내게 가족의 의미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먹이사슬로 걸어 들어가기 전에 불가피하게 머물렀다 서둘러 빠져나와야 하는 곳. 나는 대학에 들어간 후로 한 번도 집안에 손 을 벌려 본 적이 없었다. 사정이 어려워지면 학교를 휴학했지 집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경제적 독립은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홀로서기를 하는 한 아버지가 아니라 그 누구도 내 영역을 침범해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아버 지가 손을 내밀고 있는 거였다. 이제와서 나를 무시할 작정을 했거나, 아니면 내 생각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동안 지켜온 내 영역을 침범하 겠다는 사악한 심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터미널까지 아버지를 배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불광동 방향의 전철이 승강장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물러설 줄 모르고 여전히 아버지와 나 사이에 버티고 있는 아버지의 거친 손을 노려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어쩌면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아니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불광동 방향의 전철이 도착하자, 나는 부리나케 돌아서서 도망치듯 전철에 올랐다. 내리려는 사람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무작 정 옆 차량으로 걸어갔다. 아버지와 가능한 멀어지고 싶었다. 맞은편 전철도 막 승강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방향의 전철 을 타고 헤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무작정 전철 안으로 걸어가던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순간 불쑥, 지금쯤 아버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가 궁 금해진 것이다. 돈을 손에 쥔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 아니면 지갑에 돈을 넣고 돌아서서 도착한 전철에 올랐 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상황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했을지, 예전처럼 쉽게 짐작이 되지 않는 거였다. 순간, 나는 방향을 바꾸어 막 닫히려다 다시 열리고 있는 출입문을 통과해 전철에서 내렸다. 나를 내려준 전철은 곧 출 입문을 닫으며 출발했다.

나는 승강장 기둥에 몸을 가리고 조금 전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를 살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곧 강남 방향으로 가는 맞은편 전철이 출입문을 닫으며 출발했다. 나는 막 움직이기 시작하는 전철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정말이지 비명이라도 지 를뻔 했다. 전철 안에서 아버지가 손잡이를 잡고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아버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할 수만 있다 면 내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눈빛은 원망하는 눈빛도, 경멸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연민이 가득 담긴 슬픈 눈으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가장 슬퍼지는 건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의 표정을 확인할 때였다. 아버지는 그걸 다 아는 사람처럼, 내게 너무나 선명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버지를 태운 전철은 너무나 느리게 움직였다. 더운 날씨에 쇠바퀴가 눌러 붙기라도 한 듯 천천히 움직였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있어야 했다. 정지한 듯 느리게 움직이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근원을 알 수 없는 한 개의 작은 알 에서 깨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철저히 혼자였다면, 누군가의 표정에서 슬픔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없 었을 테니까 말이다. 여느 짐승처럼 자신을 동정하지도 않고, 자신이 슬프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철 꼬리가 터널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에도, 나는 한동안 승강장에 선 채로 터널 속 어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의 슬 픈 눈빛이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것만 같은 터널 속 어둠은, 아버지와 헤어질 때마다 느끼는 암담함만큼이나 깊었다. 승강장 기둥에 손 을 짚은 채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길 때까지, 머리 위 환기구에서는 더운 바람이 쉼없이 내뿜어지고 있었다. 나는 어 딘가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멍하게 눈만 뜬 채 승강장 안을 맴돌았다. 발걸음을 멈추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어린 아이처럼 엉 엉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아,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넋나간 사람처럼 승강장 안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전철역을 빠져 나 왔다.

밖으로 나오자, 새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눈이 따끔거렸다. 햇볕 아래로 발을 들여놓은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희부연 열 기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사방에서 아른아른거리고, 그 사이로 길을 가득 메운 차와 상가 건물이 흐물거리며 지나쳐갔다. 한낮의 거리에 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인적이 뚝 끊겨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꽂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에 심한 통증이 일어서야, 나는 무작정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온 몸은 땀투성이였다.

나는 양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뜨겁게 달궈진 후라이팬 위에서 순백색으로 익어가는 달걀 흰자위처럼 새하얀 해가, 세상을 달구려 몸부림치는 혹독하고 사나운 열기를 쏟아부으며 하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햇빛 사이로 날아가던 작은 새 한 마 리가 까만 음영을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그렇게 해를 마주한 채 움직일 줄 모르고 길거리에 서 있던 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렇게 아버지와 헤어져, 나는 이제 영영 혼자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그 순간 나는 온 몸이 떨리도록 심하게 진저리를 쳤다. 모든 땀구멍이 일시에 활짝 열리기라도 한것처럼 내 몸은 다시 흥건히 젖어갔다. 지독한 폭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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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동아08)

대한민국 신춘문예/영화평론 2008/11/08 20:32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 뮤지컬학부 교수)
올해는 예년에 비해 평론 응모작 수가 부쩍 줄어 20여 편에 불과했다. 이는 한국영화의 전반적 침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상당수가 이창동의 ‘밀양’을 평론 대상으로 삼았다. 기존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내가 다른 시각으로 읽어내겠다’는 창의력으로 꿈틀대는 글이 그리웠다.

최종 검토대상에 오른 글은 세 편이었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에 대한 논문과 ‘별빛 속으로’에 대한 단평을 쓴 이수정은 단정한 문체와 차분한 논리전개가 돋보였지만 다소 교과서적인 시각이었다. ‘밀양’에 대한 논문과 ‘우아한 세계’에 대한 단평을 쓴 최남현도 논리전개가 튼튼했지만 보편적인 인문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지아장커와 홍상수에 대한 논문과 ‘밀양’에 대한 단평을 쓴 이나라가 가장 돋보였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에 연출된 풍경의 여백과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체계적으로 의도된 풍경의 부재에 관해 예민한 시각적 감식안으로 파고들었다. 창작자의 관념이 시각적으로 육화되는 방식에 주목한 점에서 이나라의 글을 넘어서는 것이 없었다. 다만 단평감각은 아직 미숙해 당선작으로 내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이는 모든 응모자들에게 해당되는데 간결하게 원고지 10장 분량의 글로 독자를 설득시키려는 열정과 준비가 모자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10장 분량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70장 글을 쓰는 것 이상의 준비와 요령이 필요하다.



이 나 라
△1973년 서울 출생
△1998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2002년 서울대 미학과 석사
△2005년 프랑스 뚤루즈 2대학 영화과 DEA
△2007년 프랑스 파리 1대학 영상미학 박사과정 재학 중

나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살아본 적이 없다. 주변에는 나를 극장에 데려가 줄 어른들이 없었고, 그나마 TV의 옛날 영화들을 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말의 명화보다 소소한 한국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영화광들에 둘러싸여 소위 어려운 영화들을 보며 영화를 처음 배웠다. 영화 속에서 세상을 배우기보다, 세상 속에서 영화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더랬다. 그래서 영화는 늘 내게 세상보다는 둘째 가는 것이었고, 오락이기엔 너무 어렵고 진지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기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통에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 고백은 더디고 수줍기만 했다.

몇 년째 거주하고 있는 파리 골목 골목의 낡은 극장들을 들락거리며 낡은 할리우드 영화나 모르는 세계 저편에서 온 영화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 작가들의 영화들을 만난다. 이 끊임없는 만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이제 더 당당하게 영화에 대한 사랑, 영화가 내게 사유하도록 한 것들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극장 출입이 몇 번 없으셨지만, 영화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주시고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먼 곳에서 다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글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 배움의 어려움과 가치를 일깨워주신 학교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 파리의 거의 모든 골목과 극장들을 하나하나 알게 해 준 티에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
단평·그 여인의 등 뒤에서 -이창동의 ≪밀양≫에 관하여
                      - 이 나 라


장평·죽은 풍경들의 시간과 죽은 시간들의 풍경-지아 장커의 경우와 홍상수의 경우


0. 익숙한 풍경에 맞서다.

지아 장커와 홍상수는 익숙한 영화의 풍경내지는 풍경을 재현하는 익숙한 영화적 방식에 의문을 표시하는 감독이다. 이들은 자연이나 도시의 풍경을 안정된 깊이감을 지닌 영화적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이들의 장면 구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시종 일관 넓은 범위를 담아내는 롱 샷으로 산시성, 북경, 삼협의 '어떤'풍경을 잡아내는 반면 홍상수의 영화에선 방 구석의 카메라가 잡아내는 어정쩡한 자세의 육신들이 풍경을 대신하기 일쑤이며, 집 밖에 나선 등장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세계의 풍경을 좀체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관광지로, 옛날 여자 친구가 사는 주변 도시로,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이 두 감독은 각각 ≪죽은 풍경≫ 속에 흐르는 시간을 찍어내려 하거나 (지아 장커의 경우),≪죽은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찍어내려 한다. (홍상수의 경우) 이들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근대적인 의미의 ≪풍경≫ 개념, 고정된 주체의 눈 앞에 펼쳐진 대상으로서의 원근법적인 풍경에 맞서는 영화적인 대결을 벌인다.

1. 여백의 풍경과 풍경의 부재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의 한 장면과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의 한 장면을 우선 겹쳐 보자. ≪스틸 라이프≫ 속 산밍과 센홍 (그리고 다큐멘타리 ≪동≫ 속 화가 리우 샤오동) 은 모두 산샤 언저리에서 이 곳의 풍경을 바라본다. 물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샤의 풍경은 중국 전통 산수화마냥 화면의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기며 인간을 압도하는 풍광을 드러낸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와 그의 선배 역시 댐공사로 만들어진 춘천 소양강호 풍경을 바라보며 전망대에 서 있다. 평평한 앵글로 찍힌 롱 샷은 소양강호의 풍경을 배경에 깔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부분에 두 남자의 뒷 모습을,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부분에 여대생의 뒷 모습을 배치하고 있다.

산샤 계곡의 여백은 평소 지아 장커가 즐겨 담는 여백과 다른 듯 닮아 있다. ≪임소요≫에서 차오 차오가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로 질러 걷는 빈 터 역시 황량하게 버려진 여백의 공간이다. ≪플랫폼≫에 등장하는 옛 성곽 역시 어떤 형태를 지닌 구조물의 역할을 하기보다, 여기에 기대 선 등장인물의 뒷면을 채우는 무차별적인 평면이다. 이 성벽은 인물 뒤에서 공간을 가득 메우지만 관객은 오히려 이 전면적인 평면 탓에 등장인물들을 빈 공간에 존재하는 형상들처럼 지각하게 된다. 동양의 산수화에서 여백은 의도적으로 비워진 공간이고, 산과 물을 이어주는 기가 흐르도록 하는 긍정적인 공간이다. 반면 서구의 공간론이나 시각 구성의 역사에선 이런 긍정적인 여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빈 공간(진공)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그에 따르면 진공이 존재한다면 사물이 방향을 잃고 모든 방향으로 흐르고 뒤엉키는 무한한 혼란의 상태에 빠질 것이므로, 우리는 세계의 질서, 코스모스를 인정하는 한에서 진공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지아 장커가 구성해내는 여백은 세계의 흐름이 멈춰 선 고요한 지점이 아니다. 이 여백은 항상 세계의 혼돈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철학자들이 세계를 질서 지워진 공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세계에서 배제한 빈 틈, 빈 공간이 바로 지아 장커가 표현하는 여백이다. 나는 이 여백을 질서 잡힌 세계의 풍경에서 배제된 ≪죽은 풍경≫, 세계가 죽은 것으로 간주한 풍경이라 칭할 것이다.

다시 소양강 앞으로 돌아와 보자. 언뜻 보아 호수를 앞에 둔 두 남자와 한 여자는 모두 풍경을 '완상'하고 있는 듯하다. 십 초 가까이 지속하는 이 샷의 다음 샷은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의 정면 샷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관객-가 화면 뒤쪽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이들이 풍경 대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은 홍상수가 어떻게 의도적으로 풍경을 자신의 영화에서 지워내는가,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풍경의 부재를 목도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홍상수가 작심하고 풍경을 (찍기를/보여주기를) 거부하는 감독이라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영화는 대체로 집을 벗어나서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옆집 화단에 심어진 채소의 짧은 클로즈업에 이어 주인공이 옥탑방 문을 열고 햇살 아래로 나와 집 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을 세세히 보여주며 시작한다. 집 밖에 나선 존재들의 피곤함,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인물들은 ≪죽은 시간≫을 살고 있고, ≪시간을 죽이려≫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온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꼬셔 여관방을 들락거리며, 길 위에서 택시를 잡는데 세월을 소모할 뿐 도통 도시의 풍경이나 자연의 풍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집 안과 집 밖, 이곳과 저곳, 이 여인의 몸과 저 여인의 몸은 매양 한 가지여서, 이들은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지아 장커의 영화가 죽은 풍경(여백)을 통해 질서잡힌 공간 밖의 혼돈과 생기를 보여준다면, 홍상수의 영화는 죽은 시간의 반복을 통해 풍경의 부재를 보여준다. 부재를 보여주기, 이것은 다시 말해 부재하고 있는 것의 프레임화이다.

2. 들끓는 여백 또는 프레임의 밖

여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아 장커의 화면은 전통 동양 산수화의 화폭을 닮았으면서도 이를 넘어 선다. 우선 그는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고 시점의 중심을 만들어내는 서구 풍경화의 전통(이는 회화뿐 아니라 영화 등 시각 이미지 구성에서 하나의 규범이 된다. )과 확연히 구분되는 화면 구성을 위해 지평선이나 수평선의 설정을 피하는 산수화의 기법을 가져 온다. 이는 ≪스틸 라이프≫ 속 샨사의 묘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영화가 산밍이 탄 배 ≪세계≫호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호에 승선한 인민들의 육체를 흩어가던 수평 트래킹은 배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산밍을 잡아내고, 산밍의 뒤편 열린 공간 사이로 산샤가 내다보인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의미에서 풍경을 대하는 지아 장커의 태도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첫째로 강을 따라 흐르는 배 위에서 산샤의 풍경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풍경은 고정된 자리를 가진 주체의 시선이 관찰해 낸 상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지아 장커의 영화에서 풍경은 단 한 번도 정지된 자가 바라보는 정지된 세계의 풍경이었던 적이 없다. 세계의 풍경은 늘 배, 버스, 트랙터, 모노레일, 오토바이 위에 올라탄 사람들의 시선으로 목격되었고, 이 풍경들은 늘 흐트러져 있다. ≪임소요≫ 도입부의 부산한 거리 풍경-달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들, 길을 걷는 행인들의풍경-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빈빈과 '함께' 시작한다. 원신 원샷의 정적인 화면으로 유명한 그의 영화 ≪플랫폼≫ 역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고자 밤버스를 탄 단원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고, 영화 내내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떠도는 문화 선봉 대원들과 이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요동치는' 풍경을 보여준다. 영화 ≪세계≫에서 여 주인공 타이셍은 세계 공원 내의 모노레일을 타고 공원 내에 축소 전시된 모형들 사이를 지난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거나 모노레일의 속도감 속에서만 비현실적인 공원의 풍경을 지각해 낸다. 벤야민은 사거리에서 돌진하듯 달려오는 차량이 주는 충격 체험을 영화의 지각 체험에 비교한 바 있다. 영화의 태동은 넘쳐나는 시각 이미지-사진, 광고, 포스터 등-들을 빠르게 변화하는 운동 상태 속에서 지각하면서 예지되었다. 다만, 이 때 속도를 체감하며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의 도래를 목격한 인물들이 길을 걷는 산보자였다면, 지아 장커의 영화 속에서는 지각 주체 자신이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있다. 주체는 세계에 대한 투사를 시작할 고정된 자리를 잃어버리고, 세계는 움직이는 주체,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에 흐트러진 풍경을 선사한다.

둘째로, 이 장면은 풍경과 인물의 공존을 보여 준다. 본래 중국 산수화는 조화로운 자연을 나타내는 것을 큰 이념으로 하고, 이 산수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을 드러낼 때는 인간의 감정과 자연 풍광이 하나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려고 애쓴다. 덧붙여 큰 스케일의 산수를 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산수화는 전경의 작은 부분에 인간 혹은 인간사 풍경을 덧붙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크게 보아서는 인간사의 세밀한 풍경을 담아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아 장커는 영화의 제목을 ≪스틸 라이프≫, 곧 정물이라 붙이고, 산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정물처럼 그려낸다. 이는 서로 다른 스케일-원경으로 표현해야 하는 풍경과 근경에서 세밀하게묘사해 내야하는 인간세계-과 이념으로 인해 동시에 주제화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풍경과 인물, 풍경과 정물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표현해내려는 야심 찬 의도의 반영이다. 또한, 지아 장커의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풍경은 산수화에서와 달리 주인공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

지아 장커가 풍경과 정물을 나란히 놓으면서도 대조하는 영화적인 수단은 리듬이다. 풍광과 이 풍광 '내'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정(靜)과 동, 짖고 부숨의 대립적인 리듬과 작용으로 그려진다. 기어이 재회한 산밍과 아내가 부서진 건물 실내에 쭈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이들 뒤 부서진 틈으로 바깥 공사장의 풍경이 보인다. 이 때 세계의 풍경은 반듯한 프레임 속에 들어 있지 않고, 곧 무너져 내릴 건물 외벽의 울퉁불퉁하게 벌어진 틈 사이에 들어 있다. 이 흐릿한 틈이 바로 지아 장커의 여백인 셈이다. 이 여백은 때로 화면 전체에 넘쳐 나기도 한다. 앞서 밝혔듯, 서구 풍경화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기준으로 원근법 적인 공간의 중심을 설정한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탄생'한 장르이자 용어인 풍경화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땅, 또는 하늘과 바다를 갈랐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로프≫에 등장하는 지평선 없는 대지의 풍경, 거스 반 산트의 영화 ≪엘레펀트≫에 등장하는 하늘의 풍경은 이런 원근법적인 공간의 규범을 흔드는 이미지들이다. 이들은 화면 전체에 넘쳐나는 여백, 프레임을 넘어서는 무균질의 카오스, 죽은 풍경들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아 장커는 공사장의 돌무더기를 찍어 낸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돌무더기는 ≪플랫폼≫의 성벽, ≪임소요≫의 공터의 평평한 이미지와 공명을 이루어 낸다.

3. 풍경의 소거 또는 텅 빈 프레임

지아 장커가 산수화를 차용하고 극복하며 여백, 반풍경을 통해 풍경에 대한 근대적인 규범을 거스른다면 홍상수는 풍경 자체를 소거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일의 불가능함을 피력한다. 일례로 ≪스틸 라이프≫가 건물 외벽이 만들어 내는 울퉁불퉁한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구획 짓는 네모 반듯한 프레임 자체의 형식에 의문을 표한다면, 홍상수는 프레임을 벗어난 풍경을 보여주기보다, 프레임 자체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사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 속 장면을 비교해보자. 지아 장커는 차 속에 앉아있는 인물을 창을 배경으로 찍어내는 것을 즐긴다. 반면, 홍상수가 즐겨 찍는 샷은 앞좌석과 뒷좌석의 교환 샷이다. 지아 장커에게 창은 세상을 보여주는 열린 틈인데, 홍상수에게 창은 아무런 내용을 담지 않은 프레임이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타고 있어도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의 인물들은 어쩌면 안과 밖의 구분 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공간을 내부와 외부, 둘로 구분하여 나누는 자명한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 이 구분이 (근대 사고의) ≪기하학적 규범≫에 길든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공간을 내부와 외부로 구분하여 사고하는 대신 내부와 외부를 변증법적으로 사고하자고 제안한다. 앞서 필자는 홍상수의 영화는 주인공들이 집 밖을 벗어날 때, 자신의 영토를 벗어날 때에야 시작될 수 있다고 적었다.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대구가 깨어지는 영화라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출발점에서도 '외출'이 아닌 '방문'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문호의 집에 들리기 위해 집 앞까지 찾아온 헌준을 문호는 마당에나 기껏 들일 뿐 부인 핑계를 대며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 헌준과 문호 역시 홍상수 영화의 다른 인물들처럼 우선 '외출'을 해야 한다. 집 밖으로 벗어난 인물들은 탈 일상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리 같은 모습의 행위를 반복한다. 이들은 밖으로 나오지만, 밖에서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하고 다시 (여관이나 술집) 안으로 돌아온다.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답습하는 것이다. 이들이 반복해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영화는 그들이 지나치는 장소의 특정한 좌표를 의도적으로 지우며 풍경을 비워낸다. 좌표가 지워진 자리에서, (장소를 지각하는) 우리는 내부(에 대한 지각)에서 외부(에 대한 지각으)로 곧장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풍경만을 바라보거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더 정확히 표현해 우리는 비어 있는 프레임만을 보게 된다.

비어 있는 프레임을 보여주는 과정은 프레임 속의 내용을 지우거나, 애초에 내용이 지워진 프레임을 보여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된다. 가령 ≪극장전≫에 등장하는 남산 타워의 경우를 보자. 줌인을 통해 타워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당겨져 보이긴 하지만, 이 타워는 원경에 속해 있다. 본래 원경에 속한 사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방향을 알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아무 데서나 보이는≫ 남산 타워는 동수에게나 관객에게 동수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남산 타워는 동수나 극 중 극의 주인공이 남산 근처를 배회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식(repere)이거나 기념비적 풍경이기 보다 아무 데서나 나타나 이곳이나 저곳, 이 장소와 저 장소를 마찬가지의 장소,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무규정적인 공간(quelconque)으로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와 같은 기념비적 풍경들, 웨스턴이 영화사에 기재한 풍경의 좌표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강원도의 힘≫의 강원도 동해나 설악산에서조차 우리는 기념비적 풍경을 목격하지 못한다. 웨스턴에 등장하는 기념비적 풍경은 미국민, 미국 영화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기호들이었다. 상권과 그의 후배는 기껏해야 내설악과 외설악을 아우르는 조형물을 통해서야 풍경의 전체성, 허구의 전체성과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남산을 오르고, 여관에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우리는 점점 방향 감각을 잃어간다. 이곳은 집 안인가, 여관 방 속인가, 남산 발치 아래인가, 극장 앞인가, 극장 속인가? ≪극장전≫ 영화 시작부에서 나뭇가지 뒤로 보이던 남산 타워가 뿌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이 풍경이 등장 인물에게 미치는 무기력함을 반영하면서 풍경의 자기 소멸을 암시한다. 남산 타워와 함께 시작하는 ≪극장전≫은 홍상수의 영화 중 단연 프레임 자체를 강조하는 영화다. 영실과 하루밤을 보낸 동수가 2층에 자리한 여관 계단을 걸어 나오는 현관 장면은 마치 동수가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이미 이영수 감독의 회고전이 상영되던 극장 문-또 하나의 프레임-을 열고,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온 바 있다. 영실이 동창회에 오는 장면 역시 영실이 음식점 대문으로 들어오는 샷과 방문으로 들어가는 샷을 끊어 구분하면서 문-프레임에 대한 통과를 강조한다.

내 집, 내 영토가 아닌 곳의 풍경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내 집과 내 집 밖의 구분이 희미해질 때, 내 집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벤야민은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곳은 개인의 우주, 개인의 실내 공간이다. 그는 부르조아들이 자신들의 실내 공간에 개인의 흔적을 새기기 시작했을 때, 이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구성되는 탐정 소설의 장르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유일하게 등장인물들이 새기는 흔적-수정된 원고지, 찢어진 콘돔 사이에 남은 흔적-을 뒤 따라 가며 보여주는 영화였고, 다른 어떤 그의 영화들보다 등장 인물의 거주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반면 이후의 영화들은 술집과 여관, 택시 안을 보여주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오! 수정≫에서 정보석은 이불을 빨아 흔적을 없애려 하고( 수정은 이불을 빨려고 애쓰는 재훈에게 ≪우리 흔적 남기는 게 그렇게 싫어요?≫라고 말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은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지우며,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은 벽의 낙서를 지운다. ≪해변의 여인≫의 김 감독은 아내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지워내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 풍경의 지배권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이다.

≪해변의 여인≫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라는 신도리 바닷가의 수평선은 극 중반에 이를 때까지 화면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김 감독과 그 후배, 문숙 세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며 일자로 서서 ≪저기 등대가 있네≫, ≪황사가 심하네≫같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카메라는 고집스럽게 세 사람의 모습만을 비추고, 서해안 바닷가의 풍경은 장면 밖에 남겨 둔다. 식당에서 다툰 후 바닷가 쪽으로 뛰쳐나온 김 감독과 후배가 지리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팬 기능이나 파노라마 기능이 고장이라도 난 듯이 화면 왼쪽에 있을 바다를 비켜가며 어중간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을 담는다. 김 감독과 하룻밤을 보낸 문숙이 다음 날 아침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김 감독을 벤치에 남겨 두고 바닷가로 내려갔을 때, 바다와 그 바다 위의 등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지루한 욕망의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우리는 풍경을 바라볼 수 없다. 김 감독처럼 말을 잘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해변의 여인≫에서 바닷가 풍경은 인물의 대사 속에만 존재하며 화면에서 배제되거나, 황사로 뒤덮여 아무것도 분간 할 수 없는 뿌연 공간,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래사장의 이미지로 남는다. 지아 장커의 평면적인 화면에선 마치 마띠에르의 예술을 통해 탄생한 듯 흙더미, 돌무더기의 질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평평한 화면은 내용물이 빠져 질감과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풍경이 배제되는 것은 풍경 속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과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며, 무언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수정≫의 두 번째 부분, 재훈과 관계를 맺고 난 수정은 재훈의 품에 안겨 창 밖을 내다본다. 이때 재훈은 이리오라며 수정의 시야를 실내로 돌린다. 애초 제주도에 가고 싶어했던 수정을 재훈은 서울의 한 호텔방으로 데려왔고, 수정은 제주도의 풍경도 서울 호텔 방 밖의 풍경도 바라볼 수 없다.

4. 청각적 풍경화 잡음들 또는 웅얼거림

지아 장커가 화면에 담아 내고자 주력하는 또 다른 풍경은 소음/잡음의 풍경이다. 잡음은 불어로 'parasites'인데, 이 단어는 '기생충 같은 존재, 기식자'라는 본래의 뜻이있다. 그렇다면 다시 기생하는 자, 식객이란 무엇인가. 식객은 본래 부잣집 식탁에 끼어들어 흥을 돋워주고 그 대가로 밥을 얻어먹는 자를 일컬었다. 그래서 잡음이란 본래의 음에 끼어들어 그 음을 흐리는 소리이긴 하지만, 우리는 잡음 제로의 순수 음을 상상할 수 없다. 잡음은 어쩌면 세상의소리가 존재하는 조건이다. 지아 장커는 시종일관 거리의 소리를 영화에 담아왔다. 역의 안내 방송, 길거리 가라오케 가판대의 노래 소리, 당국의 선전 방송 등이 그것이다. 이 소리들은 극의 흐름에 필수적인 정보를 주거나 주인공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대변하거나 하는 기능이 없이, 화면에 끼어든 '잡음'들이었다. 이 '밖'의 소리들은 평평하고 황량한 시각 이미지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해준다. 이차원의 공간은 이 잡음들과 함께 삼차원의 생명감-현실과 환영을 아우르는 기운-을 획득한다. ≪스틸 라이프≫에서 지아장커는 꼬마 아이가 부르는 유행가 소리 이외에도 공사장에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를 잡아냈다. 이 망치 소리의 리듬에 맞춰 시간을 잃어버린 듯한 산샤의 풍경은 역동성을 획득한다. 물론 이 역동성은 멜랑꼴리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는 산샤의 죽은 풍경들이 유독 ≪근원적 세계 unmonde originaire≫의 풍경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가 자연주의 영화가 나타내는 세계라고 부른 ≪근원적 세계≫는 규정된 세계, 질서 지워진 세계 내 어디인가에 존재하는 어떤 무정형의 세계를 일컫는다. 이 외따로 떨어진 세계는 질서 지워진 세계의 시작점이면서 종결지점으로 세계를 축조해 내면서, 세계로부터 부서져 내리는 그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2000년을 흘러온 강 물길을 뒤 바꾸어 버리는 공사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돌무더기들, 돌무더기를 쪼는 망치질 소리는 이 근원적 세계의 거친 기운을 전해 낸다. 또한 ≪세계≫ 속 세계테마파크 역시 이런 양면적인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가?

일상의 넘쳐나는 소음에 민감한 지아 장커와 달리 일상을 꼼꼼히 담아낸다는 홍상수는 이런 거리의 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홍상수가 관심을 기울이는 잡음은 거리의 소리, 소음이 아니라 인물들이 뱉어 내는 쓸데없는 말(이들은 대사일까, 아닐까), 말의 억양, 말 사이의 쉼표 같은 것들이다. 홍상수의 극 중 인물들은 때로 대사를 하기보다, 정확한 대사의 전달을 가로막는 쓸데없는 혼잣말이나 웅얼거림의 톤을 조절하는 데 더 큰 신경을 쓴다. 그때문에 우리는 빈번히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혹은 중얼거림)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사를 극의 텍스트라고 한다면, 이들의 웅얼거림은 텍스트의 빈틈이다. 그러나 이 빈틈은 텍스트 밖의 세계를 지칭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5. 사막의 시간과 시간의 사막

우리는 서로 다른 관심과 전략을 통해 규범적인 공간 구성의 규칙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두 감독의 예를 살펴보았다. 이들의 관심과 전략은 서로 다르지만, 이 둘 모두 풍경을 경유, 이탈의 길을 걷는다. 지아 장커는 기실 들끓는 에너지를 가진 죽은 풍경들을 통해 변화하는 중국의 시간을 나타낸다. ≪여백의 공포≫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사람들이 비어 있는 땅, 죽어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막 아래의 들끓는 움직임에 관해 길게 적은 바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린 왕자≫의 우화는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인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중국 회화의 전통과 서구 근대 시각 양식의 규범이 강요하는 긴장감 사이에서 새로운 영화 형식을 탐구하는 지아 장커는 이 시대의 운송 수단에 몸을 싣고, 황량한 사막 어디인가의 우물을 찾아나서는 자다. 홍상수의 초기작들은 기름진 평야 앞에서 발견한 말라 비틀어가는 잡초 더미, 경치 좋은 설악산 자락에서 발견한 죽어가는 금붕어를 보여주는 작업들이었다. 주인공들의 죽은 시간은 이 죽은 사물들과 공명을 일으켰고, 세계의 풍경을 지워갔다. 하나하나 지워진 풍경은 프레임으로만 남았다. 바다가 참 예쁘다고 말하는 인물들의 대사는 상대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 대화의 프레임일 뿐, 아무런 알맹이를 갖지 못한다. 프레임으로 가득 찬 세계의 풍경 없음을 보여주는 데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홍상수는 모더니즘 영화의 진정한 적자이다. ≪최고의 휴양지≫ 바닷가에서도 그는 출렁이는 물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해안가의 노랫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아니 그는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을 참이다. 그는 모래 바람과 모래 언덕-시간의 사막만을 생각하는 외롭고 용기있는 모험을 하고 있다.


단평·그 여인의 등 뒤에서 -이창동의 ≪밀양≫에 관하여


그녀는 자신을 배반한 남편을 사고로 잃고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땅에 살러 왔다. 이 사연 하나만 들어도 우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팔자 사나운 년, 지지리 복도 없는 년. 그녀가 남편의 고향, 밀양 땅을 찾은 건,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세상에 등을 지고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애와 그녀의 아들 준을 태운 차는 밀양으로 진입하는 국도 변에서 고장이 나 서 버린다. 쌩쌩거리며 달리는 차로 변에 그녀가 우리에게 등을 보이며 서 있다. 겨우 세운 트럭을 향해 슬리퍼를 끌며 달려가는 그녀의 애처로운 뒷모습, 고장 난 차 안에서 꼼짝 않고 앉아있는 아들을 향해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녀의 피곤한 뒷모습. 그녀는 밀양 땅에서 우리에게 얼굴에 띤 환한 웃음을 보여줄까. 그러나 좁은 밀양 땅에 도착하자마자 이웃에게 훈계를 둔 탓에 신애는 금세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자신에 대한 이웃의 '뒷담화'를 듣고 있는 신애의 거울 속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녀는 얼굴에서 진짜 표정을 지우고 갑각류의 딱딱한 등짝 같은 가면, 웃음 띤 얼굴의 가면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창동의 영화 ‘밀양’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자신에게 닥친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 영화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납치와 죽음을 겪고, 신의 교회가 주는 은총과 인간의 신앙심이 주는 배신감을 겪은 여인의 얼굴이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등으로 들려주는 영화. 그런데 이 모든 세상의 고통은 타인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문구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진정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타인에게 우리의 진짜 표정을 감출 수 있다면, 타인은 지옥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자는 등을 내 보인다. 또는 딱딱하고 표정 없는 등짝 같은 얼굴의 가면을 내 보인다. 그렇지만 타인의 지옥, 내 마음 속 타인의 지옥은 끔찍한 것이어서 신애는 고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대면하지 못한다). 경찰서에서 범인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했듯이. 그래서 우리는 등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아들의 납치 사실을 안 신애가 종찬의 카 센터로 꺼이꺼이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뛰어갈 때 우리는 얼굴보다 더 큰 격정을 표현하는 신애의 등을 바라본다. 한참을 뛰어가는 신애의 뒷모습, 길거리에 주저앉은 신애의 웅크린 등짝은 신애의 또 다른 얼굴,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는 얼굴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영화‘일식’의 첫 장면을 무기력과 권태에 빠져 소통을 거부하는 모니카 비티의 뒷모습으로 채웠을 때, 모니카 비티의 뒷모습도 그렇게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영화들이 등처럼 딱딱한 가면을 쓴 사람들의 얼굴만을 비추거나, 등진 자세가 표현할 수 있는 정념들, 정념의 이미지를 화면 안에서 감춘다. 이창동은 한 여인의 등을 통해 그녀가 외면했던 것, 그녀가 절박하게 표현했던 것,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 한다.우리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신애의 뒷모습을 같은 구도로 두 번 목격한다. 교회에 나가 마음의 평화를 얻은 신애가 싱크대 앞에서 떠오르는 아들 생각에 괴로워하며 서 있다. 그 뒷모습은 신애가 이웃에게 지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 뒤 감추고 있는 불안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범인을 만나고 난 후 정신을 놓은 신애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일련의 복수 행각을 벌인 후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도 싱크대 앞에 그렇게 서 있다. 하늘을 향해 “봐, 보란 말이야”라고 외치던 그녀 얼굴의 독기보다, 싱크대 앞에서 선 신애의 뒷모습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 뒷모습을 당신은, 우리는, 신은 과연 지켜보았던가. 영화의 마지막, 신애는 카메라에 등을 지고 집 마당에 앉아 머리를 자르고,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 사이로 신애의 얼굴이 비쳐 보인다. 우리는 그녀의 등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우리를 바라본다. 내 앞의 타인이 들어주는 거울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등 뒤를 바라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에게 얼굴과 등, 두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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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동아08)

대한민국 신춘문예/문학평론 2008/11/08 20:31
오생근(문학평론가) 한기(문학평론가)
문학평론 부문은 비교적 쉬운 심사 작업이 되었다. 한강의 소설을 해부한 ‘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현대적 몸의 담론 펼치기를 넘어, 병적 징후로 드러나는 신체미학의 세계를 질 들뢰즈의 이론에 비춰 의미화하는 비평적 솜씨는 드문 재능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당선자의 주소로 보아 유학 중이 아닌가 짐작되지만, 타국에서도 우리 문학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는 흔적을 보여주어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은 부피의 안심(安心)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배수아 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 대한 단평 ‘빈곤한 역사와 소설’도 유려한 비평적 해석의 글로 판단되었다.

그동안 많은 여성작가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더욱 유력하게 만드는 여성비평가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빈곤한 감이 있어 아쉬움을 주었는데, 유능한 신예 비평가를 맞아 한국문학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차점자들에겐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러 글들이 눈에 띄었지만, 대상 선정과 재단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비평 작업이란 담론의 개진 이전에 대상의 재단과 주제 포착으로 작업의 반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제가 신선하면서도 안정된 작가의 세계를 포착하여 당대성의 담론을 펼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윤 경 희
△197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동 대학원 불문학·영문학 석사
△미국 브라운대 비교문학 석사
△파리8대학 비교문학 박사과정 재학 중

가장 먼저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게 말과 글을 처음으로 가르쳐주시고 감정과 생각이 번져 나오는 기원이 되어주셨습니다. 동생들에게 고맙다고 전합니다. 지구별 곳곳에 멀리 떨어져 빛나는 반딧불 같은 우리들. 신광현 선생님께 아무리 드려도 모자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게 문학적 소양이 있다면 그것을 처음으로 알아봐주시고, 북돋아주시고, 존경하는 지도교수님이자 제 글의 가장 멋진 독자이자 삶의 따뜻한 멘토가 되어주셨습니다.

이성원 선생님께 잘 익은 포도주와 함께 감사드립니다. 낭만주의에 관하여, 공부의 대상을 넘어, 그것을 반드시 내 삶으로 살아내겠다는 의지적 충동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써도 써도 부족하도록 쓰겠습니다. 멀리 있어도 들리는, 깊이 울리는 언어를 만드시는 작가께 감사드립니다. 어느 먼 곳으로나 그녀의 책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부재하는 재능에 자학할 때마다 포근히 다독여주는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분, 제가 만드는 거의 모든 문장들의 독자, 제 삶의 수신인에게, 나침반으로, 체온계로, 사랑과 감사의 말을 보냅니다. 아침에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덤덤했는데, 하루의 일과를 무심히 수행했는데, 지금 감사의 말을 쓰는 동안 눈물이 아롱아롱 맺힙니다. 감사의 말로만 가득 찬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
단평·빈곤한 역사와 소설-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 윤 경 희


장평·새로운 문학적 신체의 발명 : 한강의 소설들


1. 신체, 징후, 미학적 진료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 종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가난, 실업, 우울증, 탈속. 그 중 무엇이라도 좋겠으나, 내 경험으로 볼 때 그 답은 질병이다. [......] 아름다움도 추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이, 나는 그저 병과 함께 살았다.
- 『그대의 차가운 손』

등단작인 「붉은 닻」에서부터 최근작인 『바람이 분다, 가라』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작품들에는 근현대적 의학담론의 시각에서 결코 정상이라 간주되지 않는 신체적 징후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그들이 앓는 병적 증상들의 일부는 작가의 집요한 관찰의 시선과 부단한 언어화의 시도에 힘입어서 현실세계에서 기술적으로 통용되는 병환의 분류기준에 맞추어 진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핍진성을 획득한다. 욕지기, 토악질, 위경련 등의 소화기능장애는 한강 작품 속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표출하는 대표적인 신체적 증상이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붉게 흉터 질 정도로 악력을 다하여 주먹을 쥔다거나 치아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로 이를 악무는 등, 하나의 견고한 돌덩이인양 온몸의 의사-마비상태를 지향하는 긴장강박증 역시 빈번히 발생한다. 사소한 외부적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경과민과, 표피의 상처와 울혈의 원인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통각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감한 신경마비가 공존한다. 급성야맹증 같은 히스테리성 신경마비, 거식과 폭식, 특정음식물 섭취거부 등의 식이장애, 우울증, 결벽증, 환청, 발작에 더해, 폭음, 알코올 중독, 노출, 질주, 자해, 투신 등 극한의 신체적 경험을 향한 의지적 충동이 한강의 인물들을 강렬히 사로잡는다.

병적 증상들에 관하여 때로는 작가 스스로 기술적 어휘들을 동원하여 구체적이고도 치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한강의 작품들은 결코 단순히 모호한 마음의 상처나 명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아픔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로 흐지부지 수렴되지 않는다. 작가가 구현한 병의 핍진성은 그러므로 독자의 입장에서도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병이라든가 글쓰기를 통한 치유 등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의미하는 바는 거의 없는 상투적이고 모순적인 어구들을 무책임한 해석으로서 제시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다. 존재의 근원에 병이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로든 그 어떤 행위로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적 사유의 개념적 대상, 은유 등의 언어적 구성물이기 이전에, 또는 그것들을 넘어서, 병은 신체의 물질적 유기조직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사유와 언어의 토대로서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인자라는 데 그 우선적인 실재성이 있다. 대다수의 경우, 병은 통증을 수반하고, 통증은 힘의 감각에 기인한다. 병에 관한 서사를 창조하거나 해석할 때, 병을 신체와 정신에 작용하는 실재적 힘으로서 인식하기도 전에 섣불리 언어화하면서 은유로 덮으면, 실재적인 고통의 감각은 신체적인 표현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언어의 감옥에 갇힌다. 언어로 치유되지 않는 고통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의 소설들에서 병적 징후들의 기술적인 국면에 치중하여 의학이나 교조적 정신분석 등 문학외적 담론의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큰 성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 병적 징후의 생생한 묘사는 신체와 언어의 새로운 관계를 향한 실험적 허구이지 학술적 사례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인물들은 통증을 자각하고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과 의사의 권위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지만(「여수의 사랑」에서, “난 아파요. 정말로 아프단 말입니다,” 「진달래 능선」에서 ‘이봐, 난 실제로 아프다구’), 징후는 병인에 대한 기존의 지식체계의 망을 빠져나가거나(「내 여자의 열매」에서 “지금 보이는 게 위장인데...... 아무 이상 없어요”), 어떤 의학기술이나 약물요법으로도 완치되지 않고 재발한다. 인물들은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를 구분하는 사회적 합의기준에 타율적으로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병의 인식과 치료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몽고반점」에서,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 [......] “...... 나한테 정신 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들이 행여 치유를 원하기나 한다면, 그것은 의학이나 정신과학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욕지기, 긴장강박증, 결벽증, 환청 등, 작중인물들이 “심인성 장애”라고 명명하는 일부 증상들의 경우, 그것을 앓는 인물들은 치료에 대한 의지 자체가 없고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 집착한다. 만성적인 위경련으로 가장 자주 구현되는, 병환의 완치불가능성과 단속적인 재발성은 한강이 묘사하는 모든 병적 징후들을 공통적으로 가로지르는, 징후들의 징후이다. 내장의 경련은 「붉은 닻」에서 『채식주의자』까지만 아니라 아마도 차후의 소설들에서도 재발할 것이고, 마치 고지식한 내과 의사를 속이듯 독자의 시선을 피하며 달아나는 경련의 인자는 내장에서는 물러간다한들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심장, 눈꺼풀, 입술, 사지, 자궁 등 몸 구석구석을 끈질기게 유랑하면서 신체를 파동치게 할 것이다. 결국 하나의 소설에서 다른 소설로 파동의 에너지를 전달하며 반복되는 경련은 작중인물의 신체의 격렬한 운동을 넘어서 한강 작품의 문학적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리듬과 패턴으로까지 증폭된다. 따라서 해석이 나아가야 할 지점은 작중인물들의 병명을 진단하거나 정신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토하고 경련하는 글에서 생성되는 낯선 리듬을 감각하는 것이다.

결국 병과 신체의 실재성을 고려하지 않는 언어유희가 체감되는 통증에 무감각함으로써 병과 치유에 관한 구체성 없는 모호한 서사만을 양산하고, 병과 신체에 관한 문학외적 담론이 문학적 신체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유혹적인 핍진성의 외피로 덮인 허구적 징후를 해석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을 때, 들뢰즈가 제시한, 치료에 관한 그 어떤 기존의 담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순수하게 미학적인 진료”[une clinique purement esthetique] 개념의 실현가능성은 설득력을 얻는다.1)

기존의 의학, 정신분석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병적 징후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는 글쓰기를 언제나 형성중이고 언제나 미완성인 “되기”[devenir]의 과정이자,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낸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un passage de Vie]로 정의한다.2)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그러한 생의 통로가 가로막히고 끊겼을 때 발생한다. 글을 씀으로써 지속적으로 "되기"의 과정을 실천하고 생의 통로를 뚫는 작가는 따라서 병자가 아니라 세계와 인간에 관한 징후들을 진료하는 의사이다. 문학은 삶의 길목이 막힌 자들,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발명한다. 그들의 혁명적인 열광과 착란은 지배자의 시각에서는 광기와 비정상이지만, 억압받은 생의 활로를 뚫고 끊임없는 “되기”의 가능성을 되찾아준다는 점에서 해방적인 치유책으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역설적으로 병이 아니라 건강을 촉진한다.3)

이러한 문학의 임상적 기능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신체에 침투한 지배와 피지배,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 이성과 광기 등 이분법적 대립항들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일견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의 논지에서 병적 징후는 다시 건강의 징표로 치환되므로, 결국 병을 다시 억압과 말소의 함정에 빠뜨린다거나, 또는 착란과 광기에 대한 낭만적이고 순진한 예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비정상은 정상으로, 병적 징후는 건강으로, 죽음에 맞닿은 경험의 통렬한 감각은 생명의 징표로, 광기는 예술혼 등으로 손쉽게 치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을 미학적 진료를 실천하는 임상적 문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병적 징후들에 대한 진단과 치유책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징후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신체에 징후들을 접붙여서 그것들이 신체를 관통하는 궤적을 치밀하게 뒤쫓고, 신체와 징후와 궤적의 복합적인 형성물을 언어로, 글로, 즉 문학적 신체로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전언대로, 작가는 의사이고, 의사는 발명가이다. 한강은 토악질하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환청을 듣거나 투신하거나 자해하거나 질주하는 신체들을 발명하고, 단속적으로 재발하는 완치불능의 징후 속에서 그들은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몽고반점」) 같은, 극한의 감각과 경험이 집약적으로 응축된 매 찰나를 살아내고, 그 찰나들의 연속은 곧 생이 가로지르는 통로, 탈주의 구멍을 이룬다.


2. 구멍, 탈주, 기관 없는 신체 되기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거대한 바윗돌 같은 어둠이 재인의 몸을 조여오고 있었다. 살이 뭉개어졌다. 등뼈가 오그라들었다. 쇄골이, 갈비뼈가, 무릎과 복숭아뼈가 일제히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모든 근육과 내장들이 성내며 사방으로 튕겨져나갔다.
- 「저녁빛」

욕지기와 구토감은 한강의 소설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관찰되는 신체적 징후이다. 욕지기가 치미는 상황과 원인은 다변적이다. 길 위에 떨어진 종이를 보고 구토하는 앙트완 로캉탱처럼, 외부로부터의 감각적 자극이나 타자적 대상물에 의해 촉발되어 구토하는 인물은 한강의 소설 속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우선 그들의 구토는 이질적인 타자를 거부함으로써 신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기보존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토사물을 쏟아내듯 세계로부터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말소하거나 내던져 버리고 싶은 자기부정의 성격이 강하다. 입영 전날 자신의 “젊음이, 슬픔이, 바람 같은 만남들이 일제히 치밀어올라와” 욕지기를 느끼고 토악질을 하는 「야간 열차」의 화자나, 과거에 제작했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 이미지들에 대한 자신의 미움과 환멸과 고통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몽고반점」의 비디오 아티스트처럼, 혐오와 부정의 대상은 현재의 자신과 연속체를 이루는, 과거의 의식과 기억과 감각이 응축된 순간순간의 자신의 면모들이다. 이들에게는 과거가 비교적 다행스럽게도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자취와 기억의 편린으로만 남아 있는 반면,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의 L.에게는 사춘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다스리기 위한 폭식의 결과로 비대한 육체로 남았다. L.은 계부의 성적 폭력에 대한 방어적 기제로 “허벅지가 너무 굵어져서 억지로 파고들기” 어려운 “허옇고 물컹물컹한 몸”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몸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처이자 흉터이다. L.의 거식증과 구토는 근원이 불분명한 과거의 감정이나 기억에 대한 염오에서 비롯된 비자발적인 내장 운동에 의한 단순한 메슥거림과 욕지기를 넘어선다. 그녀는 과거가 각인된 자신의 신체 전체를 거부하려는 의지에서 자발적으로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는다.

“평생 못 달아나. 죽을 때까지 난, 내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내 몸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니까.” 그러나 L.의 자조에서 역설적으로 엿보이는 것은 해방과 탈출의 통로이자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전환되는 신체의 가능성이다. 구토는 식도와 입을 통해서 토사물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 “붉은 내장들을 줄줄이 토해낸 뒤, 할 수만 있다면 양말 속 뒤집듯이 항문까지 고스란히 뒤집어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흰 꽃」의 화자의 경우에서처럼 부정하고 싶은 과거의 기억들과 감정들을 내뱉으려는 욕구가 신체적 징후로 발현된 것이다. 입은 “흡사 짐승의 소리 같은, 분절되지 않은 비명”(『그대의 차가운 손』),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 괴성 같은 신음”(「몽고반점」)처럼, 소통과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언어로는 발화할 수 없었던, 응축된 회오의 감정이나 억압된 욕망의 목소리가 탈출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구멍은 신체의 도처에 존재한다.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몽고반점」) 듯한 몽고반점은 단순히 색소가 침착된 표피를 넘어서 그것보다 더 깊은 심층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내부를 꿰뚫고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의 시선을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구멍으로 변환된다. 멍은 외부에서 가해진 힘에 내부의 혈관이 반응하여 생성된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접점이자, 신체의 내부적 변화의 징후가 스미고 새나오는 탈출구이기도 하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떠나서 피를 갈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체의 가능성을 꿈꾸는 화자의 아내에게 피부의 푸른 멍은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가 발현된 징후이면서 녹색식물로의 변신의 욕망 역시 표출하는 탈주의 통로이다. L.에게 있어서 부정하고 싶은 신체로부터의 탈주가 자학적일 정도로 지난한 까닭은, 그녀가 껍데기로서의 신체 이미지의 환상에 갇혀서 오로지 실제의 구멍인 입으로만 탈주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피부 전체를 탈주의 구멍으로 이용하고, L.의 경우와는 달리 환상적인 서사구조 덕택에 가능하긴 했지만, 기존의 신체로부터 탈피하여 완벽한 변신을 성취한다. 변신은 "되기"의 일환으로서, “알아볼 수 없게 됨”[devenir- imperceptible]으로써4) 세계로부터 자신을 은폐하고 위장하는 행위, 정체성의 교란을 통해 억압적인 질서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와 구멍을 뚫는 행위이다.

투신과 질주의 충동 역시 구토와 함께 구멍을 통한 탈주의 욕망을 표출한다.「몽고반점」의 화자는 자기부정의 구역질과 동시에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먹고 마셔온 곳을 모두 토해”내고 싶은 구토감과 “달리다가 숨이 차서 고꾸라지고”(「질주」) 싶은 질주욕구는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징후는 신체를 생성한다. 그러나 징후에 의해 신체가 생성되는 양상은 작중인물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변화의 방향과 대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징후가 고통을 수반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신체는 실재이기도 하지만 담론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물질로서의 신체는 실재계에 속하지만 그것을 조직화하고 표상하는 것은 상상계의 이미지와 상징계의 언어의 그물망이다. 실재로서의 물질적 신체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개입되는 이미지와 언어의 스크린을 투과함으로써 하나의 통합적 조직체로 형성된다. 이미지와 언어에 의해 신체가 하나의 통합적 조직체로 형성될 때 실재로서의 신체는 필연적으로 억압되고, 그것은 징후의 형식으로 귀환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 E.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신체, 즉 미, 경제성, 섹슈얼리티 등 모든 담론의 층위에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맞추어서, 소읍출신의 육손이 소녀에서 능력 있고 아름다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자신의 신체를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의 변신의 의도는 구멍이 아니라 “데드 마스크” 같은 껍데기를 만드는 데 있고, 그것은 탈주가 아니라 사회적 진입을 목적으로 한다. 완벽히 조직된 껍질로 감싸인 그녀의 신체에서 누출되는 징후는 불감증, 즉, 고통 없는, 그러나 쾌락에도 반응하지 않는, 감각의 부재이다.

E.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인물들은 표층적인 욕망의 방향과는 다른 신체를 생성하는, 또는 알 수 없는 근원에서 발생해서 신체의 통합적 조직성을 교란하는 징후들에 시달린다. 이때 격렬한 고통의 감각은 통합적 조직체와 그 조직체의 틈을 뚫고 나오려는 징후 사이의 길항에서 발생한다. 징후는 일견 정상적으로 조직되고 기능하는 신체의 표면 아래 다른 신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징후는 진부한 이미지와 빈곤한 언어로 표상되지 않은, 협소한 주변 세계를 구성하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벗어나는 신체가 탈주해 나오는 구멍이다. 정상적인 기관 기능을 학습하고 조직의 통합성을 획